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불씨 - 불의 기억을 ‘기계 생명체’로 전유하는 상상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설치미술가 김진우가 개인전을 갖는 곳은 산업 현장이었던 유휴 공간이다. 2012년까지 국내에서 마지막 성냥공장으로 남았던 경상북도 소재 ‘의성 성광성냥공업사(의성성냥공장)’이 그곳이다. 그는 왜 이곳에 들어가 전시를 선보였을까? ‘진화의 불씨’라는 의미심장한 주제를 내세운 이번 개인전에서 그가 선보인 작품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리고 전시를 통해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그 미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I. 불의 기억을 품은 역사 앞에서 - 성냥나무 
관객은 전시장 초입에서 잿빛으로 남은 의성성냥공장의 퇴락한 건물들을 맞닥뜨린다. 이곳은 1954년 설립한 이래 2012년에 폐쇄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까지 의성 마을 주민들의 생계를 담당했던 주요한 산업 현장이었다. 이곳은 한때 하루에 성냥 만오천갑을 생산하고, 성냥개비 만드는 공장 직원만 162명에 달할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한 까닭에, 의성 주민들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해서 주변 지역 주민들을 실어 나르는 통근 버스를 운행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가늠해 볼 만핟. 국내 성냥공장 중 당시 부산에 자리했던 ‘유엔(UN)성냥’(1947-1997)과 함께 일등 품질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폐업 이후 2013년 경상북도 산업유산으로 지정된 뒤, 2018년 마을미술프로젝트 등을 거쳐 현재는 2027년 완공을 목표로 ‘의성성냥공장 문화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다. 의성군은 현재의 건물들을 모두 허물고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을 건립하여 운영할 계획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2025년 이곳에서 열리는 김진우의 개인전은 ‘불의 기억을 품은 역사’ 앞에서 그리고 ‘유휴 공간의 문화재생’의 이전과 이후의 교차점에서 ‘새로운 점화(點火)’의 사건을 펼치는 프롤로그 전시이자 문화재생 프로젝트의 서막이라고 평할 만하다.  
여기서 ‘불의 기억’이라니? 그것은 의성성냥공장이 불로 상징되는 ‘성냥’을 생산하던 당시의 치열했던 노동과 삶의 시간이 맞물린 기억으로 표상된다.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에 따르면, ‘불의 기억’이란 불이라는 사실 혹은 실제에 관한 기억이 아니라, 불이 불러내는 ‘몽상(la rêverie)’과 맞물리는 원초적 이미지와 관계하는 기억이다. 그는 불을 과학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간주하기보다 인간의 심층 경험, 예를 들어 금기, 욕망, 안온함, 두려움과 같은 것이 응축된 ‘물질적 상상력’의 핵심 매질로 바라본다. 그의 입을 빌려 말하면, ‘불 앞에서의 의식적 몽상(rêverie devant le feu)’이라고나 할까?  
김진우의 작업에서도 다를 바 없다. 작품 〈성냥나무〉를 보자. 이 작품에서, 58년의 세월 동안 살아 꿈틀거렸던 의성성냥공장이라는 장소성과 더불어 그것이 맥락화된 다양한 상황을 횡단했던 다양한 주체들의 기억이 소환된다. 작가는 공장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정면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기존의 주 건물의 외벽을 노란색의 페인트로 옷을 입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시켰다. 그리고 천장을 뚫고 자란 18미터 높이의 거대한 성냥나무를 새롭게 설치하고 이곳에도 노란색의 페인트로 단장했다. 
뜬금없이 노란색 건물로의 변신이라니? 무슨 의미인가? ‘발견된 오브제(공장 건물)’와 ‘만들어진 오브제(성냥나무 조각)’를 한 덩어리의 작품으로 견인하는 이것은 ‘이미 거기 있었던 기억의 역사’를 뿌리와 줄기로 삼아 ‘새로 만들어진 상상의 공간’이 무엇인지에 관해 성찰할 것을 관객에게 요청한다. 거무튀튀한 세월의 때를 먹은 슬레이트 지붕을, 그 사이에 ‘매개 공간’으로 남겨둔 이 작업은 역사라는 팩트와 상상이라는 픽션 사이에서 불꽃을 튀기는 ‘새로운 점화(點火)’의 사건을 만든다. 이러한 차원에서 김진우의 이 작업은 불의 기억을 품은 역사 앞에서, 그리고 그 역사를 자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난 의미심장한 ‘상상 모뉴먼트’라고 할 만하다. 



