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기계 – 테크네의 정신을 되살리는 공생 기계
(상편)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기획전 《숨쉬는 기계》(2025. 9. 1~10. 18, 동빈문화창고1969)가 포항문화재단의 ‘2025 지역 전시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 개최되었다. 이 기획전은 설치미술가 김진우가 국민대학교 자동차융합대학에서 오래 담당했던 ‘기계와 예술’과 관련한 한 강의의 ‘결과 보고전’ 형식을 참여 예술가들과 함께 매년 새로운 주제를 통해 확장해 가는 중에, 기획자의 역할을 맡아 새롭게 기획한 대규모 전시다. ‘미술관 기획전’ 급의 규모를 갖추고 선보인 이번 《숨쉬는 기계》전이 왜 포항에서 개최되었는가? 포항의 제철 산업과 예술 산업의 배경 속에서 기계와 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는 이 전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미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기획전 주제인 ‘숨쉬는 기계’를 해석하는 다양한 출품작들을 통해서 참여 작가들은 어떠한 예술적 고민과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는가? 



I. 기계 문명의 신화 – 기술의 유토피아  
인류가 태동한 이래, 그 기원을 다루는 여러 신화에는 공통으로 신과 인간 그리고 노동과 기술의 담론이 녹아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메르 신화에서는 노동에 지친 남신 엔키(Enki)와 여신 닌마(Ninmah)가 점토로 인간을 빚어 신들의 일을 대신하게 만든다. 탄생 순간부터 육체노동과 생산이라는 숙명을 짊어지게 된 인간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피고용자라고 하겠다. 즉 창조와 동시에 노동 계약이 체결된 존재인 셈이다. 히브리 신화에서도 흙을 빚어 만든 최초의 인간인 아담(Adam)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에서 추방된 후 땀 흘리는 노동을 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이는 노동이 죄의 대가로 주어진 형벌임을 시사한다. 또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직접 진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제우스의 금기를 어기고 불(기술)을 전달함으로써 그들이 문명과 도구를 통한 노동의 세계에 진입하게 만든다. 
수메르, 히브리, 그리스 신화는 각각 다른 문화적 상징과 서사를 통해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지만, 그 핵심에는 공통된 시선이 담겨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노동과 기술의 경계에 선 존재였으며, 자연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을 넘어서려는 본능을 지닌다. 수메르의 인간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는 존재로 창조되고, 히브리의 인간은 죄의 대가로 땅을 일구며 생존한다. 그리고 그리스의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훔쳐다 준 ‘불’을 통해 문명의 불씨를 지피며 기술적 진보의 길로 들어선다. 
이처럼 인간은 언제나 두 손에 흙을 묻힌 채, 도구를 들고 미래를 설계하는 존재였다. 자연의 산물이면서도 자연을 다시 구성하려는 욕망을 지닌 존재로서 말이다. 이 세 신화는 인간을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자신을 계속 새롭게 빚어가는 ‘생각하는 기계’로 그려 보인다. 결국 이 신화들은 인간의 본질을 묻는다. 우리는 왜 일하는가? 왜 기술을 욕망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어떤 신화를 다시 쓰고 있는가?
신화의 시대로부터 수천 년 후, 우리는 기계 문명이라는 거대한 신전 속에 살고 있다. 증기기관이 바퀴를 돌렸고, 전기가 도시를 밝히고, 알고리즘이 판단을 보조하며, 로봇이 노동의 손발이 되었다. 바벨탑은 무너졌지만, 기계로 쌓아 올린 도시는 무너지지 않는 신전이 되었다. 이 신전 안에서 인간은 이제 신이 아니라 관리자, 설계자, 프로그래머로 거듭나며, 세상을 더 정교하게 조직하는 기술적 주체로 진화해 왔다.
18세기 산업혁명은 노동의 무게중심을 인간에서 기계로 옮긴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과 정교한 기계들은 인간의 팔과 다리를 대체하며, 단순한 도구를 넘어선 창조적 기술 주체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일하는 기계’는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고 확장하며, 생산의 리듬을 고된 육체적 반복에서 창조적인 기술적 기능으로 전환했다. 수공업이 기계 공업으로 대체되면서 인간은 기술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조직할 수 있는 문명의 설계자가 되었다.
