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 주체로서의 자연’과 공생하는 자연미술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작가 고요한은 조소 전공의 조각가이면서 자연 현장에 나가 자연과 상호 작용하는 현장 중심의 미술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자연과의 공존, 공생이라는 화두를 작업 안에 실현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에게 이미 창조주가 만든 완벽한 예술인 까닭이다. 그가 추구하는 공존, 공생의 자연미술이란 무엇인가? 살펴보자.



II. 공존과 공생을 제안하는 자연미술  
존재자란 무엇인가? 존재는 철학사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자가 질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자연과 우주에 관해 사색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뿐만이 아니라, 동양의 노장자 철학에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존재적 질문과 마주한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존재론적 사유는 지속되어 왔다. “인간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라고 설파했던 하이데거(M. Heidegger)의 ‘세계 내 존재(In-der-Welt-s sein)’라는 인간 존재론은 대표적이다. 하이데거의 ‘여기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다자인(Dasein)은 ‘몸을 지닌 실존적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전제한다. 
그렇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 속에 우리는 함께 거주한다. 고요한이 첫 개인전 《존재, 存在, Existense》(2023)에서 선보인 평면 24점, 영상, 조각, 설치를 아우르는 61점의 출품작은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그의 작업은 존재에 관한 탐구에서 공존(共存,coexistence)과 공생(共生, symbiosis)을 제안한다. 함께 존재하는 공존은 함께 살자는 공생을 아우른다. 
이러한 차원에서 고요한의 작업은 가히 호모 심비우스의 지혜(Coexistence: Wisdom of Homo Symbious)’를 실천하는 자연미술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호모 심비우스’는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가 공생(symbiosis)이라는 단어에서 착안해서 만든 용어로, ‘공생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담는다. 즉 ‘호모 심비우스’는 “동료 인간들은 물론 다른 생물 종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인간”을 지칭한다. 
또한 고요한이 실천하는 자연미술이란 1980년 초 ‘야투자연미술연구회(野投, Yatoo)’ 창설 이후 공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후 오늘날 국제화된 생태미술운동을 공유한다. 야투의 자연미술은 서구의 대지미술과 달리, “자연은 더할 것도 더 뺄 것도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생성되고 실천된다. 
고요한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자연관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자연을 완벽한 예술로 인식하고 자연미술을 가장 순수한 미술로 추구”하려는 그의 작업 태도는 회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면서도 자연미술의 정신을 넉넉히 실천한다. 미술사 속 자연미술이 그러하듯이, 고요한의 자연미술은 ‘인간-미술-자연’의 관계 탐구에 있어서 그간의 ‘인간’에 방점이 찍힌 관점으로부터 ‘자연’에 방점이 찍힌 관점으로 이동하는 미술 실천이라고 하겠다.  



III. 자연미술이 실험하는 공생의 유형론 
먼저 식물과의 공생을 주목해 보자. 
특히 자연 속에서 자기 몸을 투여해서 자연의 질서를 배우려고 하는 소쇄원 대나무 숲에서 했던 퍼포먼스 작업을 보자. 그는 대나무를 중심으로 선 자기 신체의 반을 나누어 보이도록 연출하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자연의 프렉탈(fractal) 이미지가 지닌 대칭성이 드러내는 자연 질서를 배우고자 한다. 또한 그는 한 줄기 식물로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혈관을 표현한 작품 <녹색 혈관>(2020)이나  야생의 풀 속에 작가의 손을 집어넣었을 때, 따사로운 햇볕 아래 자라난 풀들이 포근하게 자기 손을 감싸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은 경험을 시각화한 작품 <공생>(2021)을 통해서 대우주로서의 자연이 품은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사유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성찰한다.  
이처럼 그는 몸을 통해 자연을 배우려는 숲, 강, 바다와 같은 드넓은 자연 속에 맞닥뜨리는 잡초와 같은 식물에 주목한다. 그의 작품 〈억새풀〉(2021)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우리는 그가 억새풀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자연의 품을 추적해 왔듯이 그에게 식물은 단지 보호할 자연환경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그와 대화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을 간파한다. 특히 3~4미터에 이르는 높이의 억새풀 사이를 헤치고 다니는 경험을 통해서 일단의 공포감을 동반한 숭고를 경험하기에 이른다. 이 작업을 통해 그가 경험한 거대한 숲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한 경외의 대상이 된 셈이다.  
