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실험하는 세미 노마디즘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작가 왕제소는 이번 전시에서 ‘관람, 이동(Watching, not in place)’이라는 주제를 내세웠다. 여기서 그가 ‘이동’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워칭(watching)과 쌍을 이루는 무빙(moving)으로 표기하지 않고, 상기한 바처럼 “제자리에 있지 않음”이라는 내용으로 풀어 쓴 까닭은 무엇인가? 왕제소가 자신의 이론적 틀로 제시하는 ‘세미 노마딕 모델(Semi-Nomadic Model)’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 의미는 무엇이고, 그것이 전시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자세히 살펴보자. 



I. 열린 조각과 관객과의 상호작용 
왕제소의 조각 및 설치는 정육면체나 직육면체의 단순한 미니멀리즘의 구조적 틀로부터 출발하되 그 구조를 병렬로 배치하기보다, 투과체로 열어두거나 그 크기를 축소, 확장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이미지를 변모하게 함으로써, 포스트미니멀리즘이 표방하는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인 상호작용의 미학에 접근한다. 
여러 개의 큐브로 구성된 작품 <Group of cubes>(2025)는 거울의 반사를 통해 큐브의 모습이 다중적으로 중첩되는 효과를 선보인다. 투명 아크릴로 덮인 하나의 큐브 안에서 여러 개의 큐브의 실재와 허구가 공존하고 교차하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거울의 반사 효과에 따른 것이지만,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변모되는 시점(視點)의 변이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관객의 시점에 따라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는 여러 지점을 만드는 큐브의 변화도 흥미롭지만, 반대로 그 큐브의 안팎에서 그리고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객의 위치가 이동하고 재구성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작품을 면밀하게 살피는 관객은 큐브가 선보이는 안과 밖에서 그리고 수평과 수직의 교차점의 언저리에서 ‘재구성되는 주체’ 혹은 ‘다시 태어나는 주체’라고 할 만하다.
또 다른 작품 <Unfolded Axis>(2024)는 위에서 언급한 작품 <Group of cubes>(2025)보다 큰 규모의 작품으로, 야외와 같은 확장된 공간에서 작품의 열린 구조를 효과적으로 조형화하는 방식과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을 도모하는 방식이 어떠한 것이어야 할지를 고민했던 결과물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개의 동심 구조의 큐브로 구성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변화의 운동성을 잠재적으로 잉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거울을 통해 실재와 허상이 맞물리게 함으로써, 작품 속 축(axis)을 고정된 자리에서 이동하는 자리로 끊임없이 해체하고 펼쳐 보인다. 
이처럼 왕제소의 작업은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동어반복적으로 병치했던 도널드 저드(Donald Judd)나 칼 안드레(Carl Andre)의 미니멀아트가 표방하는 자기 지시적이고 객관적인 미학을 벗어난다. 그의 작업은, 형식은 다르지만,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펠트 천이나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거대 철판과 같은 유형의 포스트미니멀아트의 지향점을 계승해서, 작품이 위치한 공간을 열린 구조로 재구성할 뿐만 아니라, 관객의 체험,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가히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열린 구조로 모색하는 상호작용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왕제소의 작품 <Putting: To Richard Serra>(2024)은 로버트 모리스와 리처드 세라를 동시에 떠올리게 만든다. 형식상으로는 로버트 모리스가 벽과 바닥 사이에 삼각형 구조물을 설치한 작품 <Untitled(Corner Piece)>(1964)나 거울을 설치한 작품 <Mirrored Corner>(1965)를 닮았고, 내용상으로는 리처드 세라가 자신의 예술적 행위와 과정을 정의했던 개념적 프레임워크인 <Verb List>(1967–68)를 실천하는 까닭이다. 왕제소의 이 작품은 로버트 모리스의 삼각형 구조물을 ‘크기가 다른 삼각형의 여러 세트’ 형식으로 변주한 것으로, 관객이 공간의 수축과 변형 그리고 경계의 확장과 전환을 인식하도록 안내한다. 
한편, 이 작품은 리처드 세라가 종이에 ‘to roll’, ‘to fold’과 같은 방식으로 수기했던 84개 동사 목록이 함유하는 조각의 물리적 행위와 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왕제소는 이 목록 중에서 “to put”과 “to lean”을 빌려와 작품 <Putting: To Richard Serra>(2024)의 주요 기조로 설명한다. 즉 이 작품을 벽과 바닥 사이에 작품을 놓고 배치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놓기’와 함께 조각이 중력에 반응하면서 기울어지거나 기대는 상태로 ‘불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유동적 구조’를 암시하는 ‘기대기’로 해설하고자 한 것이다. 
달리 말해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실현하는 열린 조각’이라고 할 만한 이 작품은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열린 구조가 잉태하는 잠재적 운동(이동)의 실현 가능성과 실제적 운동 그리고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지속해서 모색한다.      



