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지 않는 새 – 현대인의 은유 초상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강이수의 최근 몇 년 동안의 작업은 새(鳥) 형상의 조각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은유와 풍자를 시도해 왔다. 특히 ‘날지 않는 새’의 의인화된 단독 초상을 통해서 사회적 인간의 내면을 풍자적으로 조형화해 왔다. 이 글은 ‘날지 않는 새 - 현대인의 은유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업에 담긴 이러한 의인화와 풍자적 은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설한다.
I. 의인화 혹은 풍자적 은유의 미학
우화가 담은 인간 풍자는 흔히 의인화된 동물들의 이야기에서 기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집과 일터를 중심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사는 인간처럼, 대개의 동물은 동굴이나 둥지와 같은 셀터(shelter)를 오가며, 혼자가 아닌 무리를 이룬 채,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것, 즉 인간 이외의 무생물, 동식물, 사물 등을 사람에 비기어 사람처럼 표현하는 수사법”을 의미하는 의인법, 의인화의 전략은 무생물을 생명이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활유법(活喩法)과 함께 인격이 없는 동식물이라는 대상을 인격체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의인법은 고대의 활물론(活物論) 및 범신적(凡神的) 자연관에서 비롯된 까닭에 대개 신화, 전설, 민담 등에 전승되어 오거나 계몽과 계도의 목적으로 우화, 동화 등에 인간 존재론에 대한 은유의 방식으로 등장해 왔다.
그중에서도 ‘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의인화 형식의 우화적 풍자는 동서고금에 두루 회자한다.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여우의 꾐에 넘어가 물고 있던 치즈를 떨어뜨린 까마귀의 어리석음을 그린 이솝우화, 깃털을 자랑하다가 사냥꾼에게 잡히고 만 공작의 허영성을 풍자한 인도 판차탄트라의 우화, 늑대가 온다는 거짓말을 지속하다 진짜 늑대가 왔을 때 위기에 봉착했던 까치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일본 우화 등은 대표적이다. 이렇듯 주로 우화 속 ‘새’는 인간의 어리석음, 탐욕, 허영심, 교만 등을 풍자하는 데 단골손님이었다. 오늘날 속칭, ‘닭대가리’, ‘새대가리’라는 식의 비속어 또한 어리석은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풍자적 은유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새는 그리 긍정적인 우화적 표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우화 소설인 『조나던 리빙스턴 갈매기 이야기(Jonathan Livingston Seagull: A Story)』(1970) 속 조나던 리빙스턴과 같은 자기 계발과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갈매기나, 2009년 출시된 게임 ‘앵그리 버드(Angry Bird)’ 속 불합리한 권력 구조를 깨부수는 캐릭터인 ‘독수리나 여러 종의 새들’처럼 매우 긍정적인 우화적 표상으로 등장하는 경우 또한 없지 않다.
조각가 강이수는 산으로 둘러싸인 작업실에서 매일 같이 만나는 다양한 새들을 접하면서, 이들을 소재로 삼아 의인화의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우화적으로 풍자한다. 푸르른 자연석을 몸체로 한 채 조용한 자태로 자리한 〈파랑새〉,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몸체로 삼아 정면을 응시한 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유하는 새〉, 동그마니 앉아 고개를 떨구고 슬픔에 잠겨 있는 듯한 〈기억 속의 새〉, 졸린 눈을 한 통통한 몸매의 부엉이를 형상화한 〈밤을 지키는 새〉, 화려한 색상의 깃털을 지닌 채 무엇인가 갈망하는 〈꿈꾸는 새〉, 마치 갑옷처럼 알루미늄판으로 된 번쩍거리는 몸을 잔뜩 부풀려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닭을 형상화한 〈녹색 부리 새〉 등 다양한 새를 형상화하는 조각이 그것이다.
강이수의 작업에서, 새의 몸통과 머리는 주로 대리석, 오석, 경주석, 화강석, 자연석 등의 다양한 종류의 돌로 만들어졌지만, 더러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새의 부리, 날개, 다리는 대개 철로 구성되고, 반쯤 감긴 눈은 세라믹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새 조각은, 간헐적으로 자연석 위에 화려한 색상의 아크릴화가 덧입히기도 한다.
