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은신처 II : 자연이라는 공적 공간에 짓는 셸터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셸터: 자연에 구축하는 사적 공간 

202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숲속의 은신처 II’를 주제로 내세운다. 이 주제는 2018년 8회 비엔날레의 총감독 이스트반 에러스(Istvan Eross) 총감독이 제시했던 동명의 주제를 계승하면서 로마 숫자 II를 추가했다. 당시의 구체적인 주제명은 “숲속의 은신처: 자연-사적 공간-셸터”였다. 자연 속에 구축하는 은신처로서의 셸터가 자연이라는 모두의 공적 공간 속에 구축하는 사적 공간임을 분명히 정의한 셈이다. 누구를 위한 사적 공간인가? 인간? 곤충? 아니면 들짐승?

올해 비엔날레는 이러한 정의를 확장한다. 이번 비엔날레는 기후 온난화와 대재난 등 환경 위기의 시대에, 거대한 ‘공적인 공간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셸터’를 요청한다. 올해 비엔날레는 이 주제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먼저 연미산 숲을 ‘공적 공간’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커다란 셸터로 설정한다. 인간과 동식물이 자연이라는 커다란 품 안에서 공존했던 원시향(源始鄕)을 큰 그릇으로 소환한 셈이다. 

이러한 설정 아래 참여 작가들은 ‘숲속’에 ‘셸터’라는 사적 공간을 ‘또 다른 유형의 자연미술’로 구축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생태적 환경이 무엇인지를 되묻고 진지하게 성찰한다. 참여 예술가들은 숲속에서 저마다 ‘자연이라는 생태계 위 예술로 다시 짓는 셸터’를 통해 ‘자연 속 인간’과, ‘자연-예술-인간의 관계 회복’에 대해 성찰한다. 어떻게? 


체렌도르지 초그트바야르, 투브신자르갈 사수렌 (몽골)_둥지 셸터 Woven Nest



엠마누엘라 카마치 (이탈리아)_벌집 Honeycomb


II. 셸터가 함유한 본원적 의미에 관한 질문  

셸터란 무엇인가? 은신처, 피난처를 의미하는 셸터는 다분히 인간을 위한 존재였다.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원시 인류가 무리 지어 세상을 떠돌아다니던 구석기 유목주의 시대에도 추위와 폭염을 피하고 야수의 위협으로부터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셸터는 필수적이었다. 당시 그것은 대개 동굴과 같은 ‘발견된 셸터’였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떠돌던 원시 유목민에게 있어, 셸터는 굳이 힘들게 만들 필요 없이 자연에서 발견하는 임시 거처이면 족했기 때문이었다. 

유목 시대를 정리하고 이 땅에 정주를 시작하게 된 신석기의 셸터는 어떠했을까? 수렵과 채집 대신 목축과 농경을 통해 먹을 것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에 이른 혁명으로 인해, 신석기의 셸터는 피난처, 은신처와 같은 임시 거처의 위상을 떨쳐내고 ‘만든 셸터’인 집과 같은 반영구적 거주지의 위상을 정초하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 청동기, 철기의 문명 시대는 혈족을 뛰어넘는 마을과 공동체 사회를 구축하면서 이전에 없던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계급의 분화를 촉진하면서 셸터는 이제 집뿐만 아니라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국가의 개념으로 확장한다. 그것은 분명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확장, 이동한 셸터이지만, 이제 그것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살육과 전쟁을 불사하는 경쟁의 체제에 들어서는 ‘그들끼리의 공간’으로 변질된 셸터였다. 

202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셸터가 품은 원래의 의미를 찾는다. 그것은 대자연이라는 모두를 위한 공간을 셸터로 정초하는 일이다. 그 안에서 ‘인간을 위한 사적 공간’으로서의 셸터뿐만 아니라 곤충과 들짐승을 위한 작은 공간, 나아가 식물을 위한 작은 공간으로서의 셸터가 무엇인지를 성찰해 보자는 것이다. 

