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매화도 - 온고지신의 정신과 법고창신의 조형 실험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녹원(綠元) 박앵전의 이번 전시는 2020년 매화, 2022년 대나무를 소재와 화제(畫題)로 삼아 ‘문인화의 현대적 계승과 재해석’을 시도하면서 장기적으로 계획한 2년 주기의 개인전이다. 특히 2024년 올해 개인전은 매화라는 화제로 되돌아가되 이전보다 더욱더 현대적인 조형에 근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문인화의 현대적 계승과 재해석’이란 말에서 ‘현대적 계승’에 방점을 찍은 셈이며, 그것의 본질적 의미는 ‘현대적 변용(變容)’에 집중된다. 

‘변용’은 전통적 원전을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동시대의 언어로 제시하면서 발현된다는 점에서 전유(專有, appropriation)의 개념과 연동한다. 전유란 ‘어떤 것을 취하고 그것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원래의 개념과 기능을 전복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변용과 전유가 연동하는 창작 태도가 오늘날 ‘전통의 현대적 계승’의 당면한 과업임을 강조한다. 즉 박앵전의 회화 실험에 있어서 ‘문인화 더 나아가 한국화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변용 그리고 전유’에 관한 것으로 집중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을 취한다면, 그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해설된다. 온고지신은 공자가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거론한 것으로 “옛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는 말로부터 온 것이다. 이 말은 새것을 알기 전에 필히 과거 전통에 대한 앎을 전제하는 연구 태도와 관련된다. 반면에 법고창신은 방점이 창신에 찍혀 있다.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함”이라는 의미의 이 고사성어는 옛것에 대한 변용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움을 창출할 수 있다는 창작 태도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앵전의 이번 전시는 어떠한 방식으로 온고지신과 법고창신 그리고 현대 한국화의 변용과 전유를 실현하고 있는가? 그녀의 작업이 추구하는 변용과 융합은 통시적인 종적 시간과 공시적인 횡적 공간이 맞물리는 실험이었다. 따라서 이 글은 그것을 ‘문인화 전통 정신의 전유’와 ‘문인화 전통 형식에 대한 변용과 서구 형식의 융합’으로 해설한다. 









먼저, 박앵전의 최근 작업이 지닌 ‘문인화 전통 정신의 전유’에 관한 것이다. 

무엇보다 박앵전은 이번 전시에서, 문인화의의 오랜 소재인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로 불리는 매화를 화제로 불러와 그것의 새로운 재해석을 시도한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깊은 산중에서 꽃을 피우고 은은한 향기를 널리 퍼뜨리는 존재라는 점에서 오래전부터 사대부 문인들이 고결함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하고 덕(德)과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군자(君子)로 칭해 왔다. 사대부 문인들이 이러한 매화를 문기(文氣)를 고취하고 문향(文香)을 향유하기 위한 화제로 삼아 왔다는 점에서 매화는 사대부 문인이 닮아야 할 자연의 고결한 원형이고, 매화도는 ‘여기 화가(餘技畫家)’들이 자연의 정신을 사색하는 매개체이자 매개 방식이 된다. 

박앵전은 자연의 고결한 상징인 매화를 화제로 삼아 오늘날의 복잡다기한 현대인에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의미를 되묻고 고요와 평화로운 정신적 여유를 요청한다. 매화를 화제로 대면하면서 모색하는 내면의 여유와 사색은 그녀가 번잡한 현실에서 시도하는 명상과 같은 것이다. 문인화가 전통의 화도(畫圖)와 화법(畫法)를 따르면서도 작가 개인의 개성과 철학이 드러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박앵전은 문인화의 현대적 변용과 전유를 통해서 이러한 문인화가 지닌 전통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치는 실험의 장으로 삼는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박앵전의 작품에 나타난 ‘문인화 전통 형식에 대한 변용과 서구 형식의 융합’에 관한 것이다.

재료와 조형 방식의 혼성은 오늘날 현대 한국화가 ‘전통 형식에 대한 변용’의 차원에서 맞닥뜨린 문제의식이자 과업이다. 이 지점은 전통적 한국화의 필수 재료인 지필묵 중 최소한 어느 하나를 서구의 재료로 치환하는 방식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회화 방식을 만나게 하는 것과 연동된다. 일반적으로 배접한 한지를 화판 위에 표구하는 방식이 아닌 서구 회화의 바탕인 캔버스를 도입하여 종이 대신 천의 물성을 실험하는 일은 아주 흔한 방식이다. 

박앵전은 패널 위에 여러 겹으로 배접하여 올린 두툼한 장지 위에 먹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고 엷은 채색을 입히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대부분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서양화의 형식의 작품을 선보인다. 장지의 배면으로 스며드는 농묵과 담묵 그리고 담채의 조화를 꾀하던 먹과 안료의 삼투(滲透)적 사용 대신 화면 위에 아크릴 물감의 요철(凹凸)이 뚜렷한 마티에르가 화면을 점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앵전이, 먹, 장지와 같은 동양의 전통 재료뿐만 아니라 캔버스, 아크릴, 겔 미디엄 등 화학 실험을 거친 서구 미디엄을 도입하는 방식뿐 아니라 획(劃) 대신 선과 면의 사용을 강조한다든가, 여백 대신 형상을 강조하는 방식은 가히 ‘한국화의 서구적 융합이 병형된 조형 실험’이라고 할 만하다. 





박앵전의 출품작들을 살펴보자. 