II. 불의 미래를 향한 상상 - 의성탐사선 
다른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 〈성냥나무〉가 기존에 있던 것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불의 기억이라는 과거의 역사적 맥락을 현재로 길어 올린 것이라면, 작품 〈의성탐사선〉은 새로 만든 창작을 통해 미래를 향한 상상을 현재진행형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즉 ‘불의 기억을 간직한 미래형 상상 비행체’를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달리 말해 미래에 대한 상상이 ‘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장치라고나 할까?  
블로흐(Ernst Bloch)는 미래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전조처럼 먼저 비치며, 사람들의 행위, 감각, 상상 속에서 이미 작동하는 시간성으로 보았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미래란 ‘아직-아님(noch-nicht)’과 ‘예시 또는 전조(Vorschein)’가 현재형으로 작동하는 시간이다. 이 두 개념은 현재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힘이다. 생각해 보라! 작품 〈성냥나무〉가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고 호출하는 아카이브라면, 〈의성탐사선〉은 앞으로의 변화를 전제한 실험용 프로토타입(prototype)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여기서 프로토타입은 단지 ‘완성 이전의 미완성품’이 아니라, 미래의 상상이 ‘지금, 여기’의 의성성냥공장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장치가 된다.
그렇다면 김진우의 〈의성탐사선〉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상인가? 
먼저 이 상상의 탐사선은 마치 의성성냥공장에 배속된 ‘사이보그 비행체’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의성성냥공장 안팎에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협으로부터 공장을 보호하는 경계형 탐사선이거나, 또 어떻게 보면 이것은 주변의 역사적 맥락을 두루 탐색하는 정찰형 탐사선일 수도 있겠다. 피상적으로 이 작품은 하얀 몸체의 우주선 같은 형상을 띄고 있다. 거대한 몸체의 하중을 견디는 다섯 개의 다리 형상으로 된 튼튼한 받침대를 지지체로 삼아 수직 모뉴먼트로 우뚝 선 이 상상의 탐사선은, 의성성냥공장 주변으로 이제 막 탐사여행을 떠나려는 듯 보인다. 이 육중한 탐사선의 원기둥형 몸체 표면에는 여러 성냥개비 형상이 투과체로 새겨져 있을 뿐 아니라, 상단에는 태양광 패널과 움직이는 프로펠러를 장착하고 하단에는 LED 조명을 통해 ‘붉은 불’을 품은 엔진 마운트(engine mount)의 추력 구조를 단 것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이 기묘한 기계 작품은 ‘불’이 변형되어 지속되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깜빡이는 LED 조명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불로 상징된 붉은 조명등은 산업과 생명,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불씨 속에서 여전히 타오르는 인간의 창조적 에너지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사라진 산업의 흔적을 탐사하는 상징적 장치이자, ‘불씨의 진화’를 가시화한 설치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어떠한 진화? 낮이나 밤에도 선명하게 잘 보이는 〈의성탐사선〉의 ‘붉은 불’은 이 장소가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신호처럼 해설된다. 성냥이 불을 붙여 문명의 일상을 지속하게 했듯이, 불로 상징되는 이 붉은 조명은 의성성냥공장이 다시 작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점화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불은 기억이 건져 올리는 새로운 서사로 진화되어 나갈 수 있음을 알리는 전조가 된다. 
‘아직-아님’과 ‘전조’가 언제나 현재형으로 작동한다고 블로흐가 그랬던가? 재기발랄한 상상이 가득 담긴 이 탐사선은 어떻게 본다면, 복합문화공간으로의 예술적 재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의성성냥공장의 진화적 미래를 예감하는 전조가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떤가? 이 작품은 작위적인 조형의 제스처가 일부 담겨 있기도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발판으로 삼아,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현재의 감각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지 않은가? 이 탐사선은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밀어 올리며 현재를 다시 구성하는 순간을 관객이 마주하게 하는 하나의 메인 상징처럼 자리한다. 



III. 진화를 전유하는 기계 생명체 – 숨쉬는 기계 
김진우의 또 다른 작품 〈숨쉬는 기계〉를 보자. 이 작품은 성냥공장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오래된 기계를 재작동하게 수리하고 새로 만든 꽃 형상의 철조 구조물을 여기에 연결한 작품이다. 달리 말해 멈춰 있던 산업 장치를 마치 새로운 생명체로 살아난 것처럼 움직이게 만든 키네틱 설치라고 하겠다. LED와 센서를 더한 이 작품은 한 점의 낡은 오브제로 남기보다 공장 내부의 시간과 신체 감각을 결합하여 재탄생시킨 하나의 ‘기계적 생명체’로 자리한다. 특히 이 작품이 선택한 재료가 ‘성냥공장기계’라는 점은 매우 유의미하다. 여기서 기계는 단순한 레디메이드가 아니라, 한 장소의 노동과 시간, 열과 마모가 축적된 산업의 기억 저장소이며, 동시에 그 기억을 다시 호출할 수 있는 행위 주체가 된다. 