II. 이동하는 관람과 세미 노마디즘
왕제소의 열린 조각은 관객의 작품 감상 행위에 있어서, ‘순연한 보기(seeing)’나 ‘관심의 투여를 통한 보기(watching)’뿐만 아니라 ‘작품 보기에서의 단순한 지각(perception)’과 ‘작품 관람에 집중을 요하는 인식(cognition)’을 두루 요청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업은 전자보다는 후자, 즉 워칭으로서의 보기와 인식으로서의 감상을 강조한다. 이러한 까닭은 왕제소가 작업을 미학 내부에 가두는 일보다 미학 외부의 사회적 맥락과 연결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관객과 상호작용을 도모하는 그의 이번 전시는 미술에 국한된 담론의 장에만 머물기보다 종국적으로 사회 속 인간관계와 상호작용을 은유하고 확장하는 것을 지향한다. 
작품 <Adjacency matrix-3×3>(2024)는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미술에서의 ‘시각 장(visual field)’에 관한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실험을 앞세우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과학적 실험을 넘어서서 사회 속 팽배해진 ‘시각의 영토(domain of sight)’가 지닌 문화적 의미에 관해 질문한다. 
‘인접 행렬(Adjacency Matrix)’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작품은 사물들의 관계나 연결을 수학적 구조로 연구하는 ‘그래프 이론(Graph Theory)’을 조각 설치의 방식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즉, 그래프는 개체를 의미하는 정점(Vertex)과 정점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간선(Edge)으로 구성되고, 간선에 방향이 없는 무방향 그래프(A-B), 간선에 방향이 있는 유향 그래프(A→B), 거리나 비용처럼 간선에 가중치가 부여되는 가중치 그래프 등으로 분류되는데, 왕제소는 “그래프의 연결 상태를 0과 1의 이진 행렬로 표현”하는 ‘인접 행렬’이라는 수학적 방식을 통해서 그래프 이론을 시각화한다. 
따라서 관객은 ‘세 행렬(3×3)로 이루어진 9개의 직육면체 기둥’이 서 있는 공간 안팎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각각의 위치에 따라서 다양한 간선의 관계를 형성하는 ‘타자들과의 만남의 유형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사유하게 된다. 특히 직육면체 기둥마다 거울과 투명 아크릴을 각기 달리 설치한 까닭에, 관찰자의 위치와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이러한 ‘만남과 관계의 다양한 조합’은 더욱더 증폭된다. 예를 들면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교환,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도치, 주체와 타자의 자리 이동, 대칭과 비대칭의 엇갈림과 같은 조합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재구성된다. 
유념할 것은, 왕제소가 그래프 이론을 조각 설치의 방식으로 시각화함으로써 인접 행렬이 함유한 만남과 관계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면서도 그것을 쿠르트 레빈(Kurt Lewin)의 ‘사회과학에서의 장 이론(Field Theory in Social Science)’과 접목함으로써, 그 의미를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쿠르트 레빈의 ‘장 이론’은 “인간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환경 속에서 다양한 힘의 상호작용에 영향 받으며 존재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즉 “행동(Behavior)은 개인(Person)과 환경(Environment)의 함수”라는 정의를 ‘B = f(P, E)’로 수식화한 심리학의 한 경향이다. 이 이론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방향과 강도를 수치화하여 누가 영향을 많이 주고받는지를 관찰하고, 그 관계망의 그래프 속에서 개인의 행동을 평가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왕제소의 작품은 관객이 또 다른 관객 사이에서 형성하는 인접 행렬을 수학적 결과물에 가두지 않고 사회적 구조나 심리적 힘의 흐름과 연동하여 열어둠으로써 차가운 이성적 한계를 넘어서 따스한 감성의 문제로 나아간다. 
이 지점에서, 왕제소의 작품 이론화 장치인 ‘세미 노마딕 모델’이 유의미해진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半)유목적 모델’로, 그는 완전히 자유로운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의 노마디즘(nomadism)을 이상으로 둔 채, 시공간의 한계가 명징한 현실적 구조 세계에서 구현이 가능한 ‘세미 노마디즘’을 실천한다. 특히 세미 노마디즘은, 그의 작품이 전시장에서 구동되는 ‘관객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예술적 실천에 집중된다. 왕제소의 사진 연작 <Between Upward and Downward Views>(2019~ )에서 보듯이, 지붕과 벽으로 둘러싸인  ‘홈패인 공간(l’espace strié)’으로 가득한 현대 도시의 삶에서 들뢰즈가 강조하는 노마디즘의 이상적 지평인 ‘매끈한 공간(l’espace lisse)’은 불가능하다. 홈패인 한계 공간 속에서 시도하는 가능성의 노마디즘은 세미 노마디즘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의 작품이, 재현에 특화된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시공간의 재구성’을 감행하는 적극적 매체로 변주한 것처럼 말이다.   
특히 왕제소는 “관객의 모든 움직임은 시각의 재구성이며,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위치와 감각을 생성하는 경험”으로 인식하면서 관객을 통해서 한계의 시공간에서 가능한 노마디즘, 즉 세미 노마디즘을 실천한다. 그의 세미 노마딕 모델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관객에게 적극적 관람을 요청하면서 관객을 정지의 장소로부터 이동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들의 심리적 상황과 소통함으로써 시공간의 한계를 탈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은 관객에 의해 비로소 움직임이라는 변주를 갖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전시는 작가 왕제소뿐만 아니라 관객이 함께 완성해 나가는 것이 된다. 그의 개인전에서 관객은 제2의 창작자가 되는 셈이다. 



III. 에필로그 
작가 왕제소는 전통적 형상 조각, 개념미술, 기하학적 추상화,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조각, 개념적 조각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횡단하면서 조형 실험을 거듭해 왔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그는 시각에 의해서 시공간의 변주를 다양하게 시도하는 조각적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관객의 개입과 움직임 그리고 시점의 변주를 통해 관객과의 소통을 견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틀리에서 만든 작품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시장에서 관객과 만나 상호작용을 벌이고 소통을 형성해 나가는지 주목한다. 
결론적으로 왕제소의 이번 전시는 ‘열린 조각’을 통해 관객에게 ‘이동하는 관람’ 방식을 요청함으로써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실험하는 세미 노마디즘’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202515)

출전/
김성호,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실험하는 세미 노마디즘」, 『왕제소』, 전시 카탈로그, 2025. 
(왕제소 박사학위청구전, 2025. 5. 28~2025. 6. 1, 홍익대 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