올해 비엔날레는 인간의 어머니였던 대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종속적 대상으로 변질하고 만 자연을 ‘모성의 대자연적 주체’로 다시 세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대에 멸종 위기 시대에 요청되는 ‘자연의(of nature), 자연에 의한(by nature)’ ‘자연 주체의 세계’를 다시 소환시키고자 한다. 어떻게? 

이번 비엔날레에서, 12개국 16팀 18인의 참여 작가는 대나무, 흙, 테라코타, 돌과 같은 자연 재료를 중심으로 인공적인 재료 일부를 혼성하면서 저마다 각기 달리 해석하는 셸터를 선보인다. 이들은 다양한 재료를, 매듭, 접착, 집적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 만나게 하고, 빛, 색, 소리, 냄새를 구현함으로써 연미산자연미술공원을 찾는 관객의 오감에 호소하는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지닌 ‘숲속의 은신처’를 선보이면서 ‘셸터가 품은 원래의 의미 찾기’에 골몰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이번 비엔날레를 자연이라는 커다란 공적 공간에 ‘예술로 다시 짓는 저마다의 사적 공간’ 또는 ‘자연과 공존하는 셸터’라고 소개할 만하다. 


피에르 기요토 (프랑스)_곰의 입속으로 Welcoming Bear Mouth



루멘 디미트로브 (불가리아)_쉼을 위한 셸터 Relaxation Shelter


III. 출품작 해설

셸터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전제할 때 그것은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에 대해 질문해야만 하겠다. 인간 아닌 비인간을 생각해 보자.  

엠마누엘라 카마치(이탈리아)는 작품 〈벌집〉을 통해서 곤충의 것이었던 셸터를 소개한다. 작가는 벌집이 지닌 육각형 기둥 모양의 구조를 비틀어서 합판과 나무를 층층이 엇갈리게 쌓아 만든 틈이 있는 나선형의 유연한 구조물로 변주한다. 나무 층 사이의 틈은 내부와 외부를 잇는 숨구멍을 만들고 셸터가 자연이라는 외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시각적 리듬과 공명 효과를 만든다.   

남매 작가 애니 시니만과 PC 얀서 반 렌즈버그(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품 〈날개 셸터〉는 어떠한가? 이 작품은 숲속에 설치한 커다란 매미 날개를 통해서 공기의 흐름 그리고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환영의 공간을 선보인다. 위험으로부터 탈주하는 피난처이기보다 편안한 안식을 위한 안식처로서의 셸터인 셈이다. 

박인진(한국)의 출품작 〈동물 시리즈 – 소〉나 친조릭 렌친-오치르(몽골)의 출품작 〈화합의 관점〉은 조각 자체가 셸터이기보다 그들이 거하는 숲속 자체가 커다란 셸터임을 천명한다. 전자는 알록달록한 피부를 지닌 소 세 마리가 숲속 비탈길에 서 있는 장면을 구현하고 후자는 말 세 마리가 서로를 감싸는 듯한 형상을 구현한다. 동물 형상의 조각이 셸터이기보다 그들이 은신하고 안식하기 위한 숲속 자체를 커다란 셸터로 구현한 셈이다. 

한편, 피터 팔(루마니아)의 출품작 〈곰 발 셸터〉는 연미산의 공간 자체가 곰의 셀터였던 전설을 재해석한다. 피에르 기요토(프랑스)의 출품작 〈곰의 입속으로〉는 우리의 편견을 깨뜨리는 위트 가득한 역설적인 셸터를 제안한다. 위협적인 맹수인 곰한테 잡아먹히라는 것인가?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이러한 위협적이기까지 한 피에르 기요토의 역설적인 제안이 셸터가 품은 존재론적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야훼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주하던 구약성서의 등장인물인 요나를 삼켜버린 위협적인 ‘고래’의 뱃속은 얼마 안 있어 오히려 안온함과 평화로움으로 둘러싸인 셸터의 공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고래뱃속이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셸터가 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이러한 고래뱃속의 공간을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로 해설한 바 있다. 그것은 고래뱃속처럼 ‘감쌈의 공간’이 전하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설명하는 은유의 공간이다. 바슐라르는 고래뱃속뿐만 아니라 ‘조개, 구석, 서랍, 장롱, 집’과 같은 사물 공간을 ‘감쌈의 공간’의 사례로 소개하기도 한다. 