생각해 보자. 식물은 인간으로부터 구속과 억압 심지어 폭력마저 입었지만, 식물이 인간에게 취하는 반격은 언제나 온건하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한 모습’으로 애초부터 존재했듯이, 식물은 인간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공생을 제안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 행했던, 대상화, 구속과 억압 그리고 폭력에 대한 응답이자 피드백이다. 자연은 보복 대신 치유를 도모하고 상대에게 공생을 제안한다. 공생이 “서로 다른 종의 개체들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킬 때, 늘 인간의 종속 대상이자 피해자였던 식물이 인간에 제안하는 공생이란 그런데도 식물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절대적으로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공생에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상리공생(相利共生)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해는 할 만하다, 한쪽에만 이익이 되는 편리공생(片利共生)이 식물의 인간에게 제안하는 최소한의 공생이 아닐까 싶다. 물론 식물의 입장에서 슬프기 짝이 없지만, 인간에게만 이익이 되는 편리공생으로서 말이다. 아니 더 나아가, 어찌 보면 식물이란 순진하기 짝이 없어 한쪽이 늘 손해를 보는 편해공생(片害共生)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없이 가해자 인간을 용서하고 치유, 화해, 공생을 제안하는 자연이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언제나 한결같다. 
이러한 까닭일까? 치유와 공생의 메시지를 사유하는 고요한은 인간의 문명 세계인 갤러리 안으로 그 잔재인 고철 구조물과 함께 부드러운 억새풀을 옮겨온 작품 <풀숲의 기억>(2021)을 통해서 자연과의 공생을 실천하기도 한다. 
그는 또한 동물과의 공생 또한 제안한다. 
그는 공주 연미산에 구전되어 오는 나무꾼과 곰에 관한 설화를 토대로 철로 된 곰 가족을 형상화한 작품 <안녕? 고마>(2018)를 숲속에 기념비처럼 설치함으로써 숲을 찾는 관객에게 설화 속 동물과의 공생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되새기게 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연미산에 전승되는 설화 속 곰을 관객에게 매우 친근한 존재로 구현하기 위해 《2020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서 높이가 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의 〈솔곰〉(2019)을 제작, 출품한 바 있다. 관객은 이 동물의 몸체 안에 들어가 2층과 3층 전망대을 통해서 바깥 숲을 내려다볼 수 있다. 관객이 그 안에 들어가 자연환경을 조망하게 만든 곰은 셀터(Shelter)로서의 집이자, 이미 우리와 공생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셀터는 그가 《2017금강자연미술프레비엔날레》에서 원판의 철 구조물로 만든 작품 〈안식처로의 돔〉(2017)과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지만, 단순한 피난처, 은신처로서의 기능을 넘어 우리에게 인간과 공생하는 동물의 존재론적 위상을 성찰하게 만든다. 