자연(돌)과 인공(철, 세라믹)이 혼성된 채, 다양한 표현 기법으로 형상화된 그의 새들은 한편으로 우리의 동료처럼 친근하거나, 한편으로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설기도 하다. 강이수의 조각에서 새들은 대개 정겨운 이웃처럼 긍정적인 친밀함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더러는 악인을 풍자화한 것처럼, 비판적 풍자의 대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즉 긍정과 부정을 함께 안은 존재로 표상된다. 이처럼 그가 만든 의인화된 새들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우화적으로 풍자하는 은유의 미학을 흠뻑 담은 ‘현대인의 은유 초상’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다.
II. 날지 않는 새 - 피아적 주체 혹은 타자를 입은 자소상
강이수의 작업에서, 흥미로운 것은 한결같이 ‘날지 않는 새’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날갯짓이 힘에 겨운 탓일까? 작품 〈휴식1〉, 〈휴식2〉처럼 바위 위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새들이나, 작품 〈밤을 지키는 새〉, 〈파랑 부리 새〉, 〈넉넉한 새〉, 〈걷는 새〉처럼 배가 불룩 나올 정도로 살이 쪄서 날기에 힘에 부친 새는 이해할 만하지만, 대부분 날렵한 몸매를 지닌 새들조차 왜 날지 않고 있는 것일까?
강이수가 ‘원래 나는 존재’로 태어난 새를 ‘날지 않는 상태의 조각’으로 표현한 까닭은 ‘새’라고 하는 날짐승을 ‘현대인의 초상’으로 은유했기 때문이다. 그의 새 조각은 구조화된 사회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하고 있는 동시대의 현실 속 인간 초상을 투영한다. 무한 경쟁에 쫓겨 집과 일터를 쳇바퀴처럼 오가는 반복적이고 건조한 일상 안에서 현대인은 자기검열로 인해 자율성을 포기한 채 시스템 안에 스스로 길든다. ‘날 수 있으나 날지 않는 새’가 된 셈이다. 날개는 있으나 무거워진 몸, 사라진 방향 감각, 감정의 마비, 무력감과 자기 상실, 피로감과 우울함에 찌든 ‘날지 않는 새’, 아니 어쩌면 ‘날지 못하는 새’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강이수는 이처럼 ‘날지 않는 새’ 형상을 통해 ‘현대인의 초상’을 은유하기 위해서 무거운 돌과 철의 조합으로 새를 조형화한다. 묵직한 자연석을 새의 몸통으로 삼아 돌 표면을 쪼아 날개 형상을 만들거나 깃털의 마티에르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날개를 다양하게 조합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돌로 만든 새 몸통과 무쇠나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다리가 조합된 그의 새 조각은 자연과 인공,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질료의 합체인 셈이다.
‘날지 못하는 무거운 새’는 현대인의 짊어진 삶의 무게를 은유하고 풍자하기에 족하다. 즉 ‘날지 않는 새=현대인’이라는 은유가 이성이 아닌 감성 속에서 직관적으로 가능해진다. 여기에 화룡점정처럼 덧붙인 ‘세라믹으로 만든 반쯤 감긴 눈’이나 ‘철로 만든 브이(V)자 모양으로 벌어진 발’은 이러한 풍자적 은유와 해학의 메시지를 함유한 강이수만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로 자리 잡기에 족하다. 비상(飛上)보다 직립(直立)을 선택한 새 형상 조각을 특징짓는 작가 강이수만의 브랜드화된 상징적 도상 혹은 브랜드 아이콘(brand icon)이라고 할까?