이 작품에서 ‘숨쉬는’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은유에 그치지 않는다. 센서에 의해 촉발되는 움직임은 관객의 접근, 공간의 변화에 반응하며, 기계가 마치 환경과 교신하듯 작은 기계음과 함께 움직임의 리듬을 만드는 까닭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인간-공간-기계’가 함께 만들어내는 관계적 생리학에 가까운 키네틱 아트라고 하겠다. 
프랑스 철학자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연결망(Actor-Network) 관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의 주체는 작가나 관객 어느 한쪽에 고정되지 않는다. 즉 성냥공장 기계, 철 구조물, 센서, LED, 관객의 몸, 공기 흐름과 소리, 그리고 공장의 기억이 한데 얽혀 예술 창작의 사건을 구성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여기서 ‘숨 또는 호흡’은 생명체의 고유한 속성이기도 하지만, 이 이론에서는 네트워크가 잠정적으로 성립할 때 발생하는 상태이자, 곧 ‘살아 있음’의 징후로 해설된다. 
우리는 김진우의 기계 생명체를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진화’ 서사의 전유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생물학적 입장에서 ‘진화’는 자연 선택과 적응의 서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서사를 산업 유산의 내부로 끌고 들어와 다른 방식으로 재가공한다. 여기서 진화는 더 이상 종(種)의 개선이나 직선적 진보의 개념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폐기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변형의 가능성 역시 포함된다. 그의 기계 생명체에는 기능의 전환? 의미의 전이? 감각의 재배치 같은 것들이 쉼 없이 횡단한다. ‘고장 난 기계 → 수리 → 재가동’이라는 뻔한 서사는 단순한 복원의 서사가 아니라, 공장 기계가 예술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이라는 의미를 부여 받는다. 그뿐인가? 이 서사는 기계가 ‘산업 장치’에서 ‘감각 장치’로 변이하는 과정을 창출하기도 한다. 결국 이 작품 안에서 작동하는 진화의 방식은 바로 이러한 변이의 논리와 맞물린다.
미국의 페미니즘 이론가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적 상상력을 빌리면, 김진우의 〈숨쉬는 기계〉는 자연/기계, 생명/비생명, 과거/미래 같은 이분법을 교란하는 혼성체가 된다. 해러웨이의 철학적 상상에 빙의해 보면, 성냥공장 기계는 더 이상 과거의 잔재로 머물지 않고, 작가 김진우가 구사하는 현대적 기술과 접합되어 새로운 몸을 얻는 까닭이다. 그 접합은 생명과 기계가 서로의 경계를 침식하며 새로운 종(種)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이 기계는 ‘살아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움직임과 공간의 변화에 반응하면서 살아 있음의 방식을 학습한다. 공장이 멈춘 자리에서 기계가 호흡을 되찾는 장면은, 생명이 자연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사실, 즉 ‘생명이란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또렷이 드러낸다.
또한 이 작품에서 ‘숨 또는 호흡’은 시간에 관한 우리의 감각마저 바꾼다. 산업의 시간은 생산량과 효율, 반복과 규율의 리듬으로 측정되곤 했지만, 여기에서 기계가 만들어내는 소음과 동적 리듬은 관객과의 시간 속에서 훨씬 느슨하고 다층적인 체험의 시간성을 구성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시간과 함께 호흡하면서, 과거의 기계적 리듬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그것을 느슨하게 혹은 느릿하게 변형한다. 이 변형된 리듬 속에서 관객은 공장을 ‘기억의 장소’로만 인식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다시 감각되는 현재의 생태로 경험하게 된다. 그야말로 특정 산업 유산이 박제된 전시물이 되는 대신, 감각을 매개로 죽음으로부터 몸을 훌훌 털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이 작품이 ‘진화를 전유’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산업의 종말 이후’에 가능한 새로운 생존 양식, 다시 말해 유휴 공간의 다음 단계가 무엇이 되면 좋을지를 우리에게 질문한다. 공장은 더 이상 성냥을 생산하지 않지만, 이 작품은 공장이 다른 것을 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리와 빛, 움직임과 반응, 그리고 관객의 몸을 생산하는 공장, 감각과 관계를 생산하는 공장처럼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과거의 기능을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과거의 기능을 발판 삼아 새로운 기능을 발명하는 작업이라고 평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바로 그 발명 속에서 ‘진화’의 서사는 미학적으로 재가동된다.
