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시적 존재’로 탐구하는 공생과 순환의 조형 실험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이 글은, 창작 집단 ‘프로젝트 에이(Project A)’가 선보이는 전시 《아무 데도, 어디에나(Of That Which Dwells Unseen)》를 비평적으로 분석하고 해설한다.
먼저 전시 제목이 선보이는 지독한 역설은 무엇인가? 기획자 황지희는 그것을 “아무 데도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로 부연 설명한다. “보이지 않는 채로 있는 것에 대하여”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에 대하여”로 해석되는 이 영문 제명은 분명히 있는 것이지만, 대상화되지 않은 무엇의 존재론적 차원을 말하는 것처럼 읽힌다. 이 전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선보이고 무슨 메시지를 품어 안는가? 자세히 살펴보자.
I. 균사체 소재를 통해 제기하는 존재의 문제의식
프로젝트 A의 이번 전시 기획서에는 전시명 ‘아무 데도, 어디에나’ 앞에 ‘공생과 순환에 대한 실험’이라는 텍스트를 전제하고 있다. 이 전시는 기획자가 설명하고 있듯이, “버섯 균사체(mycelium)를 활용한 신소재를 개발하는 기업 (주)‘마이셀’과 시각 예술가 3인(김시온, 김현주, 황지희)의 협업을 통해, 판매를 목적으로 한 ‘상품’이 아닌 열린 실험으로서의 ‘예술’을 통해 균사체가 지닌 공생(Symbiosis)과 순환(Circulation)의 가치’를 탐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다. 풀어 말하면, 민간기업의 기술적 결과물, 즉 ‘균사체의 성장 원리를 그대로 설계에 편입한 재료’인 ‘균사체 소재(mycelium materials)’를 예술 재료로 지원받아, 3인의 예술가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자 조형 실험을 시도한 결과물을 한자리에서 선보이는 전시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시각화해 선보인 ‘균사체’가 지닌 공생과 순환의 가치는 무엇인가. 먼저 공생부터 살펴보자. 균사체(mycelium)는 균류의 균사(hyphae)가 실처럼 자라 서로 얽히며 만들어내는 영양생장의 몸체다. 우리가 흔히 ‘버섯’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몸체가 조건을 만나 잠깐 밖으로 내미는 자실체에 가깝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은 결과이고, 실제로 세계를 붙들고 있는 것은 대개 보이지 않는 그물망이다. 균사체의 공생은 이 지점에서 명쾌해진다. 균류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니 스스로 탄소원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많은 경우 식물 뿌리와 결합해 균근(mycorrhiza) 관계를 맺는다. 식물은 당류 같은 탄소원을 내주고, 균류는 토양에서 끌어온 인, 질소, 미량원소와 물을 더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않는가?
여기에는 중심도 주체도 없이, 서로의 결핍을 서로의 존재로 메우는 방식. 즉 균사체가 드러내는 ‘비위계성의 공생’이 점유한다. 이것은 애초에 생존이란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수평적 관계 속 교환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따라서 이 전시는 보이지 않지만, 주요한 매개 존재인 균사체의 공생에 관해 성찰하게 만든다.
이 전시에서 ‘순환’은 또 어떠한가? 균사체는 토양 속에서 효소를 분비해 낙엽과 목질 같은 유기물을 분해하고, 그 과정에서 생태계의 탄소와 무기질 영양분을 다시 흐르게 만든다. 말하자면 균류는 자연의 ‘청소부’가 아니라, 죽은 것을 다음 생의 조건으로 바꾸는 전환 장치다. 인간의 언어에서 ‘폐기물’은 끝이지만, 균사체의 작동에서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재료다. 여기서 균사체가 드러내는 순환의 가치는 분명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제로 세계를 계속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뇌게 하는 것이다.
이번 기획은 ‘균사체’를 단순히 조형적으로 소비하려는데 있지 않다. 협업 기업 마이셀은 균사체로 산업재료를 개발하지만, 기획자와 참여 작가들은 그 재료를 ‘제품’의 자리에서 끌어내 예술적 사용으로 전환하면서, 산업이 표준화해 놓은 물성을 예술이 어떻게 흔들고 재해석할 수 있는지 묻는다.