필자는 강이수의 ‘날지 않는 새’를 피아(彼我)’적 주체로 호명한다. 여기서 ‘피아’는 “그와 나 또는 저편과 이편”을 아울러 지칭한다. 즉 ‘피아적 주체’는 ‘새(타자)를 바라보는 나’라는 주체의 관점에서 벗어나 ‘나를 바라보는 새’라고 하는 타자로서의 새로운 주체를 요청한다. 즉 그의 ‘날지 않는 새’는 자연의 표상인 날짐승이기도 하지만, 은유화된 타자의 초상이자 작가의 자화상이 된다. 타자와 주체가 서로 오버랩되는 이러한 피아적 주체는 더 이상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주체의 영역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존재다. 즉 타자가 어느덧 나라는 주체와 육박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또 다른 차원의 나’라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강이수의 작업에서 ‘피아적 주체’는 다양한 새의 모습뿐만 아니라 각종 동물 형상으로 대별되기도 한다. 이전의 작업에서 그는 곰, 물고기, 말과 같은 동물이나 춤추는 사람의 형상을 조각으로 번안하고 자신의 조형 세계로 재해석한 바 있다. 새를 비롯한 그의 각종 동물 캐릭터는 타자의 초상임과 동시에, 작가의 ‘또 다른 차원의 나’로서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즉 ‘타자를 입은 자소상’인 셈이다.
III. 에필로그
강이수의 ‘날지 않는 새’는 단지 ‘날지 못하는 새’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날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지만, 몸이 무겁거나 상황이 여의찮아 ‘날지 못하는 새’이기도 하지만, 하늘 높이 비행하는 능력을 잠시 미뤄두고 좀 더 나은 비행의 상황이 도래하기를 암중모색하는 이지(理智)적인 존재로서의 ‘날지 않는 새’이기도 하다. 그의 ‘날지 않는 새’는 비행과 같은 능력이나 잠재력을 펼치지 못하고 머무는 ‘현대인’의 비극적 초상으로부터, 더욱더 자유로운 비행을 위해 잠시 숨 고르기에 나서면서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는 긍정의 초상을 견인한다. 즉 그의 ‘날지 않는 새’는 자유로운 비행이라는 현실화(actualization)의 순간을 위해 능력을 비축한 잠재태(the virtual)로서의 존재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의 새 조각은 비판적 부정과 더불어 풍자적이거나 철학적 긍정이 교차하는 메시지를 함유한다. 즉 그의 새 조각은, 비행에 관한 과잉 욕망으로 인한, 현실 속 고립감, 불안, 자기 상실, 단절, 그리고 소통 불능의 정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자유 비행에 관한 기다림, 절제, 명상, 미래 전망과 같은 냉철한 이성을 내재한다.
한편, 그의 ‘날지 않는 새’는 부정과 긍정의 공통 함의뿐만 아니라 풍자와 은유의 전략을 통해 친근하고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조각이 상상을 잉태한 까닭이다. 그는 신화나 민속 설화에 나타난 의인화된 동물 내러티브, 문화사 속에서 발견되는 동물 문양과 디자인, 선사시대의 암각화, 고대 갑골문과 상형문자에서 드러난 기호적 기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상상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 수용한다. 생각해 보자. 상상은 새로운 형상 조각을 낳는다. 그의 새 조각은 풍자와 은유뿐만 아니라 역사로부터 끌어낸 기호적 상징을 과장, 왜곡, 변형을 거친 추상화 과정을 끌어내는 상상을 통해서 관객에게 친근한 형상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피곤함에 절어 웅크리고 앉아 졸고 있거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뒤뚱거리며 걷고 있는 새를 보라. 아니, 바람 부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 바람에 맞서며 먼 곳을 바라보는 새 한 마리를 보라! 때론 안쓰럽고, 때론 정겹고 때론 비장하기도 한 새들의 형상! 작가 강이수의 다양한 모습의 ‘날지 않는 새’는 상상 가득한 풍자적 은유를 통해 관객에게 선보이는 현대인의 은유 초상이자 그의 자화상이다. 즉 그의 가슴 따뜻한 ‘피아적 주체이자 타자를 입은 자소상’이라고 할 만하다.
출전/
김성호, 「날지 않는 새 – 현대인의 은유 초상」, 『강이수』, 개인전 카탈로그, 2025.
(강이수 개인전, 2022. 12. 28~1. 3. 인사아트플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