19세기 전기 혁명은 또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열었다.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과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의 실험은 전기를 단지 물리적 에너지가 아니라 사회적 리듬을 재구성하는 빛의 기술로 변화시켰다. 도시는 밤에도 깨어 있고, 공장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돌아가며, 인간의 삶은 더욱더 유연하고 확장된 시간 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기계가 만든 표준시(standard time)는 서로 다른 지역과 사회를 하나의 동기화된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시간 기술의 기념비가 되었다.
20세기 중반, 헨리 포드(Henry Ford)의 조립 라인은 기술이 단순히 인간의 ‘힘’을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행위의 구조와 협업의 질서까지 재편하는 기획적 장치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포디즘(Fordism)은 대량 생산과 효율성의 논리를 통해 인간의 노동을 체계적으로 구성했고, 그 결과 생산은 예측 가능성과 조직화를 중심으로 한 기술적 협동의 질서로 자리 잡았다. 이는 오늘날의 산업 구조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구조적 효율성과 정밀성을 가능케 한 기계적 문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근대 이후의 기계 문명은 노동을 경감시키고,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며, 인간 생존의 조건을 획기적으로 향상해 왔다. 인간은 기계를 통해 자연을 가공하고, 시간을 저장하고, 도시를 설계하며, 자신을 자연 위에 새로운 질서로 새겨 넣는 존재로 나아갔다. 어떤 면에서 기계는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기술적 거울이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근대화란 결국 인간이 기계라는 신전 위에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걸고 건설한 찬란한 기술문명이었다. 따라서 근대화가 이룬 기술문명은 기계와 함께 세운 진보의 서사이자 ‘기술의 유토피아’였던 셈이다. 



II. 게슈텔과 트랜스 휴머니즘 – 기술의 디스토피아
그러나 근대의 기계 문명의 시대뿐만 아니라 AI로 진화해 온 오늘날 테크놀로지 시대가 과연 이러한 ‘기술의 유토피아’만을 펼쳐 보여 왔던 것일까? 인간을 위해 만들었던 기계가 다시 인간을 구속하고 도구화하는 세상인 ‘기술의 디스토피아’는 아니었을까?
주지하듯이, 자연 자체를 과학적 방법론으로 분석했던 17세기 갈릴레이(G. Galilei)의 천체학, 역학 연구나, 세계를 역학적 인과관계로 설명하고자 했던 데카르트(R. Descartes)의 기계적 철학은 세상의 신비를 과학적 사유로 풀고자 했던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의 일단이었다. 근대의 기계 문명 또한 마찬가지다. 산업혁명이 급발진시켰던 기계 문명은 인간의 미래 삶을 위한 터전으로 두고자 했던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인간의 해방을 위해 만들었던 기계는 장밋빛 가득한 문명을 인간에게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을 구속하고 도구화한다. 기계를 통해 인간 해방을 부르짖었던 18세기 산업혁명은 역으로 전통적 수공업을 파괴하고 비인간적 공장 노동자를 무수히 양산하지 않았던가? 19세기 전기 혁명 또한 도시가 불을 밝히고 야간에도 작동하는 공장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생체 리듬마저 기계 시간에 맞춰 조정되기에 이르렀다. 전기의 등장은 노동과 휴식의 시간을 낮과 밤으로 나누지 않았다. 기계가 만든 표준시가 노동의 가능성이란 차원에서 모든 사회를 동기화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헨리 포드의 포디즘 또한 인간을 시간당 효율이라는 단위로 측정함으로써, 인간의 몸을 규칙화된 시스템에 조각처럼 맞춰 넣었다. 생산은 기계의 리듬이 되었고, 인간은 단지 부품으로 전락했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경고하듯, 인간을 위해 구축했던 기계 문명은 역으로 사물과 인간, 자연을 ‘자원화(standing-reserve)’하고 ‘통제’하며 저장할 수 있는 객체로 전환한다. 그는 이를 ‘게슈텔(Ge-stell)’이라 명명했는데, 이것은 기술이 세계를 단순히 도구적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일정한 방식으로 ‘소집’하고 ‘배열’하여 그 가능성 자체를 규정짓는 위험한 배치임을 가리킨다. 게슈텔은 인간이 자연과 존재를 자유롭고 다층적으로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제한하고, 오직 계산 가능하고 활용이 가능한 자원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도록 강제한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통해 세계가 ‘드러남’이 아닌 ‘은폐됨’으로 바뀌는 이 전환을 철학적 관점에서 위기라 보았다. 게슈텔은 단순한 도구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 방식의 근원적 왜곡을 초래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매클루언(M. McLuhan)의 기술결정론은 이러한 철학적 우려를 미디어의 관점으로 확장한다. 