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상의 드로잉 〈매화〉·〈산월〉

이규상, 〈매화〉, 1952, 종이에 먹, 26.2×19.1cm
이규상(李揆祥, 1918-67)은 한국 근대미술사라는 무대의 거대한 커튼 뒤로 그 실체가 대부분 가려진 채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 화가이다. 1937년 낙랑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같은 해 《극현사(極現社)전》, 도일(渡日) 후 39년 《자유미술가협회전》, 40년 《재동경미술협회전》등에 출품했다. 41년 니혼(日本)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해방 이후 최초로 조형 이념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사실파(新寫實派)’에서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과 함께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고, 아카데미즘에 함몰된 국전에 반발, 재야적 의식으로 현대적 양식과 미학을 추구했던 ‘모던아트협회’의 결성에 참여해 근대기 추상미술사에 지워지지 않을 중요한 자취를 남겼음에도, 그의 이름과 작업은 미술사의 저작 속에 단 몇 줄의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1950년대 후반기부터 60년대 전반기까지 제작된 단 10여 점의 작품만이 현재까지 유전되고 있기에, 그의 예술세계 전모나 실체를 통시적으로 파악하기란 매우 힘든 실정이다.

이규상, 〈산월〉, 1952, 종이에 먹, 26.2×19.1cm
그는 이미 당시에 추상미술이 가져야 하는 본질적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관점과 신념을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이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예술 정신의 핵심에 관해서도 상당한 수준의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드러운 서정적 구상작업에 머무르고 있던 김환기나 구성 속에 아직 형상의 그림자가 남아있던 유영국과 달리, 마티에르를 올려서 낸 물질감을 통해 화면의 내용이 아닌 질박한 촉각 그 자체를 표현하려 했던 점이나 형상을 소거하고 요약하면서 기하학적으로 종합해 내려는 견고한 조형의지는 당시 작가들로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았을 탁월한 현대적 감각이다. 그의 작업에서는 소재에 대한 탐구 이상으로 재료와 물성에 대한 천착이 돋보이며, 그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모더니스트였다.

이규상, 〈Composition〉, 1963, 캔버스에 유채, 64×51cm
경복고등학교 졸업생 김중수(金重壽)가 자신의 졸업을 기념해 만든 『방명록』(1952.3)에는 당시 교장·교감·교무주임을 포함한 여러 교사·학생이 남긴 당부나 격려를 담은 방명과 동문인 마라토너 최윤칠 등의 방명이 남아있는데, 미술교사 이규상의 삽화 2점도 여기에 실려 있다.

이규상, 〈생태〉, [1963년 《제2회 개인전(수도화랑)》 출품작, 『경향신문』(1963.11.28) 게재]
1952년은 서울 소재 학교들이 6·25로 인해 부산에서 피난학교 체제로 운영되던 시절이라, 경기고·경기여고·배화여고·경남여고·동덕여고·이화여대·숙명여대 등의 학생·교사 방명도 남아있고, 그 시절 경복고 관련 사진들도 여러 점 첨부되어 있다. 그 외 미술 관련으로는 「귀거래사」의 한 구절로 ‘오늘은 옳고 어제는 그르다’라는 뜻인 ‘今是昨非·祝 金重壽 君·權玉淵’이라 적은 미술교사 권옥연의 방명이 눈길을 끈다. 『방명록』의 첫 페이지에는 교훈과 교가가 적혀있고, 다음 페이지에는 교복을 입은 김중수의 사진이, 다음 두 페이지에는 이규상의 삽화가 차례로 실려 있다. 〈매화〉는 검은 바탕에 매화 가지와 꽃이 그려진 단아한 필세가 인상적인 드로잉으로, 우하단에는 ‘李揆祥 先生任’이라 적은 김중수의 자필이 남아있다. 〈산월〉은 세 개의 산봉우리 위에 달이 떠 있고 오른쪽 아래에 ‘揆’자 서명을 한 소략한 드로잉으로, 아래에는 ‘祝 金重壽君 卒業·美德·李揆祥’이라 적고 인장을 찍었다. 역시 우하단에 ‘美術先生任’이라 적은 김중수의 자필이 남아있다. 이들은 신사실파 시기(1947-53) 그의 작품을 실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존하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1960년과 61년 『동아일보』에 실린 5점의 삽화 도판이 추상 도상임에 비해, (전적으로 추상 작업에만 매진한 그의 작품 가운데) 산과 달, 매화와 같은 전통취의 소재를 다룬 삽화가 있다는 사실은 꽤나 의외로운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