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빛’의 함의 - 천연덕스럽게 되돌아오는 너를 위해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이 글은 국소민의 작업 세계를 ‘별(과)빛’이라는 전시명 아래 선보였던 최근 개인전을 중심으로 해설한다. 전시명에서 괄호로 묶은 ‘(과)’는 앞뒤를 연결하는 의미를 품은 접속 조사이자 앞뒤를 ‘한 몸’으로 만들고 사라지는 매개적 주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별과 빛’으로 발음되고 ‘별 그리고 빛’ 혹은 ‘별의 빛’이라는 의미로 읽히는 주제어는 접속 조사인 ‘과’를 물리치고 ‘별빛’으로 ‘한 몸을 이룬 또 다른 주체’라는 의미의 위상학적 좌표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변환이 어떻게 작품 속에 드러나는가? 그리고 그녀의 작품이 내세우는 ‘별(과)빛’의 미학적 함의는 과연 무엇인가? 작품을 세세히 분석하고 살펴보자. 



II. 사이의 것들 혹은 중간 지대 
작가 국소민은 별과 빛 사이에서 별이면서 빛이 아닌 것, 빛이면서 별이 아닌 것, 별도 아니고 빛도 아닌 것, 그리고 별이면서 빛이기도 한 것을 조형적으로 성찰한다. 즉 별과 빛 사이의 중간 지대(interspace) 또는 중간계(界)에서 무수히 많은 ‘사이의 것’을 성찰한다. 
먼저 그녀가 설정하는 ‘별’은 무엇을 가리키고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라지는 것들 또는 사라진 것들을 의미한다. 별에 관해서 과학이 밝히고 있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예를 들어 지구에서 100광년 떨어져 있는 ‘별의 빛’은 ‘지금, 여기’의 지구에서 여전히 관찰되지만, 실제로 그 ‘별의 빛’은 100년 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따라서 그 ‘별’은 현재 관찰되는 모습과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고 있거나 이미 폭발해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 지구에서 별의 존재론적 위상은 언제나 사라지는 것들 또는 사라진 것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별’로부터 떨어진 ‘빛’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우리가 보는 ‘별의 빛’은 그 별이 방출한 과거의 정보이기 때문에, ‘빛’은 한마디로 말해 지금, 여기에서 맞이하는 그때, 그곳의 환영이자 현재에 되살아난 과거의 유산이다. 따라서 지구에서 ‘빛’은 죽음에서 생명을 지속하는 욕망이다. 별의 한 종류인 태양은 어떠한가? 태양은 지구에서 약 8.3광분(광년의 1/60) 떨어져 있는 까닭에 지금, 여기에서 관찰되는 태양은 8분 20초 전의 모습이다. 이러한 까닭에 별의 빛이나 태양의 빛은 짧거나 긴 과거를 지금, 여기에서 되살린 과거의 환영이자,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유적으로 말해, 빛은 노인의 젊은 시절 초상이자, 죽음에서 생명을 지속하는 욕망인 셈이다. 즉 빛은 ‘늙음’을 죽이지 않고 ‘늙음’ 이전의 존재로 되살리는 욕망이다. 
국소민이 내세운 전시 주제인, ‘별(과)빛’에서 ‘(과)’의 세계는 무엇인가? 접속 조사인 ‘과’는 ‘그리고’의 세계를 괄호 속에서 무한히 연장하거나 ‘별/빛’이라는 빗금으로 만나는 접촉면(interface)을 만들거나 ‘별빛’으로 한 몸의 주체를 생성하고 사라진다. 따라서 별빛은 별과 빛 사이에 자리한 ‘중간 지대’를 만들고 그곳에 각기 다른 속성의 무수히 많은 ‘사이의 것들’을 견인한다. 과거와 현재, 실재와 환영, 소멸과 생성, 죽음과 삶,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이의 것들은 정지태와 운동체, 폐기와 재활용, 중심과 주변, 좌절과 희망, 포기와 욕망, 심지어 마름과 축축함 같은 대립항으로 소환되기도 한다.  