그는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아포리즘으로, 모든 도구와 기술이 인간 감각기관과 신체 능력을 외연적으로 확장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푸른 화면의 텔레비전은 인간의 시각을, 라디오는 청각을, 컴퓨터는 인지 기능을 확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확장은 곧 감각의 선택적 강화이자 타 감각의 위축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컨대 시각 중심의 미디어는 청각적 상상력을 약화하여, 실시간 정보 흐름에 익숙한 인간이 깊이 있는 사유를 점점 놓치게 만든다. 매클루언은 이처럼 기술이 피상적으로 인간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의 감각 구조와 사고의 리듬 자체를 재편한다고 보았다. 그는 기술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고 경고했다. 인간이 기술을 통제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기술이 인간의 사고와 사회의 구조, 나아가 문화의 방향까지 은밀히 재편한다고 보았다. 매클루언에게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용자의 의도를 넘어 인간을 길들이고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체계였다.
그렇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발원한 기계 문명의 유토피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간을 위해 만들었던 기계는 역으로 인간을 구속하고 도구화길 지속한다. 우리는 경쟁하는 군사기술이, 인류를 폐허에 이르게 했던 양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21세기에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전쟁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원자폭탄, 레이더, 컴퓨터와 같은 폭주하는 기술은 이제 인간을 보호하는가, 파괴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낳았다. 인간을 위한 ‘기술의 유토피아’를 목적으로 생산했던 기계 문명이 낳은 ‘기술의 디스토피아’라고 하는 역설적 결과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신화를 써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기계가 신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거울이 된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기계 신전 혹은 기술 신전’의 이름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과 함께, 기계의 생명을 연장해 온 인간중심주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에 심각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해 왔다. 이제 인류는 나노기술, 유전공학, 사이버네틱스, 인공지능이 만드는 인간상을 ‘트랜스 휴머니즘(Trans humanism)’이라는 이름 아래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트랜스 휴머니즘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기술적 욕망이 만들어낸 사상으로, 노화와 질병,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을 극복하려는 프로젝트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해방적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해야 하는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트랜스 휴머니즘을 넘어선 ‘포스트 휴머니즘(Posthumanism)’의 사유가 부상하고 있다. 이는 인간-비인간, 인간-기계, 주체-객체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고, 인간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한다. 포스트 휴머니즘은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에, 윤리적, 생태적, 철학적 재구성을 통해 인간과 기술, 자연의 관계를 보다 평등하고 상호작용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한다.



III. 테크네의 정신 - 기계 도시 포항의 문화 전환
포항은 기계 문명의 신화와 게슈텔의 비판적 쟁점이 한꺼번에 작동해 온 도시다. 철강 도시 또는 기계 도시라는 이름으로 ‘기술의 유토피아’를 성취했던 도시이자, 기술 이데올로기 밑에서 생태적 파괴가 일상으로 진행되기도 했던 ‘기술의 디스토피아’ 도시이기도 했다. 
1973년 가동된 포항제철(POSCO)은 초기에 단지 철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한국 산업 근대화의 상징이자 기술적 상상력의 응축체였다. 강철은 국가를 일으켰고, 포항은 철의 정치학과 기술적 미학이 교차하는 실험 도시로 기능했다. ‘기계 도시’라는 수사는 단지 은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포항의 도시 구성, 노동 구조, 교육 체계, 생활 양식 전체가 기계적 질서로 짜인 체계적 풍경이었음을 의미한다.
철강 플랜트는 수많은 센서, 자동 제어 장치, 제련 알고리즘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도시의 시간은 교대 근무와 생산 캘린더로, 공간은 공업단지와 사택 지구로 조직되었다. 포항은 기계가 도시를 만들고, 기술이 정체성을 부여한 대표적 사례로서 한국의 기술 근대화의 전위에 서서 한국의 부흥을 이끌던 도시였다. 
