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경계에서 식물의 몸을 쌓아가는 숲속 풍경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작가 류재현은 재현이라는 전통적인 조형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세상을 만든다. 그것은 숲이나 강이라는 자연이다. 그것은 때로 인간이 주검인 상태로 한 줌 흙으로 되돌아갈 원시향(原始鄕)의 자연처럼 숲이 빽빽한 시원(始原)의 숲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이 나무를 베어 내고 잡초와 들꽃을 밟아 만든 길이 여백의 공간을 열고 있는 일상의 자연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대자연의 무엇으로 보이든 인공 풍경의 무엇으로 보이든, 주요한 것은, 그가 실제로 가보았던 장소에서 촬영했던 자연 이미지를 재해석하고 해체한 후 파편적으로 재구성해서 빈 캔버스 위에 ‘류재현의 숲’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유념할 것은, 그의 숲이 아무것도 없는 어두움으로부터 자라났다는 것이다. 흰 캔버스 위를 덮은 검정색에 가까운 여러 겹의 물감층의 공간은 물질은 있으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부재의 바탕을 이룬다. 이러한 바탕에서 그는 빛을 머금은 숲을 만들어 나간다. 마치“빛이 있으라”고 명하면서 천지창조의 서막을 열어젖혔던 야훼의 창조 사역에서처럼, 류재현의 작업에서 빛은 어둠이라는 부재를 물리치고 존재를 잉태하는 무엇이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엷게 풀어 헤친 유화 물감으로 잡초, 풀잎, 나무와 같은 ‘식물의 몸’을 하나둘 어둠 속에 올리면서 점차 윤곽을 드러내는 류재현의 숲은 부재로부터 왔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해 보라. 빛은 어둠을 물리치는 주역이다. 빛을 입은 사물은 인간과 동물의 망막에 비로소 ‘보이는 존재’로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류재현은 이러한 ‘빛을 입은 식물의 몸’을 동양화의 모필로 만들어 간다.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을 올리기 위해서 모필을 사용하는 까닭은, 풀잎 하나하나를 마치 먹을 치듯이 선의 획(劃)을 그어 올리기에 제격인 까닭이다. 그의 작업에서‘식물의 몸’ 혹은 ‘식물의 살’은 그렇게 모필이 만든 선의 형태로 획의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획의 방식이란 0차원 점에서 출발해 1차원 선으로 ‘이동하는 운동체의 흔적’을 남기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유동적이다. 모필의 굵기와 모필이 캔버스 표면에 닿는 압력에 따라 때로는 0차원의 점으로, 때로는 1차원의 선으로, 때로는 2차원의 가느다란 평면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필로 획을 그어가며 만든 식물의 몸은 여러 겹의 피부층이 중첩되면서 채워지고, 전체적인 숲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그런데, 류재현이 만든 숲은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어디에 자리하는가? 그저 실제로 여행하면서 촬영해 왔던 프랑스의 어떤 숲이나 제주의 천연 자연림, 작업실 인근의 섬진강 풍경의 재현일 따름인가? 아니라면 중국에서 전해지는 천외천(天外天), 세외도원(世外桃源), 도화원(桃花源),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이상향 혹은 국내에서 회자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속 세계처럼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꿈속의 낙원으로 변주된 풍경인가? 그의 작품 속 숲은 실존하는 숲으로부터 왔을 뿐만 아니라 실제 풍경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처럼 변주된 풍경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작품을 보자. 