작가들은, 단단함과 영속성을 약속하기보다, 조건에 따라 변하고 결국 분해, 소멸할 수 있는 유기적 물질인 균사체를 재료로 삼아, 관계 속에서 지속되는 순환의 질서를 더듬는다. 각 작가는 생성-변형-약화-소멸로 이어지는 과정 자체를 공유하며, 예술과 상품, 재료와 생명, 생산과 폐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사유한다. 결국 이 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인류가 계속 무엇인가 만들고 소비할 때, 어떤 물질로, 어떤 책임으로, 어떤 관계를 남기며 지구 위에서 살아갈 것인가?
II. 전시 공간 ‘가능성’에서 자라는 작품
이번 전시 공간인 ‘가능성’은 단순한 대안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참여 작가 김시온의 할머니가 실제로 살던 주택이었다. 한동안 비어 있던 생활의 자리에 들어선 예술! 더구나 전시 준비 중 할머니의 죽음이 겹치면서, 이 공간은 ‘전시를 위한 장소’라는 정체성 위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을 포개어 놓는다. 이 현장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화이트큐브의 거리감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이 남긴 온도, 생활의 흔적, 비어 있음, 기억의 공유와 같은 것이다.
할머니의 부재는 공간을 단지 비워놓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주거가 전시로 바뀌는 순간을 애도의 시간과 접속시키며, 공간을 ‘소유’나 ‘기능’이 아니라 관계의 맥락으로 읽게 만든다. 집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사적 영역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발걸음이 드나드는 공적 장소가 되고, 그 과정에서 사적인 기억은 전시의 맥락 속에서 희뿌옇게 혹은 조심스럽게 재배치된다. 즉 ‘가능성’은 전시를 위한 대안공간이면서도, 개인의 역사와 공동의 경험이 맞닿는 전환의 장치가 되는 셈이다. 이는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말한 ‘공간 생산’의 의미, 즉, 공간이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관계와 실천이 만들어내는 산물이라는 해설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시 말해 주거의 공간이 전시의 장으로 ‘전환’되는 순간, 장소는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삶, 노동, 돌봄, 상실이 중첩된 관계의 구성물로 재조직된다. 따라서 ‘가능성’은 이번 전시에서, ‘생산된 공간’, 혹은 ‘사적 기억과 공적 시선이 교차하는 장’으로 재정의된다.
특히 이 전시는 균사체라는 재료가 지닌 유기적 시간성과 공간의 사건성이 겹치면서, 더 명료해진다. 균사체가 품은 함의는 생성과 분해, 표면과 지층, 보이는 결과와 보이지 않는 과정의 관계다. ‘가능성’ 또한 비슷한 논리로 작동한다. 피상적으로는 ‘비어 있는 집’이지만, 실제로는 삶이 켜켜이 쌓인 지층이며, 죽음 이후에도 관계가 계속 재조직되는 장소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의 전시는 작품을 ‘걸어두는’ 행위가 아니라, 장소가 이미 갖고 있던 시간(조모의 살아온 시간과 떠난 시간)에 작품의 시간을 포개는 일이 된다.
누군가가 살던 집이 전시가 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무엇이 공간을 공간답게 하는가? 벽과 바닥이 아니라, 그 안을 지나간 관계와 돌봄과 부재가 아닌가? ‘가능성’은 바로 그 질문을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던지는 공간이며, 이번 전시의 주제인, 공생과 순환을 장소 자체가 증언하도록 만드는 유효한 장치가 된다.
그렇다면 기획자와 참여 작가들은 어떤 전시를 구체적으로 선보이려 했는가? 기획서를 살펴보면, 이번 전시는 ‘균사체를 소재로 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균사체가 작품을 흔들어 놓는 방식—재료가 자라고, 굳고, 퇴화하고, 분해되는 시간—을 전시장에 선보이는 구상에 가깝다. 따라서 전시는 완성품을 걸어두는 자리라기보다, 물질의 생애주기를 관객 앞에 펼쳐 보이는 ‘살아 있는 실험실’이라고 할 만하다.
