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살로 가득한 타자의 초상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작가 김인혜는 사람을 그린다. 대개 화면 안에 얼굴을 가득 채우는 방식으로 사람을 그린다. 그 사람들은 각자 개별적 정체성을 지닌 이름 있는 인간 주체이지만, 김인혜의 회화에서 특정 인물로 구체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인물을 가장 기초적인 조형 요소인 선(線), 점(點), 원(圓)과 같은 매우 단순한 도상으로 표현하여 익명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얼굴의 대표적 특징인 이목구비는 동그란 얼굴 속 두 개의 눈(〇 〇 혹은 ● ●)과 입(―)으로 대별된다. 그림에서 코는 표현되지 않고 최소한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눈과 입의 모습만 드러날 뿐이다. 이 눈과 입은 물감을 먹은 붓질의 정도에 따라 미세하게 다르게 표현되면서 최소한의 표정을 드러낸다.
김인혜의 〈어떤 얼굴〉, 〈face〉, 〈보는 사람〉 연작을 살펴보자. 캔버스에 얼굴만을 가득 채운 〈어떤 얼굴〉 연작에서는 마치 쌍생아 같은 익명성의 인물들을 만난다. 무심한 얼굴의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이들은 단지 달리 표현된 피부, 눈, 입의 색과 더불어 얼굴 위로 드리워진 머리카락 일부 등을 통해서 모두 다른 인물들임을 유추하게 만든다. 인물들이 프레임 안에 상반신으로 등장하고 있는 〈face〉 연작이나 〈보는 사람〉 연작은 대개 증명사진처럼 정면성의 얼굴로 등장하지만, 더러는 마치 셀피(selfie) 사진처럼 고개를 기울이거나 살짝 옆모습을 드러낸 얼굴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 익명적 인물은 모두 작은 점이나 원처럼 보이는 눈과 선처럼 보이는 입을 지니고 있어 두드러진 중성성(neutralité)의 표정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중성성의 표정이란, 일자의 형상으로 다문 입술, 눈과 눈동자가 하나처럼 보이는 점과 같은 눈의 형상을 통해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지만, 김인혜가 붓질 표현을 통해 구사하는 눈과 입의 미세한 변주는 관객들이 이 인물들을 일정 부분 각기 다른 표정, 감정, 성격의 인물로 가늠하도록 이끈다. 여기에 덧붙여 머리 모양과 색, 그리고 안경이나 귀걸이와 같은 액세서리나 살짝 드러난 상의의 형태 그리고 인물이 취하는 상반신 자세에 따라서 인물의 개성적 면모가 조금 더 다르게 드러난다. 역설적이지만, 김인혜의 인물화가 지닌 중성성의 전략이 오히려 인물마다 지닌 미세한 개성적 면모를 드러내게 한 셈이다.
그렇다면 각기 다른 이 인물들은 누구인가? 작가 김인혜에게 이들은 분명 타자들이다. 그(녀)들은 작가 주변의 지인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이미지로 가져온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케네스 거겐(Kenneth Gergen)이 언급하는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적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수많은 자아를 가진 주체를 형성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김인혜의 회화 속 인물들은 무수한 자아를 가진 타자들이다. 한국인, 여성, 미술 작가와 같은 사회적 자아는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여러 학생의 선생과 같은 타자들과의 관계 지형 속 ‘또 다른 사회화된 자아’를 생산한다.
“주체성이란 타자의 출현과 개입을 통해 비로소 발생한다”는 들뢰즈의 견해처럼, 나의 정체성은 타자와 맺고 있는 관계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즉 타자와의 관계는 나라는 주체를 인식하게 하는 조건이자 동인이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김인혜의 회화 속 인물은 타자인 동시에 ‘또 다른 나’로서의 김인혜이기도 하다.
우리는 ‘또 다른 나’를 흔히 ‘알터 에고(alter ego)’로 부른다. “본래의 내 모습과 다른 또 다른 자아”인 알터 에고는 해리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를 설명할 때 종종 사용되곤 하지만, 그것을 병적 주체라고 규정하기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또 다른 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즉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나’, 혹은 ‘나의 분신’ 또는 ‘잠재성의 또 다른 나’로 이해된다. 누구에게나 ‘또 다른 나’는 존재한다. 때로는 일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두렵거나 무서운 또 다른 나’를 만나기도 하지만, 이성과 감성이 맞부딪히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지혜롭고 대견한 또 다른 나’를 만나기도 한다. 그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익숙한 내가 아닌 ‘낯선 나’로 등장한다.
김인혜는 ‘또 다른 나’를 자신의 회화에 등장한 타자들의 초상 속에서 만난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는 ‘또 다른 자아’로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성찰적 의미’로 타자들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만남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녀는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철학의 메타포인 ‘되기(devenir)’, 더 구체적으로는 남자 되기, 할머니 되기, 소녀 되기와 같은 ‘타자 되기(devenir-autre)’를 자신의 회화 속에서 실천하고자 한다. 김인혜의 작업에서 이러한 ‘타자 되기’의 철학적 메타포는 한 인간 주체가 또 다른 인간 주체인 타자 되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들뢰즈 철학에서, ‘동물 되기, 기계 되기’를 제안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자신의 회화에서 비인간인 모든 객체(object) 되기를 실험한다.
