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의 현현 – 빛을 품은 잠재적 시공간 회화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권순익의 최근작은 선(線)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 〈선〉 연작은, 무수한 도트(dot) 위에 흑연을 올려 문질러 쌓아 올리는 〈무아(無我, Absence of Ego)〉 연작이나 화면 위에 기다란 유선형의 틈새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흑연을 문질러 올리는 〈틈(interstice)〉 연작, 그리고 이 두 연작의 특성을 한데 아우르는 〈적‧연(積‧硏)_틈〉 연작이 도달한 궁극의 세계가 된다. 아울러 ‘점’으로부터 시작되는 구불구불한 굵은 선의 궤적을 탐구하는 새로운 연작인 〈느낌, 선〉은 이전 연작에 잠재되어 있던 ‘선의 미학’을 화면 전면에 불러온다. 그것이 무엇인가?

II. 소환하는 선 – 운동하는 잠재태
최근작인 〈느낌, 선〉 연작은 매우 단순한 선의 세계를 선보인다. 권순익은 캔버스 위에 가로 혹은 세로의 방향으로 몇 개의 선들을 병치하여 그려 올린다. 평행을 이루는 선의 궤적은 그가 붓을 화면 위에 서서히 끌고 가면서 만들거나 점을 찍듯이 혹은 짧게 선을 긋듯이 천천히 선을 연장해 만든 까닭에, 마치 달팽이가 물감 위를 천천히 걸어간 흔적처럼 보인다.
시각적으로는 구불구불한 선의 형상으로 인해 작품은 마치 고랑과 이랑을 이룬 ‘경작된 밭’의 풍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드넓게 펼쳐지기도 하고, 줄 위에 건조할 옷가지를 널어놓은 것처럼 또는 자연목을 이어 붙여 만든 대문처럼 정겨운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느낌, 선〉 연작은 선(들)이 구축하는 추상이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 자연의 정겨운 풍광처럼 보이기도 한다.
흥미로 것은, 그의 이 연작이 0차원 점에서 시작해 1차원의 선으로 변환되는 ‘운동 흔적’을 만든다는 점에서, 2차원 평면 공간 안에 시간의 문제의식을 끌고 와 3차원의 작품을 4차원의 무엇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공간에 시간이 맞물린 4차원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연작은 과거의 시간을 연속적으로 ‘지금, 여기’에 소환하는 시공간 회화라고 할 만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작품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의 ‘운동 흔적’을 견지한 ‘잠재적 시공간 회화’인 것이다.
들뢰즈(G. Deleuze)의 철학에서 잠재태(le virtuel)란 현실화(actualisation)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숨어 있는 존재이지만, 엄연히 현실의 시공간에 실존하는 실재(réalité)이듯이, 권순익의 회화에서 선은 점이나 색면의 언어 속에 숨어 있어 쉬이 발견되지 않은 ‘현실의 시공간 속 실재’이자 궁극의 조형 언어인 셈이다. 풀어 말하면 그의 회화에서 1차원의 선이란 선 이전의 존재인 0차원 점에서 기인하는 운동 혹은 운동 흔적을 지닌 잠재태일 뿐만 아니라, 선 이후의 존재인 2차원 평면 안에 선을 숨겨 놓은 잠재태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상은 최근의 〈느낌, 선〉 연작뿐만 아니라 이전의 연작에서도 잘 담겨 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권순익은 주로 빈 캔버스 위에 고운 흙을 섞은 물감을 바른 후, 그 위에 짧은 선을 반복적으로 집적해서 긋듯이 물감을 올리거나 물감의 색층을 가르는 ‘사이 공간’을 만들어 그 위에 흑연을 문질러 올리는 방식으로 창작의 조형 언어를 실험한다. 이전의 많은 연작에서 ‘선’은 화면 위에 물감을 일시적으로 펴 바르지 않고, 격자 틀 안에서 가로 또는 세로 방향으로 단계별로 물감을 빗질하듯 촘촘하게 채워나가는 방식에서 가시화된다. 붓으로 물감을 칠할 때 색면 안에 골과 마루 혹은 요철(凹凸)을 형성하면서 수직의 빗살무늬와 같은 선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 선들은 명확히 말해 선이 아닌 ‘색면 속에 자리한 짧은 길이의 의사(擬似)선의 집적체’다. 역설적으로 말해 ‘색면 속에 선(들)의 형태로 자리한 잠재태’인 셈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여러 색으로 물감들이 쌓이고 마르길 반복하면서 만든 여러 색면을 화면 끄트머리에 매우 좁은 간격으로 선보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색선’들은 그야말로 ‘‘색면 속에 숨어 있었던 잠재태로서의 선’이다. 선은 잠재태의 형식과 내용으로 포진해 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흙과 안료를 미디엄에 섞어 만든 저부조의 ‘덩어리 점’을 화면 위에 만들어 올린 후, 흑연으로 광택을 입히는 〈무아〉 연작에서 ‘선’은 어디에 있는가? 선이 되지 않은 점들만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권순익은 화면 위에 원형 혹은 격자의 형태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연속적인 무수한 점들로 화면을 구성하고 그중에서 일부의 점들 위에 볼록으로 된 흑연점을 만들어 올리면서 평면과 입체의 만남을 시도한다. 이때 일부의 흑연점은 서로 달라붙어 몸을 맞붙인 상태로 상대방을 공유하면서 ‘점 아닌 짧은 선’을 만들기도 한다. 점들로 이어진 그의 ‘점 아닌 점, 선 아닌 선’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실선에서 일정 부분의 간격을 지운 상태인, ‘점선 혹은 파선(破線)’의 형태를 띤다. 이 파선은 점들로 가득한 권순익의 〈무아〉 연작에서 우리가 새로운 시각으로 발견하는 잠재태로서의 선인 셈이다.