재료와 형식은 대략 다섯 축으로 계획되었다. 균사체 기반 가죽은 설치 오브제, 입체 패널로, 그리고 표면 위에 식물 색소를 올린 실크스크린 드로잉의 지지체로 활용된다. 또한 톱밥과 균사체로 만든 마이코 블록(myco block)은 담장, 벽 같은 구조물과 비정형 부조 실험을 통해 조형과 건축의 경계를 실험하는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울러 캐스트/몰드는 ‘깎는 조각’ 대신 ‘배양해 자라게 하는 조형’을 제안한다. 또한 패널/종이 대체재는 회화 지지체를 넘어 반투명 조명, 소리 흡수, 향 확산 등 감각 환경의 재료로 확장되기도 한다.
실제 전시에서는 이러한 야심찬 기획이, 작업 과정과 현장 여건에 따라 일부 조정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기획의 핵심은 분명하다. 균사체를 ‘소재’로 쓰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생장, 건조, 분해와 같은 생물학적 주기를 작품 내부에 들여와 변화 자체를 전시의 내용으로 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즉 이 기획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환경 반응성’과 ‘과정 중심성’이라고 할 만하다.
한편, 이 기획에서 무엇보다 선명한 지점은 ‘전시 이후’다. 작품의 철수가 곧 폐기가 아니라 해체, 퇴비화와 같은 지역 공동체 기증으로 이어지며, 순환을 전시 바깥에서 완결하려 한 것이 그렇다. 이 글은 그것이 얼마나 계획대로 성취되었는지는 논외로 한다. 다만, 참여 작가들이 균사체를 통해 ‘원본성, 기념성, 소장성’과 같은 예술의 오래된 관성에 대항하는 기획 지향점에 집중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엇인가 남기기 위해 만드는 일에 골몰하지 않고, 공생과 순환을 위한 조형적 성찰과 반성에 무심하게 나서는 일이 무엇보다 주요한 까닭이다.
세 작가는 ‘균사체’를 단순히 친환경 소재로 간주하는데 머물지 않고, 산업과 제도 그리고 감각의 질서를 어떻게 조용히 침식하고 재배치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탐구해 나간다. 이들에게 균사체는 재료라기보다 시간의 매질인 까닭이다. 작가들은 자라며 변화하고, 덮고 지우고, 결국 사라지는 물질인 균사체의 조형 실험을 통해, ‘사라짐과 그 뒤에 남는 생성의 가치’를 지속해서 탐구해 나간다.
III. 김시온 – 소멸과 순환의 물질을 현재에 소환하는 애도
김시온은 이번 전시에서 〈어쩌면 그토록 기다렸을지도 모르는 시간〉(2025)과 〈불가능한 복원〉(2025)이라는 두 작품을 선보인다. 그가 붙잡는 것은 ‘되돌릴 수 없다’고 여겨지는 조건들—흘러가버린 시간, 폐기, 소외—이지만, 그 문제의식은 거시적 선언으로 나가기보다 한 가족의 돌봄과 상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을 보내는 구체적인 감각으로 드러난다. 두 작업은 모두 균사체라는 재료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친환경’의 매체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균사체가 가진 유기적 변형(수축·변형·냄새·열 반응)과 불완전한 복제 능력을 통해, 할머니의 죽음 이후 남겨진 기억이 어떻게 현재에 “되돌아오되, 결코 복원되지는 않는가”를 집요하게 드러낸다.