이 과정에서 포항은 거대한 성공 신화의 무대가 된다. 제철 산업은 수출을 견인하고, 지역 경제를 살리며, 교육·문화·의료 등 복지 시스템을 통합한 자급적 도시 생태계를 완성했다. 이는 국가 중심 개발의 모범 사례로 반복되었고, 포항은 곧 기계가 만든 도시, 기술이 완성한 문명 공간으로 기록되었다.
아서라! 성공 신화로 포장된 포항의 기술 근대화 이면에는, 인간이 기계에 의해 구조화되고 도시가 감정을 거세당한 채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비인간적 체계로 환원된 풍경이 존재했다. ‘철의 도시’라는 수사는 국가주의적 영웅서사의 일부였지만, 그 실상은 기술이 인간 삶의 리듬과 감정을 철저히 재편하고, 노동과 일상을 기계의 속도와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었다.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주체를 분해하고, 삶을 기계화된 시간표에 맞춰 배치하는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포항은 거대한 철강 플랜트가 아닌 이상, 하루 24시간, 3조 3교대의 시계 장치처럼 작동하는 도시였다. 노동자들은 신체의 리듬과 감각을 포기한 채, 교대 조의 시간표에 맞춰 살아야 했다. 기술 시스템이 도시를 ‘자급적 생태계’로 만들었다는 주장 이면에는, 인간이 도시의 주체라기보다는 체계 내 부속품이 되는 과정이 있었다. 교육 시스템마저 기업 친화적으로 조정되었고, 문화는 기업의 후원 또는 기술 산업의 하위 코드로 치환되었다.
이처럼 기계가 조직한 도시는 생산과 효율의 가치 외에는 인간적 삶의 다양성을 환대하지 않았다. 도시의 공공성은 희박했고, 예술이나 비판, 사색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른바 ‘기계적 풍경’은 기술 도시의 신화 아래 인간 삶을 표준화하는 감각의 빈곤을 초래했다.
그뿐인가? 기술 근대화가 낳은 또 다른 그늘은 환경적 대가였다. 대규모 제철 플랜트는 해안 생태계를 급속히 파괴했고, 도시 전역에 걸쳐 대기오염, 토양오염, 해양오염을 일으켰다. 이는 단순한 외부 효과가 아니라, 기술 시스템이 환경을 수단화한 근대적 사고의 귀결이다. 이와 같은 기술 이데올로기는 “더 빨리, 더 크게, 더 효율적으로”라는 산업 논리에 의해 문화와 생태를 밀어냈다. 포항은 한때 수산 도시였고, 풍요로운 해양 문화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았다. 어찌 보면 포항에서 자연은 기술을 위해 침묵 당했고, ‘철’은 도시의 유일한 언어가 되었을 따름이었다. 
포항의 도시 경관은 한때 미래 기술의 상징으로 환영받았지만, 그 시각적 구성은 반복과 규율, 효율성의 조형 언어로 이루어졌다. 동일한 공단의 반복, 회색의 주택 단지, 직선과 각도의 구조물들. 이러한 미학은 기술이 감정을 대체한 도시 풍경이며, 인간적 정서의 거주지를 박탈한 근대 도시계획의 전형이다. 포항에서 기술은 창의성이나 다양성을 함축하기보다는, 경제적 가치의 재현에만 복무하며 도시 전반을 단일한 서사로 통제해 왔다. 즉, ‘기계 도시’ 시대의 포항은 기술 유토피아의 외피를 쓴 감성의 사막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포항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포항은 기술의 그림자 아래 침묵만 하진 않았다. 포항시는 기계의 도시에서 감응의 도시로 전환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해왔다. 기계의 리듬에서 벗어난 느린 삶, 지역 생태를 재구성하는 지속 가능성, 기술이 아닌 감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문화와 예술에 관한 요청이 그것이다. 단순한 산업 다변화가 아닌, 문화 구조의 전환, 감성 생태계의 복원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간단히 말해 생태와 문화 전환의 노력이 요청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포항그린웨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포항 철길 숲 만들기’다. 2015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포스코 전용 철도 부지를 녹지공간으로 탈바꿈해서, 산업도시의 경직된 구조에 생태적 감각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단순한 조경공사가 아니라, 기계 도시의 기능적 회로 위에 감성적·비기능적 숨결을 불어 넣는 테크네(Technē)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늘날 기술의 어원으로 꼽히는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τέχνη)’는 단순히 기술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테크네라는 용어는 당시 승마술, 요리술, 건축술, 항해술, 체화술처럼 장인들의 실용적 테크네뿐만 아니라, 의술, 정치술, 수사술, 음악술, 시(詩)술처럼 이성적 판단과 실천을 요하는 전문적 직능의 테크네에 두루 사용되었다. 