III. 타자화된 나 -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런데 이 글이 ‘별(과)빛’의 함의를 질문하는 국소민의 작업을 두루 살펴보면서 ‘타자화된 나 - 비로소 보이는 것들’로 해설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국소민은 ‘별(과)빛’의 존재론적 함의를 현실 속 일상에 투사함으로써 이러한 ‘사이의 것들’의 존재를 탐구한다. 다음의 작가 노트를 보자: 나라는 덩어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을 돌아보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은 사이의 것들이었다. 
작가 노트의 진술처럼, 국소민은 별과 빛의 중간 지대에 자리한 ‘사이의 것들’을 현실의 자리에서 발견하고 성찰한다.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사이의 것들은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서 찾은 것이기도 하다. 국소민이 가시성의 세계에서 비가시성의 세계를 추적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대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즉 ‘나’에서 시작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이데거(M. Heidegger)가 언급한 ‘세계-내-존재(In der Welt-sein)'로서의 ‘나’이되, 헤겔(G. W. F. Hegel)의 언급처럼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주관적이고 고립적인 즉자존재(卽自存在)에서 벗어나 자기를 대상화한 의식적 존재자로서의 대자존재(對自存在)로서의 ‘나’이자, 사르트르(J. P. Sartre)가 언급하는 ‘타자에 대하여’ 혹은 ‘타자에 있어서’ 존재하는 대타존재(對他存在)로 확장하는 ‘나’이기도 하다. 
국소민은 나를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면서 동시에 나 아닌 무수한 ‘사이의 것들’에 관해 성찰한다. 마치 조각대의 미니어처 형상처럼 보이는 동형의 조각 모듈을 쌓거나 수평적으로 병치한 국소민의 작품 〈I is another〉는 대표적이다. 그녀가 작품명에서 아이엠(I am) 대신 아이이즈(I is)라는 비문(非文)을 사용한 까닭은 ‘나’를 ‘그것(들), 그(녀)들’처럼 삼인칭으로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려는 의도에서 기인한다. 이처럼 나를 타자화하려는 시도는, 조각대 형상을 변형한 직육면체 조각, 즉 중간 몸체에 마디가 있는 대문자 아이(I) 또는 머리 형상을 이고 있는 소문자 아이(i)를 형상화한 181개의 작은 테라코타 조각들을 전시장에 쌓아놓거나 늘어놓는 방식으로 가시화된다. 이러한 테라코타 조각들은 자기를 대상화한 대자존재로서의 ‘나’이자. 타자를 전제하는 대타존재로 확장하는 ‘나’이기도 하다. 
여기서 하나둘씩 나에게 이입된 채 대타존재로 확장하는 것들은 나의 알터에고(Alter Ego)로 작동한다. ‘또 다른 자아, 혹은 제2의 자아’로 풀이되는 알터에고는 숨겨진 곳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로소 보이게 되는 ‘또 다른 나’인 셈이다. 국소민은 작품 〈I is another〉을 통해서 관객에게 시점(視點)에 따라 달리 보이는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작품의 가장 밑부분에서 감상하는 시점에 따라 형성되는 실루엣의 수평 라인을 트레이싱 페이퍼와 모눈종이에 드로잉을 한 후 맞은편 벽에 낮게 설치한 까닭은 ‘타자화된 나’로 표상화된 작은 조각들에서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작품은 조각대가 곧 작품이 되는 미술사에서의 ‘좌대’의 담론을 응용해서, 보이지 않는(않았던) 것에서 비로소 보이는 ‘또 다른 나’를 탐구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IV. 되기의 메타포 – 모든 타자를 위하여 
시점의 변화에 따라 ‘타자화된 나’ 혹은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국소민의 작품은 이제 보는 지점에서 보는 태도로 이동한다. 그것은 그동안 그녀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못했던) 대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 대상은 대개 버려지거나 사라지는 것들 또는 말라가면서 죽어가는 것들로 대별된다. 
작품 〈summer sorrow〉을 보자. 철사로 된 가느다란 식물 형상 위에 석고붕대를 드문드문 감아 만든 이 작품은 마치 뜨거운 태양 빛에 하얗게 말라버린 잡초처럼 보인다. ‘여름의 슬픔’으로 해석되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전시장 구석에 설치된 까닭에 더욱더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생기와 덩어리를 잃고 껍질만 남긴 채 메말라가는(버린) 식물! 그것은 엄연히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마치 시인 고은의 작품에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한 구절처럼 말이다. 관심을 기울일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은 세상 도처에 있다.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것들, 앙상하게 메마르거나 타버린 것들, 아련히 사라지는 모든 것들! 
작품 〈summer sorrow〉가 식물성의 이미지로 버려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표상했다면, 또 다른 작품 <맹아적>은 동물성의 이미지로 그것을 표상한다. 반쯤 허물어진 알의 형상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은 마대 천을 석고로 게워 붙여 만든 까닭에 알의 껍데기만 앙상하게 남은 처연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선보인다. 
작품 〈summer sorrow〉나 <맹아적>은 모두 생동감을 잃어버린 듯한 앙상하고 메마른 듯한 이미지를 선보이지만, 주검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눈을 뒤집어쓰고도 생명의 뿌리를 여전히 내린 식물처럼 보이거나 작은 새를 포근하게 품어 안은 나뭇가지로 엮은 둥지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까닭이다. 두 작품 모두 죽음과 삶의 중간 지대에서 생명(혹은 죽음을 향한 여정)을 지속하는 ‘사이의 것들’인 셈이다.  
‘사이의 것들’은 또 있다. 검은 비닐봉지로 만든 작품 〈Between truth and lies〉는 멀리서 보면 말라비틀어진 해조류 식물로 보이거나 동물의 껍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가까이서 주의를 기울여 볼 때, 마치 나무 잎맥이나 인간의 혈관이 꿈틀거리며 지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역전의 이미지는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주목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작품명에서처럼 이 작품은 진실과 거짓,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중간 지대에서 ‘사이의 것들’을 탐구한다. 
우리는 소멸과 생성, 죽음과 삶, 비가시성과 가시성처럼 서로 다른 양극단을 어떻게 이해하고 서로 만나게 할 수 있을까?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철학에서 ‘되기(devenir)’의 메타포는 이러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되기란 ‘한 주체가 스스로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과정’이자. ‘되려는 지향점에 주체를 투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다(être)’의 정태적 존재론을 탈주하고 ‘~되기’의 운동적 존재론을 지속한다. 즉 식물 되기, 동물 되기처럼 ‘타자 되기(devenir-autre)’를 실천함으로써 다른 것과의 만남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국소민의 작업에서 이러한 타자 되기를 견인하는 힘은 바로 사랑이다. 바닷모래로 캐스팅한 나무 형상을 인조 잔디가 덮인 반구체 위에 설치해서 마치 행성처럼 회전 운동을 하게 만든 작품 〈이 시대의 사랑〉이나, 시멘트로 만든 별 또는 운석 형상의 조각을 돌림판 위에 설치해서 회전 운동을 하게 만든 작품인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는 한 시인이 노래한 사랑을 작품 속에 담았다. 사랑으로 타자 되기를 실천함으로써 현실 속 보이는 것들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작품 속으로 건져 올린 셈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국소민의 작업은 사랑의 타자 되기라는 메타포를 실천하는 것이자, 그녀의 작품은 타자 되기를 실현한 예술적 결과물이라고 하겠다. 타자화된 식물이나 동물 또는 일상에서 ‘타자화된 나’ 혹은 ‘또 다른 나’를 찾는 일이자,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서로의 몸을 섞는 ‘사이의 것들’을 창출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가히 모든 타자를 위한 작업이라고 할 만하다. 