우리가 파선을 건축 설계 도면이나 수학적 도형에서 물체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표현할 때 쓰는 것을 상기할 때, 권순익 작품에서 이 파선은 비유적으로 말해,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보는 자의 관심에 따라서 비로소 현현(顯現)하는 심리적 잠재태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우리는 권순익의 작품을 점과 선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리고 물리적 현상과 관자의 심리 사이에서 양자를 오가며 쌍방 운동을 지속하는 ‘잠재적 시공간 회화’라고 부를 만하다.


III. 빛을 품은 선 – 검고도 흰 사이 공간
권순익의 작품에서 선은 시각적으로 점과 색면 그리고 색면과 또 다른 색면 사이에 자리한다. 특히 〈틈〉 연작이나 〈적‧연_틈〉 연작에서 ‘선’은 ‘틈’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즉 한색이나 난색의 색면들 사이에 자리한 사이 공간(interspace) 혹은 접점(interface)의 공간에 길쭉하게 자리한 유선형의 ‘틈’은 ‘또 다른 선’인 셈이다. 그것은 밭의 고랑처럼 나지막하게 패인 오목(凹)의 공간으로 자리한다.
이 오목의 사이 공간은 양측의 색면 공간을 하나로 잇고 서로 만나게 하려는 듯, ‘빛나는 살’을 채워 올린다. 빛나는 살이라니? 그것은 작가 권순익이 캔버스 위 사이 공간에 연필을 문질러 광택 옷을 겹겹이 입히면서 쌓아 올리는 흑연의 질료층을 지칭한다. 〈적‧연_틈〉 연작에서 적(積)은 ‘쌓다’를, 연(硏)은 ‘갈다’를 의미하듯이, ‘물감층의 쌓기’와 더불어 ‘흑연층의 쌓기와 갈기’가 맞물린 결과인 흑연의 질료층은 검지만 흰 상태를 드러낸다. 검은색의 흑연을 지속해서 문지르면 곱게 갈리면서 도포되는 까닭에 마치 은빛이나 흰빛처럼 화면 위에 광택의 효과를 드러내는 까닭이다.
이 ‘유선의 틈’ 혹은 ‘검고도 흰 또 다른 선’은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서 작품을 보는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서 광택의 효과를 각기 달리 선보인다. 어떻게 보면 새까만 흑연이지만 이러한 유동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하얗게 빛나기도 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흑연으로 뒤덮인 이 ‘유선형의 틈’은 가히 ‘검고도 흰 반영체’ 혹은 ‘빛을 품은 선’이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권순익의 작품에서 이러한 ‘또 다른 선’으로서의 유선형의 틈은 변환과 치유의 메타포로 작동한다. 그것은 검고도 누추한 질료가 빛나는 값진 존재로 변신한다는 연금술적 변환의 상징처럼 해석되거나 마치 피부에 깊이 베인 상처가 아물면서 만들어지는 볼록한 흔적인 ‘반흔(瘢痕)’처럼, 상처에 대한 치유의 결과물처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틈〉 연작이나 〈적‧연_틈〉 연작에서 권순익은 〈틈〉에 대한 영문으로 크랙(crack)이나 갭(gap)이 아닌 “암석 내부에 나타나는 공극이나 절개부”를 지칭하는 인터스티스(interstice)를 사용한다. 생각해 보자. 수정과 같은 보석이나 자연금은 단지 암석의 ‘틈’에 끼어 있는 이질적 존재일 따름이지만, 인간에게 발견되어 비로소 빛나는 존재로 되살아난다.