즉, 당시의 테크네란 기술(technique), 예술(art), 장인정신(craft), 지식(epistēmē)을 두루 아우르는 통합적인 창조 기술이었다. 플라톤에게 테크네는 이데아를 실현하는 방법론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테크네를 ‘생성(poiesis)’의 앎으로, 자연이 아닌 인간에 의해 무엇인가를 있게 하는 능력으로 정의했다. 즉 테크네의 정신은 자연과 인간, 감성과 이성, 기술과 예술의 구분이 없던 시대에 하나의 존재 양식이자 앎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근대를 거치며 테크네는 점차 근대 과학과 공학의 하위 범주로 재정의되기 시작한다. 특히 데카르트적 이원론과 기계론적 자연관, 계량화된 합리성이 지배하면서, 테크네의 문화적, 예술적 뿌리는 잊히고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 중심의 기술이 대두하게 된다. 이 시기 ‘테크네’는 기술로 환원되며, 문화와 예술은 ‘비이성적 감성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기술, 문화, 예술은 분화되고 계층화된 영역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특히 전후(戰後) 산업사회를 거쳐 디지털 전환기(post-digital age)에 이르기까지, 테크네는 다시금 기술, 예술, 문화가 통합되는 창조적 실천으로 회귀하고 있다. 이는 단지 기술 발전의 결과라기보다, 예술가와 기술자, 디자이너, 해커, 바이오 연구자들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문화적 전환(cultural transformation)’의 산물이다. 이러한 전환은 ‘기술의 도구화’와 ‘예술의 자율화’라는 근대적 이분법을 해체하며, 테크네의 원형적 의미—즉 세계에 형식을 부여하고 존재를 드러내는 창조적 앎으로서의 실천—을 다시 소환하는 시대를 열고 있다. 
포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항의 철강 중심 테크네는 1990년대 이후 산업화의 한계와 도시 생태계의 피로가 가시화되면서 전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태풍, 지반 침하, 해안 생태계 붕괴와 같은 자연의 반응은 기술이 전능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상기시켰고, 한편으로는 인간 중심의 산업 테크네가 비인간적 세계와 어떻게 불화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포항은 다시 물었다. 도시란 무엇인가?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포항은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2009년 12월, 포항시립미술관의 개관은 그 첫 장면이었다. 바다를 마주한 이 미술관은 기능적 설비로서의 건축이 아닌, 예술이 도시와 대화하는 창구로 등장했다.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도시가 자기를 성찰하는 장치로서 미술관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강 도시 포항에서 스틸아트(Steel Art)는 더 이상 금속의 강도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테크네의 미적 잠재력, 다시 말해 기술이 예술로 전환되는 감각의 언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한편, 포항시가 운영하는 ‘포항문화예술회관’과 ‘중앙아트홀’은 각각 전통적 공연장과 전시 공간으로 기능해 왔지만, 최근에는 그 프로그램 내용에 있어 기술 기반의 예술적 실험을 적극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 산업 사운드 기반의 퍼포먼스, 도시 기억을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아카이빙 전시 등은 전통적 공연장의 역할을 확장하며, 기계 도시에 감응하는 문화 프로토콜의 변화를 시사한다. 
동시에, 포항은 도시의 생태계도 회복해야만 했다. 포항의 도시재생은 단순히 낡은 것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폐허로 남은 주거지, 버려진 공장, 기능을 잃은 창고는 생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전환의 감각 실험장이 되었다. 



IV. 테크네의 실천 – 지역 전시 활성화 사업과 공간의 문화 재생 
테크네의 정신을 되살리는 ‘기계 도시 포항의 문화 전환’에 있어서, 2016년 출범한 포항문화재단의 역할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재단은 산업도시로서 포항이 겪어온 기술적 집중과 문화적 결핍의 비대칭을 예술적 실천으로 치유하려는 시도를 지속해 왔다.