그는 식물, 동물뿐만 아니라 돌, 물과 같은 근원적 자연 질료와 바람, 공기, 햇볕처럼 보이지 않는 자연과의 공존, 공생에도 주목한다. 바람 속으로 몽골의 드넓은 사막에서 모래를 흩뿌리면서 바람의 운행과 삶의 여정과 함께하려고 시도한 작품 〈몽골의 바람〉(2022)이나 물의 흐름을 가로막아 변화한 금강의 모습 중 진흙이 뒤범벅된 모래밭에 작은 돌로 길을 내어 숨통을 틔어주려고 시도한 작품인 〈길〉(2022)을 통해서 인간과 공생하는 자연의 미학을 탐구한다. 그는 또한 숲속에 웅크린 채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만드는 운동과 흐름 속에 상호 작용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룹 야투(野投, YATOO)가 진행하는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Global Nomadic Art Project)는 다중심의 오프라인 유목주의 자연미술 운동에 여러 번 참가한 바 있다. 리투아니아, 이란, 독일, 이탈리아, 몽골 등 다양한 지구의 자연환경을 직접 체험하면서 식물과 동물과 같은 보이는 자연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연과의 공존, 공생이라는 주제를 자연미술로 시각화하는 일에 매진해 왔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한 마디로 ‘생태 환경 속에서 던지는 존재자에 대한 질문’이자 공생에 대한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IV. 대화하는 자연: 육화 주체   
서구 역사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구속과 정복의 대상인 객체(object)로 이해되어 왔으나, 최근의 실재론(realism)은 자연을 인간의 인식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오늘날은 인간중심주의를 벗은 ‘포스트 휴머니즘(post-humanism)’이나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과 같은 탈인간중심주의를 공유함으로써 자연은 인간과 대화하고 상호 작용하는 또 다른 주체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그것은 서구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유된 바 있는 ‘인간은 자연의 부분이자, 곧 자연’이라는 스피노자(B. Spinoza)의 철학을 실천하는 일이 된다. 대자연과 같은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은 산출하는 자연으로서,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이라는 산출되는 자연을 품어 안는다. ‘능산적 자연’이 신 혹은 대자연이라면, ‘소산적 자연’이 우리가 아는 풀, 바위, 물, 바람뿐만 아니라 인간과 같은 소우주로서의 자연과 인간이 발 디디고 있는 현실 지평에서의 세상을 두루 아우른다. 달리 말해 자연 속에서 인간이 함께 공생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생태학은 공생의 자연 개념을 계승하는 들뢰즈(G. Deleuze)의 사유 그리고 노,장자(老, 莊子)의 도가 철학과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공유하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전한다. 
고요한은 자연으로 들어가 풀잎 아래에 팔을 드리워 자연의 그림자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대지 위에 돌과 같은 자연물을 늘어놓고 자연의 질서를 되찾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한다. 때로는 강물에 들어가 커다란 도구로 수면을 가르면서 강물의 반향을 살피기도 하면서 자연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에게 자연은 대화하는 또 다른 주체인 셈이다.
자연은 늘 변화하는 존재로서 인간과 대면하고 있는 또 다른 주체이다. 고요한의 여러 유형의 자연미술은 우리에게 자연이라는 것이 메를로 퐁티(Merlau-Ponty)가 설파한 바 있는 살(la chair)로서의 존재임을 상기하게 만든다. 즉 ‘몸이 된 주체, 육화(肉化)된 주체’ 간단히 말해 ‘육화 주체’라는 진실을 떠올린다. 메를로 퐁티에게서 자연은 더 이상 종속적 관조의 객체(objet)가 아니라 인간과 대화하고 상호 작용하는 또 다른 주체(sujet)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늘 변화하는 생성의 운동체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늘 대자연의 본성으로 우리 곁에 존재해 왔다. 인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면서 말이다. 인간이 대형 농장과 공장을 짓기 위해서 아마존 밀림을 파괴하거나 모험과 탐험을 위해서 떠난 남극과 같은 오지나 여러 바닷가에 무수한 쓰레기를 남겨 해양을 오염시켜도 인간이 별 탈 없이 누린 평화는 이제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이 제안하는 ‘공생 제안’을 필히 받아야만 할 것이다. 오늘날의 기후 위기와 대재난 속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상리공생을 도모해야만 하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까닭은 인간이 머리로는 인간-자연 사이에 요청되는 상리공생을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못 말리는 욕망덩어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고요한은 ‘자기반성’의 마음으로, 동식물로서의 자연, 공기, 바람, 물과 같은 자연과 대화하는 방식의 자연미술을 지속해서 실천한다. 
고요한의 작업에서 자연을 육화 주체로 대면하는 이러한 공생의 생태미학은 개념적인 자연미술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공공미술의 영역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그는 《2021강원국제트리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생명의 싹〉(2021)에서 탄약정비공장에 설치된 탱크 위에 거대한 인간의 심장을 형상화해서 조각으로 설치한 바 있다. 마치 피가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심장은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것이 자연이든, 인간이든 그의 미술 속에는 뜨거운 피와 뜀박질하는 심장을 지닌 ‘몸이 된 주체’ 혹은 ‘육화 주체’가 존재하는 셈이다. 문명의 폐해로 상징되는 탱크 위에 마치 전쟁을 만류하거나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듯이 심장을 덧씌운 공공미술은 ‘자연-인간-문명’과의 상호 간에 대화를 시도하면서 공존과 공생을 제안하는 생태미학을 제안한다. 
