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전유의 미학 - 온고지신과 계반삽시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조각가 강용면은 이번 전시에서 〈온고지신 – 고봉밥〉, 〈온고지신 – 깻잎〉, 〈온고지신 – 계반삽시〉라는 세 작품을 선보인다. 이 작품들은 그가 골몰해 왔던 ‘전통의 현대화’라는 화두를 잇는 이전의 다양한 연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즉 이번 연작은 이전의 연작과 더불어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여 왔던 미학과 조형 실험을 계승하고 새로운 감각으로 변용한다.
그의 대표적 연작은 1980년대 말대부터 상여를 꾸미는 꼭두각시 인형에서 영감을 받아 오방색 위주의 인물 목조각을 탐구한 〈역사원년〉, 2000년대부터 아크릴, 레진, 우레탄, LED 등 다양한 재료 실험과 다양한 설치 형식을 통해 전통을 현대적으로 모색한 〈온고지신〉과 같은 것이다.
한편, 2000년대부터 시인 고은의 『만인보』에 영감을 받아 제작하여 2014년 첫선을 보인 만 명에 육박하는 인물 두상을 집적해 만든 대규모의 인간 군상 작품인 〈현기증〉이나 2018년 레진과 우레탄으로 만든 추상적 형상 위에 유화 물감을 두껍게 덧입혀 오늘날 정치, 사회적 갈등을 표현한 작품인 〈응고〉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이번 전시는 이전의 작품들이 선보였던 공통의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또 다른 차원의 작품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이 무엇인가? 이번 전시가 선보이는 주제 의식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드러내는 미학적 함의란 무엇인가?
II. 온고지신 – ‘차안’에서의 생성적 전유
강용면이 이번 전시에서 제목 맨 앞에 붙인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무엇인가? 주지하듯이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서 유래한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옛것을 따뜻이 되새기며 새것을 깨닫는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온(溫)은 단순한 복습이 아니라, 식어버린 기억을 다시 데워 과거의 의미를 현재로 되살리는 행위를, 지신(知新)은 그 되살림 속에서 새로운 인식과 감각을 생성하는 창조적 사유를 뜻한다.
그러니까 온고지신은 시간의 선형적 진보를 거부하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이 연결되는 순환적 인식 구조를 제시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전통의 생명력을 계승하고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사회적 정체성을 새롭게 회복하려는 태도를 견인한다. 결국 온고지신은 박제된 옛말이 아니라, 기억의 시간에서 미래의 감각을 호출하는 존재론적 상상이자, 기억의 재발화를 통해 미래의 불씨를 피워 올리려는 인식론적 노력이자 실천이다.
그렇다면 강용면의 작품이 드러내는 온고지신의 미학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차안(此岸)에서의 생성적 전유(generative appropriation)’로 풀이한다. 주지하듯이, 동양 철학에서 차안이란 ‘지금, 여기’의 삶의 공간으로, 죽음이나 해탈로 피안(彼岸)에 도달하기 전의 현존 공간이다. 즉 강용면이 창작하는 현실의 공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미가 모호한 ‘생성적 전유’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유가 “기존의 것을 새로운 맥락 속에서 변용하는 행위”라고 할 때, 강용면의 작업은 과거의 전통을 ‘지금, 여기’의 맥락 속에서 계승, 해석, 변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생성적 전유’를 실천하는 까닭이다.
한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전유를 ‘생성으로서의 존재 사건(the event of being as becoming)’으로 보았고,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것을 ‘끊임없는 차이 생성(generation of difference)의 과정’과 ‘되기(becoming)의 운동’으로 보았듯이, 전유는 생성하는 사건이자 운동이다. 동양에서는 전유라는 개념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나 의미를 ‘다시 끌어와 자기 것으로 삼되, 새롭게 변형하는 사유 방식’은 존재한다. 마치 도가의 노자(老子)가 도(道)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스스로 생성하고,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운동’으로 보았던 것이나, 불교의 화엄 철학이 연기(緣起)를 ‘존재의 관계적 생성’으로 보았듯이 말이다.
강용면 작업에서도 온고지신이 강조하는 ‘생성적 전유’의 실천 전략은 옛것을 가져오되 다른 새로움을 생성하는 과정이자 운동이며, 창조의 사건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이번 전시뿐만 아니라, 그의 이전 작업 전반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한국 전통의 상여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인 채색 목조각을 선보였던 〈역사원년〉 연작이 그러했고,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서 영감을 받아, 시에서 묘사된 인물과 자신의 주변 인물과 동시대 인물들의 군상을 만든 작품 <현기증>도 그러했다. 특히 <현기증>이라는 작품은 이전의〈온고지신-얼굴〉, 〈온고지신-만인보〉와 같은 색채 조각이 점차 흑색의 작품으로 변모되면서 ‘현대적 민중 초상’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면서 구체화되었던 것이었던 만큼, 온고지신이 함유한 ‘생성적 전유’를 효율적으로 실천했다.