재단이 주최·주관하는 프로그램은 단순히 전시를 열거나 공연을 올리는 차원을 넘어, 도시의 정체성과 감각을 예술로 재배열하는 과정으로 기능했다. 지역 예술인을 위한 장르 간 융·복합 실험 기획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예술을 ‘보여주는 것’에서 ‘함께 만드는 것’으로, 다시 ‘공유하고 재구성하는 것’으로 확장하는 테크네적 예술 행정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테크네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예술은 존재를 감각하게 하고, 기술은 그것을 조직한다. 포항문화재단의 작가 지원 프로그램은 이 두 층위를 가로지르며, 기술적 도시의 존재론을 감각의 언어로 다시 쓰는 기획이다. 즉, 포항이라는 기계적 도시에서 예술가들이 다시 감응의 층위를 복원할 수 있도록 돕는 재단의 실천은, 가히 ‘감응하는 도시’를 향한 문화적 리허설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이러한 문화적 전환의 흐름 속에서, 포항문화재단이 기획, 운영하는 대표적인 사업은 ‘지역 전시 활성화 사업’이라고 하겠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협력 아래, 지역 예술 생태계의 저변을 확장하고 도시 전체를 하나의 전시 플랫폼으로 전환하려는 전략적 실험이다. 주목할 점은, 이 사업이 단순히 ‘지역 예술인을 지원하는 공모 사업’의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도시의 숨은 장소와 기억, 산업의 잔재와 기술의 흔적, 시민의 일상적 경험에 예술을 개입시키는 과정이다. 기계 문명이 무화시킨 감각을 예술이 다시 깨우고, 잊힌 풍경을 새로운 감응의 장으로 되살려내듯이 말이다. 
‘지역 전시 활성화 사업’은, 어떤 면에서 전시에만 국한되지 않고 도시 자체를 큐레이팅하며, 기술의 흔적 위에 예술적 관계망을 재조직한다고 평가해 볼 수 있겠다. 결국 도시가 하나의 전시 캔버스로 확장되고, 예술가는 기계와 기억, 산업과 감성 사이의 여백에 질문을 그려 넣는 셈이다. 이 사업은 그런 의미에서, 기계적 도시가 감응적 도시로 기획되는 문화적 방법론, 그리고 기술의 도시가 예술의 도시로 변모해 가는 테크네적 실천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포항문화재단은 감응적 도시 전략을 이러한 콘텐츠와 같은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하드웨어 운영을 병행하면서 실천한다. 유휴 공간 재생을 통한 ‘물리적 공간의 테크네화(化)’라고 할 것이다. 이때의 테크네는 단순한 건축 기술이나 리모델링의 차원을 넘어, 기계적 잔존물이 감각적 예술로 재구성되는 창조적 전환의 기술을 상정한다. 재단이 운영하거나 연계하는 문화 공간들은 각기 기계의 흔적, 산업의 기억, 기술의 구조를 내포한 장소들이며, 그 자체로 도시의 기술 유전자를 품은 ‘감각의 하드웨어’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능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공간 몇 개를 살펴보자.
한편, 확장된 감응적 도시 전략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 바로 ‘문화예술창작지구’다. 이곳은 특정 건물에 국한되지 않고, 포항 원도심인 중앙로 298번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구 단위의 예술적 재생 프로젝트로, 예술가들이 지역 공동체와 함께 삶의 공간을 재구성하는 실험이 펼쳐지고 있다. 빈집을 개조한 작업실, 마을 주민과의 공동 창작, 골목 전시와 지역연극 등은 도시재생과 예술 실천이 접합하는 일상형 테크네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기계적 구조물이 아닌 도시의 사회적 결과물로서의 장소성이 테크네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포항문화재단이 직·간접적으로 운영하는 문화 공간들은 단순히 전시나 공연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도시의 기술적 구조와 예술적 감각이 교차하는 실험적 플랫폼이자, 기계적 흔적과 감각적 창작이 공존하는 테크네의 현장이다. 공간마다 그 구현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가 산업도시 포항의 기억 위에서 예술이 다시 숨을 쉬게 만드는 도시 문화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다.