이러한 객체 되기의 관심은 인물화 대신 인간에게 종속된 사물들만 표현한 일련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색종이 위에 놓인 녹색 모자를 그린 작품 〈색종이와 모자〉(2024), 까만 책 위에 놓인 선글라스를 그린 작품 〈선글라스〉(2024), 신발을 신고 있는 누군가의 다리를 포착한 작품 〈Crocs〉(2024)은 대표적이다. 따라서 김인혜의 작품에서 이른바 정물화라고 부를 만한 사물을 표현한 작품은 이러한 ‘객체 되기’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설할 수 있겠다.
이러한 객체에 관한 관심은 오늘날 인간중심주의를 벗은 ‘포스트 휴머니즘(post-humanism)’이나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의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과 같은 탈인간중심주의를 공유함으로써 비인간인 사물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주체임을 강조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은 “세상의 모든 객체(object)는 인간 인식을 초월하여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객체라는 비인간은 인간의 인식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간과 동격인 또 다른 주체인 셈이다.
김인혜의 회화에서 ‘객체 되기’, ‘객체를 또 다른 주체로 인식하는 태도’는 일련의 공기, 연기, 미생물과 같은 객체에 관한 관심으로 확장한다. 작품 〈푸른 파동〉(2022)이나 〈Stir〉(2022)에서는 선묘로 실루엣만 표현된 인물 안팎으로 구름 같이 표현된 물감 드로잉이 마치 파동처럼 운동하는 상황을 선보인다. 동명의 또 다른 작품 〈Stir〉(2022)에서는 같은 표현으로 된 소녀의 얼굴 안팎으로 무수히 많은 검은 점들이 둥둥 떠다니듯이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타자인 객체의 외연적, 내재적 층위 그가 속한 공간의 층위 등 다층적인 레이어가 혼재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언급은 배경, 대기와 같은 객체를 인물과 같은 또 다른 주체로 간주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김인혜의 인물화는 인물과 배경, 그리고 인간 주체와 객체가 서로 관계 지형을 만드는 상황을 자신만의 인물화로 시각화한 셈이다.
김인혜의 작품에서 ‘객체 되기’, 혹은 ‘객체지향 존재론’뿐만 아니라 ‘주체와 객체의 관계 지형’을 탐구하는 사례는 많다. 작품 〈부드러운 공기〉(2022)는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인물을 배제한 공기만을 형상화함으로써 객체를 주체로 등극시키고 그 안에서의 관계 지형마저 탐구한다. 또 다른 작품들은 이러한 공기와 같은 객체를 인물이라는 주체와 한 덩어리처럼 혼성하기도 한다. 작품 〈Soak〉(2022)에서는 선묘로 표현된 인물이 노을 지는 바다와 같은 배경과 오버랩되어 있고, 또 다른 작품 〈Blue Soak〉(2022)이나 〈두 사람〉(2022)에서는 인물이 물속인지, 하늘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모호한 배경과 오버랩되어 있는 이미지를 선보인다. 또한 작품 〈Snooze〉(2024)는 한 소년의 얼굴 안팎으로 알 수 없는 물질들이 둥둥 떠다니면서 인물과 배경 사이를 하나로 뒤섞은 듯한 인물화를 선보인다. 한편, 작품 〈축축한 공기〉(2022)는 배경과 인물이 오버랩되어 있는 이미지를 통해 양자의 관계 지형을 탐구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보다 공기인 객체를 더 강조하는 제목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만큼 김인혜의 작품에서 ‘객체 되기’, 혹은 ‘객체지향 존재론’은 주요한 주제 의식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작품들은 모든 세상의 존재가 ‘사물의 살(la chair)로 가득 찬 존재’임을 피력한 메를로 퐁티(Merlau-Ponty)의 살의 철학을 상기하게 만든다. 그의 철학에서 사물 곧 객체는 더 이상 인간 주체에 의한 바라보기의 대상으로 남지 않고 스스로 보는 주체가 될 뿐만 아니라 인간과 대화하고 상호작용을 하는 또 다른 주체가 되는 까닭이다.
김인혜의 최근작 〈Around You〉(2024)는 공기, 먼지, 연기와 같은 객체가 인물과 관계 맺고 있는 이미지를 선보이면서도, 이전 작업과 달리 인물이 특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상황을 시각화한다. 무슨 물건인지 특정할 수 없는 붉은색의 봉을 양손에 쥐고 있는 인물이나, 두 손을 들어 올리면서 거절인지 놀라움인지 확정하기 어려운 어떠한 의사 표현을 하는 분위기를 전하는 인물은 관객에게 특정하기 어려운 모호한 이미지를 통해서 확정할 수 없는 여러 가능성의 상황을 유추하게 만든다. 이처럼 최근작은 인물의 특정한 자세나 독특한 상황 설정을 통해 그간의 작품들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실험하는 중이다. 이러한 다양한 변화는 인간과 비인간이 관계를 맺는 여러 양상의 변화를 좀 더 풍부하게 해설하도록 견인한다. ‘무엇’으로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 인해 관객의 다양한 해석을 열어두면서 말이다.
글을 마치자. 김인혜의 회화는 인간과 비인간이 관계를 맺는 다양한 양상, 즉 인물/배경, 인간/비인간, 주체/타자, 인간/객체, 외연/내연이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 지형을 탐구함으로써 ‘전형적인 인물화가 아닌 김인혜만의 독특한 인물화’를 창출해 나가는 중이다. (20250219)
출전/
김성호, 「사물의 살로 가득한 타자의 초상」, 『자료집』, 김인혜 작가론, 영등포문화재단 비평매칭,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