여기 둥지라는 셸터가 있다. 조르디 NN(스페인)은 〈부유하는 성소〉와 체렌도르지 초그트바야르와 투브신자르갈 사수렌(몽골)이 그룹프로젝트로 함께 만드는 〈둥지 셸터〉가 그것이다. 전자는 대나무로 유기적 형태의 새 둥지를, 후자는 철근과 밧줄로 열매 같은 커다란 새 둥지를 형상화했다. 인간이 아닌 비인간 생명체에게도 셸터는 필요하다. 새의 가족이 거주하는 안식처인 둥지는 혈연을 물려주고 물려받는 생명체의 삶에 있어 필수적 조건인 셈이다. 

바슐라르가 언급했던 고래뱃속이나 조개와 같은 둥그런 감쌈의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소엔 박(캐나다)은 임시 거주지의 의미를 담아 대나무로 만든 둥근 형태의 셸터인 〈기본의 집〉을, 고승현(한국)은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돌을 둥글게 쌓아 만든 〈잠시 쉬어가는 셸터〉를 선보인다. 

또한 바슐라르가 예로 든 구석, 서랍, 장롱, 집과 같은 직선으로 구축되는 감쌈의 공간은 능 키티삭(태국)이 수직과 수평을 교차해서 만든 〈생명의 상자〉에서도, 고란 슈티마츠(크로아티아)의 기하학적 구조의 〈오두막〉에서도 발견된다. 그뿐인가? 그것은 루멘 디미트로브(불가리아)가 입방체에서 덩어리를 분리한 〈쉼을 위한 셸터〉에서도, 정장직(한국)이 64괘로 음양의 질서를 입방체 안에 구성한 〈행복을 주는 64! (계승)〉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이번 비엔날레의 셸터는 바실리스 바실리(그리스/캐나다)가 가상의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가져온 허상의 셸터인 <아르테미다>나 이재황(한국)이 우주 생성소멸의 세계를 상상의 꽃으로 형상화한 <주상절리에 핀 우담바라>처럼 허구와 상상의 셸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탐구된다.   


소엔 박 (캐나다)_기본의 집 Home of Basics


IV. 에필로그  

오늘날 현대인에게 ‘집’으로 대별되는 건축적 셸터는 더 이상 은신처로서의 셸터 본유의 역할을 견지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임시 거주처’로 시작되어 ‘사적 공간’ 그리고 ‘반영구적 거주지’로 귀결된 오늘날 ‘집 혹은 아파트먼트’와 같은 셸터는 이제 자연에서 떠나온 문명의 장소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명계의 셸터는 이제 은신처, 안식처의 의미가 오염되어 신분과 계급의 분화를 더욱 공고히 하거나 환금성의 시장 가치가 되었을 따름이다.

이제 인간에게 필요한 사적 공간으로서의 셸터는 자연이라는 공적 공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성취한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셸터는 그 유형이 다르지만, 자연의 세계에서 필요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특히 인간에게 셸터란 ‘발견된 것’에서 ‘만든 것’으로 이동했다는 점에서, 셸터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자연의 일부인 셈이다. 아니,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인간을 위한 셸터는 자연 그 자체인 셈이기도 하다.  

202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연미산이라는 숲속을 자연이라는 공적 공간으로 환원하고 그 속에서 셸터라는 사적 공간의 의미를 모색한다. 인간 중심적 태도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탈인간중심의를 사유하거나 객체지향적 세계관을 그려보면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지속적으로 도모하면서 말이다. ]

(20241212) 


출전/ 

김성호, 「숲속의 은신처 II : 자연이라는 공적 공간에 짓는 셸터」, 『2024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전시 카탈로그, 

(2024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2024. 8. 24~11. 30, 연미산자연미술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