먼저 〈어쩌면 그토록 기다렸을지도 모르는 시간〉에서 균사체는 프레스 과정에서 잘려 나간 자투리로서, 만든 인형을 통해서 할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애도의 시간을 소환한다. 잉여의 재료로 만들어진 이것은 외형적으로는 ‘죽은 존재’이지만, 내재적으로는 유기물로서 여전히 수축하고 변형하고 부패하면서 ‘삶을 지속하는 존재’다. 내부의 백열전구가 방출하는 열은 균사 가죽 냄새를 증폭시키고, 모터에 의해 꿈틀대는 인형은 전시장을 감각의 사건으로 가득 채운다. 르페브르의 관점에서 말하면, 여기서 전시장은 ‘무대’가 아니라 냄새, 열, 움직임, 신체 반응이 뒤섞여 관계적 생산을 도모하는 공간이며, 기억은 그 생산된 공간의 감각적 실천 속에서 다시 ‘현재화’된다. 여기서 ‘기다렸을지도 모르는 시간’은 남겨진 자의 감상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할머니가 견뎌야 했을—혹은 어쩌면 기다렸을—소멸의 시간이 손자의 현재로 역류해 오는 방식이다. 사라져 가는 물질이 오히려 사라진 시간을 돌려세우는 것, 이것이 그의 작업이 선보이는 순환의 세계다. 즉 소멸은 종결이라기보다, 관계적 공간이 새로 조직되는 방식(재료-장치-관객의 감각 결속)을 통해 지속의 조건을 성취한다.
또 다른 작품, 〈불가능한 복원〉에서 균사체는 소반과 식기의 표면을 떠내는 캐스팅 재료로 등장하지만, 그 핵심은 ‘복원’이 아니라 복원의 실패에 있다. 균사 섬유는 건조 과정에서 표면을 유지하는 성질을 보이면서도, 수축과 약한 경도로 인해 완전한 재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어긋남은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 할머니와 나누었던 식사의 시간이 더 이상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은유한다. 즉 두 번째 작업의 순환은 ‘원형의 재현’이 아니라, 복원 불가능의 형태를 통해 관객이 반복적으로 현재에서 과거를 더듬게 만드는 되돌아옴이다. 캐스팅된 소반 형상 위를 비추는 잔잔한 조도의 조명등은 이러한 상황을 극대화한다.
그의 작업에서 ‘사라짐’은 곧바로 소멸 혹은 종결이 아니다. 균사체는 부패하고 수축하고 변형되는 재료이지만, 그 불안정성이야말로 기억을 다시 순환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즉 작가는 균사체를 통해 ‘오래 남는 것’을 만들기보다, 사라짐을 전제한 채로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감각—냄새, 열, 표면의 균열—이 현재로 되돌아오는 방식을 조직한다. 여기서 ‘순환’은, 소멸의 물질이 서로 다른 감각의 경로로 현재를 다시 열어젖히는 것과 관계한다.
소멸의 물질이 역설적으로 잉태한 순환의 효과는 두 작품이 선택한 매개 방식의 차이 속에서 구체화된다. 하나는 열, 냄새, 운동을 통해 기억을 과잉의 감각으로 되돌리고, 다른 하나는 수축과 균열을 통해 기억을 결핍의 형태로 남긴다. 하지만 이 상반된 작동은 서로를 지우지 않고, 오히려 같은 결론으로 수렴한다. 즉 균사체는 공통적으로 ‘영원한 보존’의 환상을 거부하는 재료이며, 바로 그 거부 덕분에 기억은 박제되지 않고 현재 속에서 계속 순환한다. 그가 증명하는 ‘지속’은 오래 버티는 물질의 시간이 아니라, 소멸을 전제한 채 되돌아오는 감각과 불완전한 형상이 만들어내는 애도의 시간과 관계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애도는 개인의 내면에 갇히지 않고, 관계와 실천이 생산해내는 공간 속에서—다시 말해 ‘가능성’이라는 장소가 열어젖힌 조건 속에서—지속해서 새롭게 구성된다.
IV. 김현주 – 공존, 공생의 균사체가 은유하는 공동체의 삶
김현주는 균사체 배지, 모니터, 천 위에 금사 바느질과 같은 멀티미디어로 된 설치 작품 〈뷰루루–큐루루–후루루르〉(2025)를 선보인다. 이 작업은 균사체를 ‘새로운 재료의 조형적 가능성’으로 탐구하기보다, 균사체가 지닌 사회학적 존재론—홀로가 아니라 연결로 존재하고, 집단적 리듬으로 살아가며, 공동체가 몸으로 기억해온 움직임을 매질화하는 존재 방식—을 전면에 배치한다. 작품은 오키나와의 방언(류큐어)과 노래가 전후 미군 점령과 국가의 언어 정책 속에서 공적 발화로부터 배제되어온 역사적 조건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김현주의 작업에서 언어는 의사소통 수단이기보다, 몸과 땅, 공동체의 기억이 축적된 리듬으로 재정의된다. 이러한 시도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언급했던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과 연동한다. 즉 언어는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가 아니라, 반복되는 발화, 몸의 제스처, 리듬을 통해 공동체의 ‘우리’를 성립시키는 행위이자, 금지와 배제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 사용을 통해 존재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수행성의 행위인 셈이다.