강용면의 조각은 전통을 단순히 복원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여기’라는 차안에서 전통의 재료와 형식을 호출하되, 그것을 현재의 감각 속에서 다시 숨 쉬게 만든다. 즉 그의 작업에서 전통은 박제된 유산이 아니라,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의 존재적 위상으로 변모하면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갱신되는 과정이자 운동이며, 하나의 사건이 된다. 그가 과거의 형상과 감각을 소환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재현하지 않고 ‘생성적 전유’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까닭이다. 즉, ‘생성적 전유’란 그에게 과거를 소유하거나 복제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넘나들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예술적 호흡이다. 그의 작업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비추며 순환한다. 그 안에서 조형은 기억의 잔재로부터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전통은 낯선 미래의 감각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차원에서, 차안은 ‘전유로서의 생성’, 즉 ‘생성적 전유’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현실의 장이 된다.
III. 계반삽시 –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서의 혼융적 재전유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온고지신 – 고봉밥〉, 〈온고지신 – 깻잎〉, 〈온고지신 – 계반삽시〉라는 세 작품은 온고지신이 강조하는 ‘차안에서의 생성적 전유’라는 전략을 효율적으로 잘 드러낸다. 다만 생각해 볼 것은, 엄밀히 말해, 이러한 전유 전략은 전자의 두 작품의 해설에는 일정 부분 유효하지만, 후자의 작품 〈온고지신 – 계반삽시〉에는 완벽하게 해당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차안이 아닌 ‘차안과 피안의 경계’라는 공간 인식과 함께 또 다른 차원의 전유를 함유한다. 나아가 이 작품은 전자의 두 작품마저 아우르면서 전시 전체의 중심이 되는 주요한 작품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후자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 전체를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서의 혼융적 재전유(syncretic re-appropriation)’로 해설한다. 전유 아닌 재전유? 그것도 ‘생성적 전유’가 아닌 ‘혼융적 재전유’란 대체 무엇인가?
강용면의 기존 작업이 선보인 ‘생성적 전유’가 기존의 것을 가져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생성의 운동이라면, 그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혼융적 재전유’는 전유한 것을 또다시 전유함으로써 혼성의 경계에서 새 질서를 낳는 창조적 관계를 실천한다.
호미 바바(Homi K. Bhabha)는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 사상을 계승하되, 문화의 맥락으로 가져와 혼성성(hybridity)을 통해 ‘혼융적 재전유’를 실천한다. 이것은 기존의 지배적 언어와 제도를 전복하고 재해석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창조적 행위가 된다. 그것은 ‘서로를 구성하고, 서로의 공간과 존재를 침해하지 않으며 교류하는 관계’인 화엄 철학의 ‘상즉상입(相卽相入)’과도 연동된다. 여기서 재전유는 대립이 아닌 상생과 공생의 과정이 된다. 결국 ‘혼융적 재전유’는 차이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지속하고 서로가 공존, 공생하는 가능성이다.
강용면은 이번 전시에서 이전의 〈온고지신〉 연작에 등장했던 동식물 조각이나 고봉밥 형상을 혼성의 형식 속에 다시 등장시키고, 차안과 피안이 공존, 공생하는 ‘혼융적 재전유’를 선보인다.
세 작품 중에서 먼저,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한 설치 작품 〈온고지신 – 계반삽시〉을 보자. 여기서 계반삽시(啓飯揷匙)는 “전통 제사에서 밥뚜껑을 열고 밥 위에 숟가락을 수직으로 꽂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조상의 영혼이 음식을 드시도록 유도하는 상징적 제의 행위이며, 조상 영혼과 제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제사의 시작을 알리는 절차가 된다. 이 계반삽시는 젓가락을 꼬치에 꿰어 구운 고기 적(炙)이나 삶거나 찐 고기를 얇게 썬 ‘편(片)’ 위에 바르게 정위치로 올려놓는 절차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삽시정저(揷匙正著)라고 불리기도 한다.
