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헌기는 미술도시 광주 양림동의 로컬 큐레이터다. 공공인프라와 근현대미술의 역사가 살아있는 광주에서, 그는 도시재생 기반의 지역성 프로젝트로 일관해왔다. 그가 일군 예술 터전은 광주 사직동과 양림동이다. 2009년부터 ‘아트주(ARTZOO)’, 예술동물원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했다. 사직동물원을 비롯한 복합 유원지로서 호남의 대표 관광지였던 광주 원도심은 시설 이전에 따라 공동화가 진행되었다. 정헌기는 이 점에 주목하고 동물원이 사라진 자리에 예술동물원을 만들기로 했다.
시민은 문화수용자를 넘어 문화생산자라는 문화민주주의 관점에 공감한 그는 미술문화를 통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꿈꾸기 시작했다. 전시를 위한 전시로 멈추지 않고, 양림동의 유휴 공간을 정주 또는 일시 거주 창작공간으로 바꾸면서 지역 활성화, 도시재생으로 이어나갔다. 행정과 민간의 기금 마련을 모색하던 그는 마침내 광주 사직공원에서《ARTZOO》(2011) 전시를 열었다. 감상 일변도의 전시에서 상상과 참여로 확장한 프로젝트로 관객 12만 명 동원의 성과를 냈다.
사직동의 성취는 양림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금의 호랑가시나무창작소가 자리한 양림동의 선교사 건물을 임대하여 레지던시를 시작했고, 2016년부터 전시장 호랑가시나무아트폴리곤을 시작했다. 그 이후 양림동에는 작가 작업실과 레지던시, 전시장과 여러 예술공간이 자리 잡으며 예술인 마을로 진화했다. 정헌기가 10여 년간 청춘을 바친 양림동의 변화는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다. 예술인과 시민이 어우러진 마을의 자생성은 2023 《양림골목비엔날레》와 국제미술행사 《광주비엔날레》의 협업을 이끌어냈다.
정헌기는 큐레이터로서만이 아니라 디렉터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며 예술공간을 예술마을로 확장했다. 큐레이터와 디렉터, 이 두 가지 직능을 유기적으로 연동하는 지혜를 바탕으로 비전을 수립하고 실행 단위로 연결한 것이다. 큐레이터가 전시의 장에서 ‘의미와 감각의 밀도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개별 프로젝트의 주체’라면, 디렉터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가치와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을 구조화하는 데에까지 밀고 나가는 주체이다. 실무자와 경영자 두 직능을 한 몸에 지닌 그의 포지셔닝은 정헌기다움의 근본적인 힘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깨닫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그는 정부 주도의 공공성이 충돌/부재한 지점에서 제도와 비제도 사이를 오가며, 제도 바깥에서 대안을 만들어나간다. 안정감 대신 현실의 긴장감을 선택한 그는 ‘튼튼한 지푸라기가 되자’는 생각으로, 연대하고 협업하며 점점 더 단단해졌다. 대안공간 활동을 통하여 그가 지향하는 바는 완결된 결과를 보여주기보다 형성 중인 과정을 만드는 데 있다. 정헌기의 차별성은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거대 담론의 선도자가 아니라, 가능성을 발굴하고 연결하는 매개자 정체성에서 나온다.
그는 광주의 예술이 다른 지역과 만나 연대하고 교류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프로그램 교류를 중심으로 하되 중장기적으로는 인적 교류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원효와 칸트를 다시 들여다보며 50대 후반을 맞이한 지금, 그는 화쟁사상과 개념과 실체의 관계를 성찰하고 있다. 진리에 도달하는 다양한 경로를 찾아 만나고 대화하고 움직이는 과정에서 그가 추구하는 지역성은 양림동을 넘어 전국과 세계로 확장한다. 광주가 명실상부 미술도시로 넓어지는 길에 정헌기의 삶의 가치와 일의 방향이 놓여 있다. 지역주의를 넘어 넓게 잇는 상호지역주의(inter-localism)를 실천하는 것. 광주 양림동의 인터로컬 큐레이터 정헌기 정신의 핵심이다.
- 정헌기(1970- ) 광주대 미술학사·광주교육대 대학원 문화예술교육기획 석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분 개관 전야제 감독(2015), 담양 다미담 예술구 단장(2016-19), 인도 뉴델리 한국문화원 기획전 《차이의 합성》 감독(2022), 양림골목비엔날레 전시감독(2024), 전일빌딩245 감독(2022-23, 202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최우수 단체상(2015),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아트폴리곤 대표(2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