 


V. 지문 연작 : 유전하는 인간 주체와 지속하는 자연 주체 
고요한의 자연미술에서 그만의 예술 유형으로 특화된 작업은 지문을 형상화한 또 다른 〈존재〉 연작이다. 이것은 자연미술에 나서는 작가 스스로 성찰하는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이다. 지문이란 인간의 부계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존재로서의 인간이 무엇인지를 성찰한다. 그것은 작가 개인에 대한 존재 질문이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은 작가의 혈연 지형도 속에서 가족처럼 ‘작가와 동일화한 타자’과 연계되는 상호 작용에 관한 성찰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문을 통한 인간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성찰을 고요한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질문한다. 즉 캔버스 위에 지문 형상으로 흩뿌린 흑임자, 조, 차조와 같은 자연의 씨앗을 부착하거나 황토를 물감처럼 바르는 방식으로 자기와 같은 소산적 자연으로서의 상관성에 대해 질문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은 더러, 자개, 브론즈, 철가루와 같은 인공적 재료로 지문을 대체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인공물 자체도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에서 자기의 육적 자아의 정체성을 자연과 대별해 본 것이라고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인간의 정체성은 다원적이다. 고요한의 지문을 형상화한 〈존재〉 연작에서도 그러하다. 작가로서의 ‘나’이거나 유년의 기억에서 소환한 ‘과거의 나’이거나, 내 속에서 발견한 ‘또 다른 나’라는 알터 에고(Alter Ego) 혹은 타자에 감정 이입한 페르소나(persona)처럼 변주된 자화상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것은 가족과 같은 ‘작가와 동일화한 타자’에서 스치듯 지나간 느슨한 인연의 낯선 누구처럼 ‘작가와 비동일화한 타자’에 대한 성찰, 나아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가의 본체적 고향으로서의 자연’인 씨앗과 황토 등 다양한 ‘소산적 자연’으로 나간다. 
고요한의 지문을 형상화한 이 연작은 어떻게 보면 산맥처럼 보이기도 하고 계곡의 지형처럼 보이는 자연의 형상을 닮아있기도 하다. 더러는 자기 몸처럼 볼륨을 키워 매스를 강조한 채, 지문 문양을 표면에 새긴 조각 작품 또한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이 자연과 동질화되는 작가 자화상인 셈이다. 따라서 이 연작은 자연미술의 조형 언어와 일정 부분 떨어져 있지만, ‘유전하는 인간 주체’와 ‘지속하는 자연 주체’의 관계 속에서 성찰을 지속하는 자연미술의 정신을 계승한다. 



VI. 에필로그 
작가 고요한은 회화, 조각, 설치, 영상, 공공미술 등에서 자연미술의 근본적인 의미를 깊이 성찰하면서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를 공유하고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자연에 나가서 몸으로 벌이는 퍼포먼스이든 설치, 조각의 양상이든 그가 실천하는 자연미술은 자연을 구속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또 다른 주체’, ‘몸이 된 주체’, 즉 ‘육화 주체’로서 대면한다. 그의 자연미술에 지향하는 ‘존재에 관한 관심’에는 자연과의 공존, 공생이 늘 자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작업 태도는 지문을 형상화한 회화나 공공미술의 영역에서도 공생의 존재 탐구라는 주제 의식 속에서 동일하게 드러난다. 즉 고요한의 작업은 자연과의 공생을 탐구하는 자연미술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공이 사회를 가득 채우는 현실 속에서도 자연의 위상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면서 인간과 공존, 공생의 존재론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202411)  

출전/ 
김성호, 「‘육화 주체로서의 자연’과 공생하는 자연미술」, 『고요한』, 자료집,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