계반삽시를 형상화한 강용면의 설치 작품에서 숟가락은 특별히 보이지 않지만, 고봉밥을 연상하게 하는 구체나 반구의 형상 위에 수평으로 바르게 올려놓은 젓가락 형상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이 설치 작품은 흰색의 바닥 일부에 그려진 붉은색 드로잉을 배경으로 붉은색이 칠해진 다양한 유형의 조각들이 산포(散布)하듯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바닥 중앙에는 커다란 고목이 마치 제단처럼 놓여 있고, 그 주위로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 끝에 페브릭으로 보이는 재료를 둘둘 감아 마치 나무나 숲처럼 표현한 조형물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바닥에는 몇 마리의 산양들과 함께 크고 작은 고봉밥들이 젓가락을 올려놓은 채 곳곳에 놓여 있는 풍경을 선보인다. 한쪽에 작은 크기의 기와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기도 한데, 이 작품이 현실의 풍경을 은유한 것임을 유추하게 만든다.
그런데 왜 붉은색인가? 실제로, 강용면은 고향인 김제 백산에서 어린 시절 늘 보았던 붉은 황토빛 야산의 이미지를 이 작품에 투영했다. 게다가 작품 속 붉은 산양들은 무분별한 산불로 개체수가 실제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 속 생명체들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반삽시의 제례는 실제 붉은색과 관련이 없지만, 그의 설치 작품에 칠해진 붉은색(생명의 기운)은 현실이라는 차안을, 그리고 작품이 설치된 바탕의 흰색(순수, 죽음)은 현실 너머라는 피안을 맞물리게 하는 ‘제례의 사건과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계반삽시는, 숟가락을 꽂는 ‘삽시’와 젓가락을 바르게 올리는 ‘정저’를 통해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사건임과 동시에 밥을 여는 ‘계반’을 통해 죽은 자를 맞이하는 의식을 개방하는 ‘개문(開門)의 과정’을 드러낸다. 즉 실제로는 차안에서 피안을 여는 사건이지만, 비유적으로는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오가는 과정인 셈이다. 또한 그것은 살아있는 자가 먼저 문을 열고 상징적으로 죽은 자를 ‘지금, 여기’로 초대하는 초월의 매개 행위이자, 죽은 자의 영혼과 제의에 참여한 산 자들에게 제사 음식을 나누는 ‘음복(飮福)’을 통해 ‘복의 나눔’을 실천하는 행위가 된다.
V. 에필로그
또 다른 작품들을 보자.
작품 〈온고지신 – 고봉밥〉은 색색의 고봉밥이 바닥에 무리 지어 놓여 있거나 드문드문 떨어진 채 놓여 있다. 몇 개의 고봉밥 위에는 ‘삽시정저’를 유추케 하는 젓가락 형상의 가느다란 막대 하나씩 수평으로 올려져 있다. 〈온고지신 – 깻잎〉은 또 어떠한가? 텃밭에 깻잎을 키워 내다 팔던 어머니의 힘겨운 모습을 지켜보던 작가의 가슴 아린 과거의 추억이 투영된 이 작품은 온통 푸르른 녹색투성이다. 깻잎을 형상화한 듯한 가느다랗고 높게 뻗은 식물 형상 아래 한 마리의 조랑말이 바닥의 풀을 뜯고 있고, 그 주변에는 크고 작은 고봉밥이 여러 개 놓여 있다. 몇 개의 고봉밥 위에는 젓가락으로 보이는 기다란 막대가 수평으로 올려져 있다.
〈온고지신 – 계반삽시〉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들에는 형식적으로 옛것과 새것, 자연과 인공, 동물과 식물이 맞물리고 내용상으로는 삶과 죽음의 시간이 그리고 차안과 피안의 공간이 맞물린 경계에서의 ‘혼융적 재전유’가 작동한다. 그것은 형식과 내용, 시간과 공간이 혼재된 생성적 공존, 즉 공생의 미학을 넉넉히 함유한다.
이렇듯, 한국 전통의 현대적 해석을 도모하는 강용면의 이번 전시는, 이전 작업이 그러했듯이, 온고지신이 함유한 ‘차안’에서의 생성적 전유를 선명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계반삽시에 나타난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서의 혼융적 재전유라는 독특한 미학의 차원을 드러낸다. 특히 붉은색이나 녹색과 같은 단일한 색상 혹은 오방색으로 각각의 설치 작품을 패턴화함으로써 특성화 전략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가히 전유에 더한 재전유를 통해, 창조적 관계를 모색하는 그만의 새로운 조형 실험이라고 할 만하다. (20251013)
출전/
김성호, 「재전유의 미학 - 온고지신과 계반삽시」, 『강용면』, 전시 리플렛, 2025
(강용면 개인전, 2025.10.23.~11.02,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