결국 김진우의 〈숨쉬는 기계〉는 멈춘 산업의 심장에 다시 호흡을 불어넣는 키네틱 설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래된 성냥기계를 수리하고 작동시켜 기계가 생명처럼 움직이도록 만드는 데서 출발하는 ‘숨... 쉬는... 기계...’
그의 〈숨쉬는 기계〉가 들숨과 날숨을 교차하는 그 ‘호흡’은 단순한 향수나 복원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작품은 진화를 생물학의 전유물로 남겨두지 않고, 산업 유산과 예술적 기술, 관객의 감각과 공간의 조건이 서로 얽히는 자리에서 새로운 기계-생명체의 탄생을 유쾌하게 제안한다. 공장의 기억을 먹고 자랐던 기계에서 전환한 그의 기계-생명체는 현재의 예술 사건 속에서 이러한 진화를 거듭한다.



IV. 에필로그 
글을 마치자. 그 전에 나머지 두 작품을 살펴보자. 
김진우의 또 다른 작품 〈진화의 불씨〉는 애초에 없던 계획이 기획으로 실현된 것이다. 즉 의성성냥공장의 오래된 기계 부품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사유하다가, 즉흥적인 영감에 사로잡혀 시작된 작업이다. 이 작품은 마치 성냥개비에 두약을 묻히는 것처럼, 〈성냥나무〉 작품에 사용하고 남은 노란 페인트로 공장에 버려진 오브제들의 밑단을 하나씩 적셔낸 작품이다. 기어, 망치, 낫, 톱, 드릴, 체인처럼 최소 30–40년의 시간을 간직한 채 버려진 오브제들은 본래의 용도를 잃은 채 남아 있었지만, 작가는 그것들의 밑 부분을 노란색으로 적셔낸다. 산업의 잿빛 잔향 위에 새로운 감각을 덧칠한 그의 노란색은 ‘진화의 불씨’라는 하나의 표식이자 상징이다. 이 작품은 과거의 노동 시간과 기억을 불러와 일련의 상징적 표식을 남김으로써 기억의 표본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그 표본을 미래를 향한 ‘진화의 불씨’로 열어둔다. 그렇다. 그 표식(들)은 아카이브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진화의 불씨’가 된다.  
 한편 〈드로잉 & 설계도면〉 연작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상상의 나래와 사유의 흔적을 기록한 초벌형 작품이자, 아카이브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잉크, 수묵. 마커와 같은 다양한 재료와 더불어 CAD 도면이 어우러진 이 ‘연작 아닌 연작’은 〈성냥나무〉, 〈의성탐사선〉, 〈숨쉬는 기계〉로 이어지는 작가만의 상상 흔적을 간직하고 드러내고, 〈진화의 불씨〉에 이르게 된 상상과 사유의 기원으로 짐작하게 만든다. 여기서 드로잉은 단순한 스케치로 머물기보다는, 어찌 보면 작품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작동하는 예감의 아카이브이자, 아직 오지 않은 형태들을 ‘가능성’으로 저장하는 전조의 저장고다. 달리 말해 이 도면들은 완성된 오브제를 설명하기보다, 김진우의 예술 세계가 스스로 증식하는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또 다른 불씨’인 셈이다. 
마지막에 남는 결론은 분명하다. 이 모든 불씨—기억의 보존도, 미래의 예감도—는 결국 그의 상상이 만들어낸다는 사실 말이다. ‘불의 기억’은 그의 작품 속에서 ‘기계 생명체’의 언어로 전유되고, 그 전유의 핵심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미래를 믿게 하는’ 상상의 힘이다. 그 상상은 공장이 멈춘 자리에 새로운 예술적 재생을 꾀하면서, 사라진 산업의 시간을 감각의 시간으로 되돌린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진화’란 거창한 진보의 서사가 아니라, 잔해를 다시 연결해 다음의 가능성을 발화하는 ‘불씨의 점화 과정’이다. 관객은 그 불씨 앞에서, 불의 기억이 켜켜이 축적된 과거를 기억하고 소환하면서도 미래의 모습을 작가와 함께 그리는 상상의 동반 여행자가 된다. (20251227) 


출전/
김성호, 「진화의 불씨 - 불의 기억을 ‘기계 생명체’로 전유하는 상상」, 『김진우』, 전시 카탈로그, 2025
(김진우 개인전-진화의 불씨, 2025. 11. 18~1. 10, 의성성냥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