V. 숨쉬는 기계 – 행위자 네트워크와 공생 기계
포항문화재단 주최, 주관으로 개최된 《숨쉬는 기계》전은 ‘기계 도시’ 포항의 문화 전환의 의지를 드러낸 전시다. 이 전시는 포항의 또 다른 문화 재생 공간인 동빈문화창고1969에서 개최되었다. 이 장소는 공공정책의 관점에서 유휴 공간의 단순한 재생만이 아닌 ‘문화적 장소성의 재배치’라는 문화 전환의 차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공간은 1969년, 산업화의 정점에서 수협이 어업 생산품을 저장하기 위해 건립한 냉동창고였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내부에는 냉각 코일, 냉장 컨테이너, 물류용 승강기, 기계식 환기구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건물은 당시에는 기능만을 위한 완벽한 비감각적 건축으로 존재했다. 21세기에 들어, 이 공간은 철거 대신 ‘기억의 보존’과 ‘재생’이라는 슬로건 아래 건축적 테크네의 실험장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공간은 해체되지 않고 리뉴얼을 통해서 보존, 전환되었는데, 차가움과 어둠, 울림과 침묵의 감각은 그대로 유지된 채 예술적 연출로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재배치되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산업 유산 전시, 뉴미디어 퍼포먼스, 인터랙티브 설치, 사운드 아카이빙 등이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지역의 기술사, 생활사, 기억이 예술을 통해 다시 호흡되고 있다. 이곳에서 전시의 유형으로 추가되는 조명, 음향, 설치 구조물, 영상 매핑 등은 기계적 냉기를 감각적 밀도로 치환하는 주요한 장치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장소성의 재배치 혹은 문화적 전환은 포스트 산업 사회에서 기계적 기능체가 감각적 존재체로 전이되는 사례로 자리한다. 도시의 테크네가 새로운 예술 공간이라는 테크네 모델로 부활한 셈이다. 
문화 재생 공간인 동빈문화창고1969는 기술이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예술이 다시 시작되는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기계는 흔적이 되고, 흔적은 기억이 되며, 기억은 감각을 통해 다시 현재로 소환된다. 숨을 쉬지 않던 구조물이 예술적 감응을 통해 천천히 호흡을 되찾는 이 과정은, 도시가 자기 정체성을 되살리는 방식이자, 예술이 기술문명의 그림자를 포용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진우 총괄 기획자는 동빈문화창고1969를 하나의 커다란 기계로 인식하고 이곳을 숨쉬는 기계로 전환하고자 했다. 풀어 말해,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의 ‘되기(devenir)’라는 철학적 메타포와도 연동하는 사물과 타자의 귀환을 요청한 셈이다. 즉 전시장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기계로 전환하는 ‘기계 되기’의 실천을 감행하면서 그는 포항이라는 지금, 여기에서의 예술하기라는 의미를 성찰한다.
총괄 기획자는 기획서에서 ‘포항-기계-예술’의 관계에 관한 문제의식을 다음처럼 드러낸다. “포항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중심지로, 철강을 통해 국가 경제와 도시의 발전을 견인한 상징적인 공간이다. 철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도시의 역사와 산업의 기억을 축적한 존재이다. 본 전시는 포항의 철강 산업과 키네틱 아트 및 뉴미디어 아트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며, 산업과 예술의 관계를 확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총괄 기획자는 “기계가 지닌 지속성과 반복적인 움직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철강 산업의 역사성과 연결된다”라고 파악하면서, 기계적 구조뿐만 아니라 키네틱 아트, 뉴미디어 아트, 디지털 네트워크, 디지털 알고리즘, 관객의 상호작용과 연계된 ‘다양한 기계의 변주와 운동’을 실험하면서 포항에서의 철강 산업과 인간 그리고 폭넓은 범위의 기계 예술과의 만남을 선보인다. 즉 포항의 철강 산업이 인간의 노동과 기계가 결합하여 발전해 왔듯이, 이번 전시는 기계-인간-예술과의 공존과 공생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번 기획전은 ‘기계 도시이자 기술 도시’인 포항을 예술과 기술이 공존, 공생하는 도시로 확장하는 공생 도시의 담론을 만들어, 총체적인 ‘문화적 전환’을 도모하고자 한다. 
공존(coexistence)과 공생(symbiosis)? 
