
초등학교 졸업사진, 1985 (중앙 우측 정두섭, 좌측 친구 남규)

지역 어린이 도예교육, 2004
강원도 양구, 차 한 대 들어오지 않는 산길을 따라 한 시간 반을 걸어 나와야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곳, ‘공수리(公須里)’에서 정두섭은 태어났다. 마을은 몇 가구 되지 않았고, 학교 역시 선생님 두 분에 전교생 이래봤자 열네 명이 전부인 교실 두 칸짜리 분교였다. 1학년부터 3학년이 한 반, 4학년부터 6학년이 다른 한 반이 되어 수업을 받던 모습은 지금도 양구의 밤하늘처럼 선명하다. 선생님들은 학생 수가 적다 하여 가르치는 것을 결코, 허투루 하지 않았다. 탁구·육상 같은 체육, 사생·웅변·발명품 대회까지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세상과 이어주려 애써주셨다.
그중에서도 미술은 그에게 양구군 미술대회에서 몇 번 입상해서 그런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가장 친숙한 분야였다.
네 명의 동급생은 오랜 인연이 칡넝쿨처럼 이어진 사촌이거나 이웃이었다. 졸업 후 남규와 읍내 양구중학교에 진학했다. 문제는 통학이었다. 8시에 시작하는 자율학습시간에 맞추려면 적어도 6시 반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여름이야 괜찮았지만,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해가 짧아 어린 학생에게 산길 도보 통학은 여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 학기 만에 학교를 그만둔 남규의 빈자리는 그 길을 더욱 넓어 보이게 했고, 엄습해온 어둠의 공포는 오롯이 그의 몫이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고 정두섭은 말한다. 중학교 2학년 말, 부모님은 결국 전 재산을 끌어모아 읍내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했다. 그제야 비로소 정두섭은 긴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처의 변화가 학교생활의 변화를 전제하지는 않았다. 입학과 함께 미술부에도 들어가 봤지만, 등하교에 지쳐 이미 관심의 불씨는 사그라든 뒤였다. 그렇게 별 볼일 없이 중학교 과정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양구종합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상위권 친구들은 대부분 춘천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렇고 그런 나머지들이 모여 양구종고 농과·축산과·보통과를 채우고 있었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품고 진학반에 들어갔지만, 기초학력 부족은 말뚝에 묶인 발목처럼 놔주질 않았다. 그러다 운명처럼 공부 잘하는 짝을 만나 매일 도서관에 드나들게 되었고, 그 친구를 따라다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성적도 차츰 좋아질 수 있었다.
3학년 어느 날, 진로 상담 시간. “산업디자인과에 가고 싶습니다.” 정두섭은 주워 담을 수 없이 단호한 의지를 선생님께 표명하고 말았다. 양구에는 제대로 된 입시 미술학원이 없던 때였다. 궁여지책으로 중학교 미술부 실기실을 드나들며 소묘와 구성을 독학으로 익혀 나아갔다. 그러다 어렵게 작은 미술 교습소를 찾아 입시 준비에 들어갔지만, 전공자의 지도가 아니었기에 시작부터 정두섭은 분명한 한계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미대를 다니다 입대한 군부대 말년 병장 한 명의 도움을 받아 강원대학교 산업디자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도전은 야무졌다. 역시 부족한 준비로 전기 모든 대학에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마지막 한 곳, 구성과 소묘만을 보던 국립 강릉대학교 산업공예학과 도예 전공에 원서를 냈고, 그것이 도자기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정두섭이 본격적으로 도자에 몰두한 것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3학년 때였다. 공모전에서 입상도 하고 졸업식에서는 문화상을 받는 영광도 안을 수 있었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와 작은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중, 18세기 백자 달항아리의 역사와 지금도 이를 잇는 백토가 있는 양구에 박물관이 건립될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 박물관에서 일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도자 작업을 제대로 해볼 수 있겠구나.” 장작가마에 불을 드릴 때처럼 은근한 의욕이 정두섭의 가슴을 데우고 있었다. 그러려면 전문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박물관의 윤곽이 드러날 무렵이면 자연스럽게 군청에 채용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며 석사과정에 진학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과정이 끝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이왕 시작한 거 “재벌구이로 의지를 더 굳혀보자.”라고 마음먹고 ‘양구지역 백자연구’라는 방향을 미리 정하고 강원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다시 들어가 집중 심화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그해(2006) 5월 15일, 드디어 정두섭은 박물관에 특별 채용되었고, 그렇게 맺은 박물관과의 인연이 내년이면 벌써 20년째를 맞게 된다. “박물관 일과 학업의 병행은 절대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때야말로 제가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렇게 2011년,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회상하는 정두섭 관장의 검은 얼굴에 묻은 백토가 유난히 희게 보였다.

박물관 입구, 정두섭 관장, 2025
지역의 경쟁력, 지역 문화에 있다.
“최근 다양한 변화로 거리가 좁혀지긴 했지만, 박물관은 오랫동안 대중에게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양구에는 박수근미술관, 양구선사박물관, 양구인문학박물관, 양구백자박물관이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박물관은 여전히 먼 곳입니다. 이 기관들의 설립 목적은 지역의 고유한 문화자원을 발굴하고 알리기 위함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유한 문화자원에 집중할 때 비로소 경쟁력은 향상되고 존재의 의미가 명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지방 박물관들은 지역성은 제쳐두고 그저 유명 작가를 유치하거나 가치가 큰 유물만을 추종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조직이나 운영정책의 일관성, 예산 등에서 한계가 여실한 지역의 비항구적 단견일뿐더러 개성과 역사성 측면에서도 우려됩니다. 따라서 양구와 같은 기초자치단체 공립박물관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지역 고유의 역사·문화·자원을 더 깊이 파고들어 지역민이 주체가 되는 전시와 교육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운영해야 합니다. 규모에 맞는 진정성을 끝까지 유지해 나아가야 하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어쩌면 당연해 보일 수 있는 정두섭의 지역 박물관론은 오랜 현장의 퇴적물이어서 더 특별해 보였다. 양구에서 태어나 타지로 나가 양구의 역사 문화자원을 연구한 후, 연어가 회귀하듯, 고향으로 돌아와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 정두섭은 지역의 문화가 지역과 함께 어떻게 성장해가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재래종 관장이다. 그래서 그는 ‘박물관은 단순히 과거의 공간이 아니라 지역의 기억으로 미래를 보여주는 수장고라고. 그리고 그 길을, 앞으로도 묵묵히 걸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대입을 앞두고 보였던 단호함이 다시 되살아 나는 순간이다.
- 정두섭(鄭斗燮, 1972- ) 강원도 양구 출생. 강릉대 도자전공 학·석사, 강원대 박사. 양구백자박물관 학예사 및 관장(2006-현재). 강원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강릉원주대 겸임교수 역임. 국내외 개인전 25회. 한국박물관협회장상·강원도지사상(2009), 행정안전부 장관상(2020), 국토교통부 장관상(2021). 제2회 올해의 젊은 큐레이터상(2011, 국립중앙박물관장) 수상. 「楊口地域의 白磁와 白土(양구지역의 백자와 백토)」(『인문과학연구』,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등 논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