‘부드러운 침투’라는 전시 맥락에 비추어 보면, 김현주의 작업은 침투를 공격적 점유가 아니라 도달과 스밈의 반복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제목 ‘뷰루루–큐루루–후루루르’가 오키나와 방언으로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라는 점은 결정적이다. 먼 바다에서 시작된 파도가 끊임없이 ‘지금, 여기’로 도달하듯,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감각과 기억이 여전히 현재와 맞닿아 있다는 암시가 작품의 시간 구조를 형성하는 까닭이다. 즉 이 작업의 정치성은 “잃어버린 것을 복원한다”는 선언이 아니라, 사라진 것으로 취급된 것들이 끝내 현재에 도착해 버리는 방식—부드럽지만 끈질긴 침투—을 감각적으로 구성하는 데서 나온다.
이때 균사체는 조형적 소재가 아니라, 관계의 존재론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작가는 “균사체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연결되고 확장되며 살아간다”고 말하며, 균사체를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군상이며, 공동체의 몸”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균사체는 ‘자연의 형상’이 아니라 집단적 생존을 은유한다. 존재는 단일한 개체의 내부에 있지 않고, 연결, 확장, 증식이라는 관계망 속에서 성립한다. 그런 점에서 균사체는 단순히 ‘유기물’이 아니라, 언어가 사라져가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도 공동체가 어떻게 지속되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적 모델로 은유된다. 그래서일까? 균사체를 배지 형태로 바닥에 배치하는 행위는, 시각적으로 새로운 조형을 발명하기보다 ‘지하의 네트워크’라는 상상력을 통해 공동체의 몸을 다시 접속시키는 제스처가 된다.
작품의 다른 축인 금사 바느질 또한, 장식적 공예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 방식의 수행이다. 흰 천 위에 금사로 바느질된 류큐어의 구전 노래는, 말이 더 이상 공적 언어로 발화되지 못해온 역사 속에서, 잊혀가는 언어를 “정박시키는 느린 몸의 수행”으로 제시된다. 그녀의 작품에서 말은 텍스트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바느질이라는 신체 리듬을 통해 다시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얻는다. 이 느림은 낭만적 정서가 아니라, 국가, 제도, 군사적 긴장 같은 거대한 시스템의 속도에 맞서 언어가 생존하기 위한 최소 조건—몸의 속도로 다시 말해지는 조건—이다.
이렇게 볼 때 〈뷰루루–큐루루–후루루르〉는 균사체의 조형 실험이 아니라, 언어, 몸, 공동체가 맺는 관계를 물질과 리듬으로 재배치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가 말하듯, 이 작품은 “하나의 주문”이다. 바느질로 언어를 정박시키고, 균사체의 생명성과 파도의 리듬으로 공동체의 지속을 기원하는 주문—소멸을 향해 밀려온 역사 속에서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던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길 바라는 기원—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부드러운 침투’는 미학적 형용사가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이 된다. 침투는 어떤 대상에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 연결된 몸들이 기억해온 리듬이 파도처럼 반복되어 도착하며, 사라짐 속에서도 공동체가 다시 살아나도록 조건을 바꾸는 스밈과 같은 것이다. 김현주의 균사체는 그러한 스밈의 물질이며, 따라서 이 작업의 미학은 형태의 새로움이 아니라 관계가 지속되는 방식—연결, 확장, 공존—을 감각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학적 존재론의 미학에 놓인다. 그것은 생물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함께-되기(becoming-with)’를 경유한다. 여기서 ‘함께-되기’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관계 속에서 함께 구성되는 공생의 방식 자체를 뜻한다. 균사체의 네트워크는 바로 그 ‘함께-되기’의 물질적 은유로서, 공동체가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계속 만들어지는 과정임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V. 황지희 – ‘비가시적 존재’의 순환으로 다시 짜는 인식의 경계