V. 천연덕스럽게 되돌아오는 너 
국소민이 최근 개인전에서 주제로 내세운 ‘별(과)빛’의 미학적 함의로 되돌아오자. 접속 조사인 ‘과’를 물리치고 ‘별/빛’처럼 빗금으로 만나거나, ‘별빛’으로 ‘한 몸을 이룬 또 다른 주체’ 와 더불어 ‘사랑으로 실천하는 타자 되기의 메타포’는 죽음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 삶과 보이는 것의 세계를 견인한다. 
국소민의 거대한 설치 작품 〈별이 수 놓인 여름밤의 하늘은 숭고하다〉는 관객이 기하학적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 작품 내부의 어둠 속에서 운석 형상의 별과 함께 그 위에 설치된 투명한 아크릴판 위에 철필로 새겨진 텍스트인 “별이 수 놓인 여름밤의 하늘은 숭고하다”라는 메시지를 마주하게 만든 작품이다. 사라지는 것들로 표상된 ‘별’의 위상학을 지금, 여기에 되살린 과거의 환영으로서의 ‘빛’을 교차한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별과 빛이 합체된 ‘별빛’이라는 생명을 지속하는 희망을 만난다. 
국소민의 작가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희망이 남겨져 있다.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너는 숨구멍을 찾아 살아가고 있었다. 어기적거리며 너를 향해 달려간다. 가장 밑바닥에 뿌리내린 너를 발견한다. 그곳은 너무나도 어두웠고 추웠다. 여름날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중략) 우주에서, 별에서, 우리에게 오는 게 무엇인지 나는 너에게 물었다. 너는 대답했다. / “딱 하나 별빛이야.” / 그렇게 유유히, 또는 천연덕스럽게, 나에게 되돌아온다.”

위의 작가 노트에서 유유히, 또는 천연덕스럽게 되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별빛’이기도 하지만, 메마른 것, 피폐한 것, 쓰러져 가는 것처럼 현실의 비루하거나 허약한 ‘너’이기도 하다. 이러한 잘 보이지 않는 미약하고도 미약한 미시적 세계를 애정으로 더듬는 시선으로부터 촉발된 국소민의 작업에서 ‘별(과)빛’의 미학은 경계를 나눈 ‘별과 빛’에서 경계를 납작하게 만든 ‘별/빛’으로 이동하고, 더 나아가 경계를 한 몸으로 뒤섞는 ‘별빛’으로 지속해서 이동하는 과정이자 운동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국소민의 작업은 과거와 현재, 실재와 환영, 소멸과 생성, 죽음과 삶,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별빛’처럼 한 몸으로 뒤섞어 서로 만나게 한다. 달리 말해, 하찮은 것들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국소민의 작업은 작가에게 유유히 혹은 천연덕스럽게 되돌아오는 미시적 세계에서 언제나 희망의 ‘별빛’을 발견하는 사랑의 존재론이라고 할 만하다. (20250329) 

출전 / 
김성호, 「‘별(과)빛’의 함의 - 천연덕스럽게 되돌아오는 너를 위해」, 『국소민』 개인전 카탈로그,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