화면에는 검은 바탕색을 먹고 자라난 검은 피부의 나무들이 있고, 그 몸체를 뒤덮고 자란 “당초문처럼 이리저리 뻗은 칡넝쿨”이나 전경을 가득 채운 아카시아 잎새들이 자리하기도 한다. 화면을 수평으로 가르고 흘러가는 강물이나 사선으로 가르면서 흘러나오는 계곡물은 또 어떠한가? 운무가 흐릿하게 만든 원경의 산, 습기를 가득 먹은 싱그러운 녹색의 풀잎들, 그리고 나무 그늘을 뚫고 수풀 위에 떨어진 청량한 햇살이나 강물 위에 따스한 빛이 만든 윤슬 문양은 그의 숲을‘우리가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실제 풍경’처럼 보이게 할 만큼 현실적이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이는 그의 숲에는 환영 가득한 허구의 세계가 잠재태(le virtuel)의 모습으로 일렁인다. 그가 현실 속 풍경을 해체하고 포토몽타주처럼 화면을 재구성할 뿐만 아니라, 마치 초점을 원경에 맞춘 사진처럼 아웃 포커싱(Out focusing)으로 근경 이미지를 흔들리듯이 아련하게 선보이는 까닭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회화는 마치 유령(phantom)과 같은 환영 이미지를 통해 판타지(fantasy)가 현현되는 ‘현실 속 비현실’의 풍경을 만든다. 들꽃과 숲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마치 장노출로 포착한 사진처럼 흐릿한 유령과도 같은 모습으로 그린 것도 그렇지만, 비현실의 이미지로 기획된 ‘어린 하얀 사슴’을 화면 속에 낯설게 등장시킨 ‘판타지 미장센’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린 생명체는 공허함과 불안을 안은 눈길로 관객을 응시한다. 누군가 외마디라도 외친다면, 금방 멀리 달아날 것처럼 보이는 ‘흰빛의 가녀리고도 어린 사슴’은 비현실 속 판타지 존재의 메타포처럼 등장한다. 류재현의 회화에는 ‘작가가 실제로 방문했던 실재 숲’과 ‘그것의 변주’, 그리고 ‘현실 같은 비현실의 상상 숲’이 공존하는 셈이다.   
‘이미지’의 그리스 어원인 에이돌론(εἴδωλον, Eidolon), 에이콘(Eikon, εικον), 판타스마(φάντασμα, Phantasma) 중에서 판타스마가 ‘이미지→유령→판타지→시뮬라크르’와 같은 의미로 변해 왔다는 것을 상기할 때, 회화가 창출하는 이미지는 많은 부분 현실의 모방을 통한 시뮬라크르가 된다. 
류재현의 숲도 그러하다. 더 주요한 것은 류재현의 ‘숲 풍경’에는 현실에 있는 숲이 상상의 숲으로 도약한 것이기보다, 현실에 있되 현실과는 다른 장소에 존재하는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다른(hétéros)’과 ‘장소(topos)’가 결합한 용어로, 푸코에 의하면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는 장소이지만, 기존의 공간들에 이의 제기를 하고 그것들을 전도시키는 장소’로서, 개념적으로 다른 곳을 가리키거나 모든 장소의 바깥을 지칭한다. 달리 말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있지만, 실재하는 장소의 바깥에 있는 ‘또 다른 공간’,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 또는 ‘반공간(contre- espace)’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실제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또는 ‘현실화된 유토피아/디스토피아’로 풀이한다. 마치 아이들이 부모님의 침대(현실 공간)를 침탈해서 뜀뛰기를 하며 놀이터(전도된 공간)로 만드는 것처럼, 류재현은 현실 속 동식물들이 사는 숲속 풍경을 마치 동화 속 정령(精靈)들의 거주지로 전도한 헤테로토피아의 세계를 구축한다.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로 규정된 생태 위기의 시대에 작가 류재현은 싱그러운 연두와 초록이 점유하는 숲의 풍경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언저리에 실감 나는 재현의 조형 언어로 일으켜 세움으로써 우리에게 인간이 떠나온 고향인 자연에 관해 깊이 성찰하도록 일깨운다. 그의 작업에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헤테로토피아의 세계는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그의 숲속 풍경은 식물의 살과 몸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고 화면 속 세상에 가득 채움으로써 탈인간중심주의 인식 속에서 종속화, 대상화되었던 자연(물)을 인간과 대화하는 주체로 불러들인다. 
그의 ‘숲속 풍경’은 ‘식물 되기’를 제안하는 들뢰즈(G. Deleuze)의 철학이나 사물의 살(le chair)에 주목함으로써 자연을 인간과 상호 작용하는 또 다른 주체로 등극하게 만든 메를로 퐁티(Merlau-Ponty)의 사유와 같은‘객체지향적 존재론’을 회화의 세계 안에서 실현하는 중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류재현의 숲속 풍경은 메를로 퐁티식으로 말해, ‘식물의 살과 몸’을 쌓아 올려 만든 인간과 대화하는 또 다른 주체라고 할 만하다.
 (20241127)


출전/
김성호, 「현실의 경계에서 식물의 몸을 쌓아가는 숲속 풍경」, 『류재현』, 자료집, 완주문화재단 비평 매칭,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