황지희는 설치 작품 〈지난밤 숲속에 그들이 남기고 갔다〉(2025)와 드로잉 연작 〈낮에 남기고 간 것〉(2025)을 선보인다. 두 출품작은 “남기고 갔다”는 같은 문장으로 연동된다. 다만 여기서 ‘그들’은 특정한 주체라기보다, 우리가 늘 지나치거나 놓치며 살아가는 비가시적 존재들—습기, 바람, 진동, 미세한 이동—이 남긴 흔적들의 총합에 가깝다. 작가는 그 흔적을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정리하기보다, 오히려 인식이 발생하는 조건 자체를 흔들어 ‘없다, 있다’의 경계를 다시 쓰게 만든다. 달리 말해, 보이지 않음은 곧 부재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감각과 제도가 설정해 둔 인식의 범위 바깥에 놓여 있을 뿐이라는 전제가, 두 작업을 관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리스 메를로-퐁티(Merleau-Pont)의 지각 현상학에서 언급되었던 ‘비가시성’이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지각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몸의 방향성, 감각의 습관—에 따라 달리 ‘출현’하는 층위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즉 황지희가 흔드는 것은 대상의 유무가 아니라, 세계가 지각 속에서 성립하는 조건 자체임 셈이다.
작품 〈지난밤 숲속에 그들이 남기고 갔다〉를 보자. 이 작품은 균막 자투리, 균사 가족을 뭉치고 얽어 만든 크고 작은 13개의 조형물을 천장이나 벽에 매달거나 공간을 가로지르는 면실의 그물망 위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균사체 배지로 만든 작품은 바닥에 놓여 있기도 하다. 이 작업은 밤의 숲이라는 상황에서 영감을 받았다. 자연에 몸을 맡겨 잠들 때, 도시는 뒤로 물러나고, 벌레의 진동과 잎의 마찰, 어둠 속의 미세한 발걸음이 겹치며, 눈을 감는 순간 오히려 세계가 또렷해지는 경험이 열리는 상황과 같은 ‘밤의 숲’ 말이다. 여기서 숲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감각이 교차하는 조건이 되고, 관객은 시각 중심의 관람 방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이 작품은 “보이지 않는 생물의 외피이자, 존재가 머무는 공간의 비정형적 경계”를 다룬다. 외피와 경계는 단지 표면이 아니라, 어떤 것이 ‘대상’으로 성립하는 방식 자체를 규정한다. 우리는 흔히 드러나지 않는 것을 없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이 작품은 그 관성을 끊어낸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곧 부재가 아니라는 명제는, 관객이 통과해야 하는 문턱처럼 자리한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은 관람자의 주의와 감응의 밀도를 바꾸어 세계가 다시 구성되는 감각의 사건을 만든다. “세계는 고정된 대상의 집합이 아니라, 주의와 감응의 밀도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장”이라는 작가의 언술은, 이 설치가 무엇을 ‘보여주기’보다 무엇을 ‘감각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함을 명확히 말해준다.
이어 다양한 균사체 가죽과 균사 배지 위 남긴 드로잉 연작 〈낮에 남기고 간 것〉을 살펴보자. 이 작품들은 같은 문제의식을 ‘낮’의 시간, 곧 도시적 일상으로 가져온다. 밤의 숲이 감각을 과민하게 열어젖힌다면, 낮의 도시는 경험을 기능과 결과로 환원하며 관계의 다층성을 둔감하게 만든다. 작가는 숲과 바람을 매개로 보이지 않지만 확산되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땅속에서 그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눈으로 인식하는 개체 아래에는 이미 촘촘한 네트워크가 자리하며, 그 일부가 수면 위로 드러나 재료가 되고 일상의 물성이 된다는 관점이 여기에 자리한다.