이렇듯이, 권순익의 ‘검고도 흰 유선형의 틈’은 ‘또 다른 선’으로서 기능하면서 변환과 치유의 메타포로 작동하기에 족하다. 권순익의 작업에서 쌓기와 갈기가 맞물려 만들어진 ‘검거나 흰 틈’ 혹은 ‘빛을 품은 선’은 이제 ‘무가치에서 가치, 없음에서 있음, 열등에서 우등, 그리고 상처에서 치유’로 가치 변환한다.
한편, 권순익은 기왓장 설치를 통해서 자신의 작업을 조각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기와 설치 작업은 우연한 계기로부터 비롯되었다. 흑연 작업을 위해 연필심을 실제 기와 윗면에 미세하게 갈다가 검은 기왓장이 점차 빛나는 검정색으로 변하는 마법 같은 신비를 발견하면서부터였기 때문이다. 실제의 기왓장을 설치하던 방식으로부터 최근에는 스티로폼으로 기와 형상을 만들고 한지를 붙여 그 위에 흑연을 문질러 올리는 방식으로 변모되었지만, 그 변화의 양상과 상관없이, 그에게 기와 설치 작업은 캔버스 작업에서 미처 담지 못했던 ‘빛나는 검정’의 세계를 3차원으로 확장하는 작업이었던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 권순익은 전시장 초입 공간에, 바닥에서부터 높은 천장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든 기왓장을 종(縱) 방향의 ‘선 형상’으로 집적해서 빛나는 검정의 세계를 선보인다. 기왓장을 나무 뼈대 위에 연속으로 집적해서 만든 ‘입체의 세로선’은 삼중의 레이어를 겹쳐서 설치한 까닭에 앞과 뒤를 연결하는 공간의 깊이감을 더한다. 게다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맞닥뜨리는 이 풍경은 관객의 움직임과 위치에 따라 설치작품의 형상뿐만 아니라 검은색과 빛의 강도를 각기 달리 선보인다. 검거나 흰 무엇으로 다양하게 ‘빛을 발하는 선’의 형상은 보기에 따라 전시를 알리는 신성한 제단처럼 보이기도 하고, 검은 비가 내리는 풍경 또는 바람에 일렁이는 들판의 빛나는 밤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IV. 에필로그
권순익의 이번 개인전은 ‘여기’라는 부제를 내세운다. ‘여기’는 ‘이곳’처럼 “말하는 이에게 가까운 곳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로 장소 혹은 공간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이지만, “대명사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종종 ‘이때’처럼 특정하는 시간을 불러오기도 한다.
권순익은 작가 노트에서 “오늘(현재)’을 잘 살 때 지금, 이 순간은 완벽해진다. 현재에 충실한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작품을 통해 힘든 시기에 현재의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위로와 위안을 전하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현재의 오늘’은 존재론의 범주에서 하이데거(M. Heidgger)의 ‘여기, 지금(Hier und Jetzt)’과 상응한다. ‘세계-내-존재’인 인간의 ‘현존재(Dasein)’로서의 위상을 시간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우리에게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지니는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한다.
그렇다면 권순익이 예술가로서 ‘현재에 충실한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작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여기, 지금’에서 몰입할 때 최상의 경험을 하는 것으로 파악했던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의 ‘몰입(flow)’에 관한 담론을 떠올리게 한다. 권순익에게 있어, 화면 위에 흑연을 갈아 올리고 잠재태의 선을 시각화하는 창작은 힘든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몰입 상태에서 그것은 즐거움, 행복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의식의 경험으로 꽉 차 있는 상태인 ‘몰입’이 그의 창작을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권순익은 점과 색면, 색면과 색면, 과거와 현재, 풍경과 추상, 조형과 심리 사이에서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틈에서 잠재태로 존재하는 ‘선’을 소환하여 시각화한다. 비움과 채움이 어우러진 색면 안에서 잠재태의 선을 발견하거나, 선 안에 빛을 가득 담아 ‘검고도 흰 사이 공간’을 창출하는 권순익의 ‘잠재적 시공간 회화’는 ‘여기, 지금’에서 여전히 노동과 명상 그리고 충만한 행복이 오가는 ‘몰입’을 통한 창작을 거듭하는 중이다.
(202410)
출전/
김성호, 「선(線)의 현현 – 빛을 품은 잠재적 시공간 회화 」, 『권순익』, 전시 카탈로그, (권순익 개인전, 2024. 11. 02~11. 30, 아트소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