박앵전은 문인화의 전통을 따르는 사혁(謝赫)의 화육법(畵六法) 중 하나인 경영위치(經營位置)를 준수하면서도 그것을 비트는 방식을 실험한다. ‘그림의 구도’인 경영위치는 그녀의 작품에서, 긴 화폭과 ‘절지(折枝) 구도’로 나타난다. 세로로 긴 비율의 화폭이나 화폭 속에 매화의 나무둥치나 나뭇가지가 잘리는 형태로 등장하는 ‘절지 구도’는 조선 중기 사대부들이 즐겨 사용한 문인화의 조형 방식이다. 박앵전은 기다란 장지를 사용할 때뿐만 아니라 캔버스를 사용할 때도 캔버스를 이어 붙여 좌우로 혹은 위아래로 긴 셰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 형태로 만드는 방식뿐 아니라 화면 안에 매화의 밑둥치를 잘라내고 휘어진 굵은 줄기 일부만 채우는 방식을 사용한다. 더 나아가 화면 안에 마치 매화나무 밑에서 위를 올려보는 시점을 만들기도 한다. 그림의 위와 아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기가 절단된 화면 속에 가득 피어있는 매화 꽃송이들은 마치 눈꽃처럼 산포(散布)해 있거나 군데군데 뭉쳐 있기도 하다. 한국화의 전통적인 구도를 준수하면서도 그것을 비틀어 박앵전 식의 경영위치를 실행한 셈이다. 

한편, 박앵전은 이번 전시에서 획(劃)으로부터 선과 면의 조형 언어로 이동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서예나 동양화 전통의 ‘획’은 물리적으로 볼 때, ‘점-선-면’ 사이의 이동을 수시로 감행하는 변형성과 운동성의 존재이다. 언제나 ‘~로부터 ~로 이동하는’ 획은 때로는 ‘점→선의 획’이자, 때로는 ‘선→점의 획’을 성취한다. 그뿐만 아니라 전통 한국화에서 획(劃, 긋다)은 서(書, 쓰다)와 화(畵, 그리다) 사이를 오가는 것이자, 양자를 통섭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 한국화를 우리가 서화(書畵)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한다면, 텍스트(詩, 書)와 이미지(畵)가 한데 어우러진 회화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텍스트 자체에 이미지를 품고 있는 획의 위상을 가늠할 만하다. 유념할 것은 이러한 획의 위상을 선과 면의 조형 언어로 분절한 박앵전의 최근작이, 획을 소멸한 것이기보다. 선과 면의 조형 언어 안에 획의 정신성을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다. 갈필(渴筆) 효과를 내면서 용묵과 용색을 달리하던 이전의 획은 매화나무 줄기를 구륵법(鉤勒法)처럼 표현한 직선의 선묘 사이에 자리한 거친 표현주의 붓질의 색면으로 변주한다. 때로는 직선이 획처럼 사용되기도 하지만, 면 위에 자리한 두꺼운 물감이 획처럼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전의 작품에서 발현되었던 획에서 나타난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정신과 내용이 그녀의 이른바 현대적 매화도 전반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박앵전의 현대적 매화도에는 이전의 서화에서 회화로 변주하는 세계를 선보인다. 그녀가 화폭 우측이나 좌측의 상단에 행서 혹은 초서체로 흘려 쓴 한글로 된 시심(詩心) 가득한 화제(畵題)는 이번 출품작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문인화의 입장에서, 화면 속 글을 제거하는 형식은 전통의 형식과 내용을 탈주하는 이단적 조형 언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녀의 현대적 매화도에는 사의(寫意)를 드러내는 서(書)의 형식이 자취를 감추는 대신 비언어인 화(畵)의 세계가 전면에 포진하면서 비언어의 모습으로 언어의 양상을 감싸 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따라서 사의는 이미지 안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듯 살아난다. 응물상형(應物象形)과 수류부채(隨類賦彩)를 구체화한 형상이 소멸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표현주의적이고도 추상화된 이미지는 이러한 사의를 품어 안기에 족해 보인다. 물감의 질료로 거칠게 표현한 매화나무도 그러하지만, 그 매화나무를 뒤덮고 있는 백매나 홍매 또는 청매의 화려한 자태를 마치 멀리서 본 군집화처럼 꽃잎이 구별 없는 꽃 덩어리로 표현한 이미지는 형(形)을 잃은 대신 사의를 품어 안는다. 

이처럼, 박앵전의 이번 개인전은 이전 연작들과 비교되는 차원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문인화, 한국화의 전통은 무엇이고 그것의 현대적 계승과 변용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은 오늘날 많은 현대 문인화가, 현대 한국화가가 지속해서 해결해야 할 과업이자 숙원이다. 오늘날 종이가 아닌 캔버스, 둥근 모필이 아닌 나이프나 각진 평필, 그리고 먹이 아닌 아크릴이나 유화로 작업을 한다고 해서 한국화가 아니고 서양화라고 재단하기에는 동시대 미술의 담론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하다. 양자의 구분을 단순히 예술 재료나 예술가 주체의 문제로 정의할 수 없는 담론이 무성할 뿐만 아니라, 어찌 보면 양자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시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박앵전은 이러한 딜레마를 껴안고 여전히 문인화, 한국화의 정신을 현대 회화의 형식 속에 녹이는 조형 실험에 매진한다. ‘문인화 전통 정신의 전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문인화 전통 형식에 대한 변용과 서구적 형식의 융합’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온고지신의 정신과 법고창신의 조형 실험’을 통한 ‘현대 문인화’ 구현에 힘쓰는 박앵전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미술의 보편적 가치는 식자(識者)들이 말하는 것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논하는 것이기보다 감성 가득한 모든 인간 주체가 뜨거운 가슴으로 느끼고 말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20241031) 


출전/ 

김성호, 「현대 매화도 - 온고지신의 정신과 법고창신의 조형 실험」, 『박앵전』, 전시 카탈로그, 

(박앵전 개인전, 2024. 11. 15~11. 27, 혜화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