주지하듯이, ‘공존’은 타자와의 차이를 소멸시키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있음으로써 세계를 구성하는 관계적 상태이다. 이는 동일성의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과 상호 의존 속에서 지속되는 존재의 윤리적 형식을 뜻한다. 
따라서 ‘공존’의 실존적 실천을 강조하는 ‘공생’은 단순히 서로 돕고 사는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 존재론의 전환을 요청하는 생태 철학적 개념이다. 근대 이후 인간 중심적 사유는 세계를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으로 구획해 왔다. 그러나 생태철학에서의 공생은 이 구획선을 해체하며, 존재를 관계적 사건으로 재규정한다. 즉, 개체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그물망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변형되는 과정적 존재라는 것이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가 말한 ‘행위자-네트워크’의 세계는 바로 이 공생적 존재론의 연장선에 있다. 인간과 모든 비인간, 즉, 유기체와 기술, 물질과 감정이 서로를 매개하고 교차하는 관계망 속에서 ‘살아있음’이 구성된다. 공생은 여기서 단순한 ‘공존’이 아니라, 서로의 경계를 섞고 변형시키는 내재적 연루(intra-action)가 된다. 이 점에서 공생은 윤리 이전의 존재론적 감응(ontological attunement)이며, 인간 타자와 더불어 생물, 광물, 사물 등 모든 비인간에 대한 배려는 생존의 조건이 된다.
페미니스트 생태철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강조한 “함께 만들어가기(making-with)” 또한 공생의 미학적 표현이다. 그녀에게 공생은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를 돌보며 ‘함께 세계를 짓는 행위’(worlding)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유는 인간 중심적 구원의 서사를 비판하며, 대신 돌봄과 상호 의존의 감각을 존재의 중심에 둔다. 따라서 공생의 윤리와 미학은 약자의 구제나 자연의 보호가 아니라, 존재가 서로를 통해 살아간다는 근본적 인식의 전환을 요청한다. 
이번 기획전 《숨쉬는 기계》가 제기하는 ‘공생’의 담론은 미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실천이 된다. 그것은 기계 도시라는 포항의 환경적 공존 이전에, 기술과 감각, 그리고 기계와 생명의 상호작용을 재조정하는 실천적 테크네로 요청된다. 생태학이 데이터의 학문이라면, 생태철학은 감응의 철학, 즉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테크네이자, 곧 서로의 숨을 듣고 느끼는 감응의 테크네이다. 공생은 그렇게,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숨 쉬며 세상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철학적 장치로 작동한다. 즉,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자연-도시-기술-예술이 서로의 숨결을 나누며 세계가 다시 감응을 회복하게 하는 생태적, 철학적 순환의 장치인 셈이다. 
그리고 순환적 장치는 오늘날 포항에서 나아가 포항의 동빈문화창고1969라고 하는 재생 공간에서 구체적 형태를 얻는다. 산업화의 기계적 기억 위에 세워진 포항은, 이제 기계와 기술, 도시와 인간, 예술이 함께 호흡하는 공생의 미학을 실험한다. 냉각된 철의 도시가 예술의 감응을 통해 다시 온기를 얻는 과정, 기술이 예술의 언어로 재해석되는 장면, 그리고 인간과 기계가 감각적으로 연결되는 도시적 테크네의 실천은 바로 공생의 철학을 현실화하는 한 형태다.
따라서 총괄 기획자가 포항의 문화적 전환을 시도하고 공생의 담론을 펼치고자 한 이번 기획전은 기술문명의 그림자를 껴안고 그것을 예술적 감응으로 변환하는 21세기적 공생의 도시적 선언이 된다. 아울러 공생이라는 담론을 여러 참여 작가가 각자의 출품작들로 실천하는 ‘동빈문화창고1969’라는 전시 공간은 이제 하나의 커다란 ‘공생 기계’이자 ‘숨쉬는  기계’가 된다. ‘행위자 네크워크’의 드넓은 장으로서 말이다. 

(하편에서 계속) 

출전/
김성호, 「숨쉬는 기계 – 테크네의 정신을 되살리는 공생 기계」, 『숨쉬는 기계』, 전시 카탈로그, 2025. 
(숨쉬는 기계전, 2025. 9. 1~10. 18, 동빈문화창고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