그녀의 다양한 드로잉은 보이지 않는 연결이 어떻게 인식의 장으로 올라오고, 어떤 조건에서 ‘존재’로 감각되는지를 추적한다. 균사체는 육안으로 가늠하기 어렵기에 의식적으로 들여다볼 때 비로소 인지되는데, 작가는 그 특성을 통해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이 곧 인식의 방식임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일부 작업에서 드로잉을 디지털로 변환해 레이저 각인으로 확장하는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자연과 도시의 이분법을 단순히 비판하기보다, 도시적 매개(기록, 가공, 전환)의 언어를 역으로 끌어들여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떻게 일상 속에서 다시 작동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경로가 된다. 밤의 숲에서 열렸던 감각의 장을 ‘전환의 메커니즘’을 통해 낮의 도시에서 구현한 셈이다.
결국 황지희의 두 작업은 밤고 낮의 대비를 통해 하나의 질문을 반복한다. 무엇이 존재하는가보다, 무엇이 존재로 감각되는가? 〈지난밤 숲속에 그들이 남기고 갔다〉가 시각 중심의 질서를 해체해 관객을 감각의 교차로 밀어 넣는다면, 〈낮에 남기고 간 것〉은 도시가 단순화해버린 일상 아래의 얽힘을 드로잉과 각인의 방식으로 다시 표면화한다. 보이지 않는 생물의 외피와 비정형적 경계를 다룬다는 그녀의 선언은, 미학이 곧 인식의 윤리라는 의미로 간주된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이론을 빌어 말한다면, ‘그들’—균사체, 습기, 바람, 진동 같은 비인간적 요소들—은 배경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행위자다. 이 작품들은 ‘누가 세계를 짓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인간 중심의 주체성에서 분산된 작동의 네트워크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읽힌다. 즉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재로 처리되던 것들—소리, 진동, 바람, 네트워크—을 ‘인식의 조건 바깥’에서 다시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 황지희의 비평성은 바로 그 조용한 호명과 호출에서 잉태하고 확장해 나간다.
VI. 에필로그
《아무 데도, 어디에나》가 끝까지 붙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작동 방식이다. 세 작가에게서 비가시성은 늘 곁에 있었지만 인식되지 않았던 관계의 기술—연결, 유지, 붕괴와 그 흔적—을 의미한다. 균사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며 연결하고, 흡수하고, 분해하고, 다시 돌려보내는 존재로서 비가시적 매개 자체가 된다.
이 전시에서 ‘공생’은 “함께 살자”는 선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이미 얽혀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김시온, 김현주, 황지희는 균사체를 ‘친환경’의 소재이기보다, 연결, 변형. 소멸,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생성의 성질로 시간과 감각의 질서를 재배치한다. 김시온은 소멸을 전제한 물질로 애도의 시간을 작동시키고, 김현주는 언어와 공동체의 지속을 균사체의 네트워크적 존재로 은유하고, 황지희는 보이지 않음을 부재로 처리해온 인식의 관성을 흔든다. 요컨대 세 작업은 공생을 분산된 그물망으로 드러내는 비평적 실천인 셈이다.
또한 전시에서 ‘순환’ 또한 예술이 오래 붙들어온 영속성, 기념성, 소장성의 논리를 뒤집고, 변형, 퇴화, 해체, 환원을 통해 ‘끝’을 다른 시작으로 되돌린다. 사라짐은 실패가 아니라 관계 맺기의 한 방식이며, 지속가능성은 재료의 인증이 아니라 만들기-보여주기-처리하기까지 포함하는 윤리적 형식으로 재정의된다.
결국 “아무 데도, 어디에나”라는 역설은 이렇게 해명된다. 보이지 않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세계를 성립시키는 조건의 층이다. 그룹 ‘프로젝트 A’는 그 층을 시각화하는 데서 더 나아가 감각화하는 조형 실험에 나선다. 이때 관객은 기다리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흔적을 따라가며 전시의 일부가 된다. 전시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부재가 아니라 조건이며, 공생과 순환은 단순한 주제가 아니라 세계가 굴러가는 방식인 셈이다. (20260210)
출전/
김성호, 「‘비가시적 존재’로 탐구하는 공생과 순환의 조형 실험」, 『아무 데도, 어디에나』, 전시 카탈로그, 2025
(‘Project A - 아무 데도, 어디에나‘전, 2025. 12. 23~31, 실험공간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