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소리, 그 원형적 실재 찾기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소멸하는 소리를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조각의 한계를 처음부터 넘어서는 것이다. 덩어리를 강조하면서 삼차원 공간을 점유하는 조각적 몸체에는 소리의 흔적이 깃들 공간이 비좁다. 그것이 떨리듯 사라지면서 가녀린 여운을 남기는 바람결 소리이든지 광폭한 기계음의 폭압적인 소음이든지간에, 시간의 진폭을 타고 소멸하고 마는 소리의 변덕스러움을 담아낼 공간이 끝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조각이 모색하는 소리의 시각화
조각이 소리를 사모하며 그 만남의 길을 찾은 궁여지책은 조각의 몸체에 움직임을 부여해서 그 움직임으로 인한 소리의 차원을 강조하거나, 아예 소리를 가두어 놓은 녹음기의 재생을 통해서 조각의 한계적 공간을 넓히려 하거나 부연 설명하려는 설치적 어법과 같은 노력들이었다. 즉 키네틱의 방법론으로 모색된 움직임에 의해 생산되는 실제적 소리이거나 조각 이미지에 부가하여 재생되는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바람결에 삐거덕대거나 서로의 몸체가 부딪혀 소리를 내는 칼더의 모빌은 대표적인 예이다. 고즈넉한 산사(山寺)에서 울리는 풍경(風磬) 소리처럼 바람에 따라 관절을 움직이며 몸체가 움직이다가 서로 부딪히는 칼더의 모빌은 바람 같은 자연력에 의한 움직임으로 인해 조각이 소리를 가질 수 있는 지극히 초보적인 형태이다. 장 틸겔리의 ‘뉴욕에의 경의’처럼 모터로 작동하는 기계 부속의 요란한 움직임으로 인해 소리를 생산하는 키네틱 아트는 좀 더 적극적으로 조각이 소리를 가질 수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각의 변형체들은 소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발원해서 모색된 것이기보다는 움직임 혹은 시간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다. 물론 미술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키네틱의 유형은 피아노를 치는 ‘자동인형기계’ 같은 소리와 조각이 하나로 붙어 있는 양상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미술의 영역에서 조각의 몸체에 소리를 담아내려고 하는 적극적인 시도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50-60년대 현대미술이 장르의 영역을 융합하고 그 경계를 확장해 가면서 미술, 문학, 무용, 연극의 형식적 구분이 점차적으로 탈각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조각은 과도기적인 현대미술의 다종성을 대표하는 퍼포먼스나 개념미술의 다양한 관심들과 공유하면서 조각적 특질 외의 것들과 교섭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이러한 소리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조각이 원래의 몸체를 유지하기보다는 설치의 형식으로 분산된 채 영상이나 소리와 교감하는 양상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반면, 조각가 임형준은 덩어리의 조각으로서 소리를 시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념미술이나 퍼포먼스와 공유하고 있는 조각의 차원은 물론이고 키네틱이나 모빌의 양상이 구현했던 움직이는 조각의 차원 이전으로 아예 회귀한 듯이 보인다. 일견 이러한 인상은 그의 작업을 조각의 전통에만 함몰되어 있는 매우 구태의 것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의 초기 작업에는 실제로 자연석의 덩어리로부터 카빙의 기법으로 오디오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1986년의 작품 ⌜자연으로부터-3⌟이 있다. 그것은 마치 돌 속에 갇힌 인체의 형상을 돌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을 조각의 이상으로 간주해 온 로댕의 태도를 숭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임형준의 이 작업에 있어 소리의 시각화란 돌 속으로부터 소리를 이미지의 형태로 꺼내는 식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가 탐구하는 소리란 실제적 소리를 도입하는 차원이기보다는 소리 이미지로 도입되는 차원에 존재한다.
이미지로서의 소리 - 그 원형적 실재 찾기
소리 이미지? 물론 그의 작업이 ‘소리’라는 주제만 탐구해 온 것은 아니지만 소리의 시각화, 즉 ‘소리 이미지 찾기’는 여러 주제의 실험적 모색 이후 그에게 있어 일관된 주제의식이었다. 더욱이 그의 ‘소리의 이미지화’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형 실험에도 불구하고 조각의 기본적 속성을 고수하면서 모색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개념미술, 퍼포먼스, 설치적 어법의 미술이 관심 갖는 ‘실제적 소리’와는 다르게 줄곧 ‘이미지로서의 소리’라는 점은 우리들 논의에 있어 의미심장한 부분이 된다.
미술에서 소리의 비가시적 특성을 가시화하기 용이한 것은 아무래도 실제적 소리를 포함하고 있는 설치적 어법이 제격인 것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볼륨과 메스를 가지고 조각이 시도하는 소리의 시각화는 비효율적이다. 그것은 회화도 마찬가지인데, 미술의 전통적 매체란 소리를 이미지로서만 치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각가 임형준에게 있어 ‘소리의 시각화’는 출발부터 조각적 표현의 한계를 떠안고 있는 셈이다. 그는 왜 이러한 조각의 표현적 한계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소리를 시각화하려고 하는 것일까? 소리의 시각화라는 주제에 관한 한, 물리적으로 실제적 소리를 도입하거나 이를 중층적인 영상 이미지로 대치하는 식의 최근 경향과는 달리 작가 임형준이 전통적 조각의 언어를 고수하는 이유는 이미지의 힘이 주는 강렬한 효과에 주목하는 탓이다. 그것은 ‘...이 아닌 것이 ...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신뢰에 다름 아닌데, 그는 ‘소리가 아닌 이미지가 소리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식의 미술의 태생적 존재에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대리석으로 전화기의 형상을 조각한 1986년 작품 ⌜Action 86⌟을 보면, 누군가의 전화로 인해 벨이 소란스럽게 울리고 있는 듯한 전화기의 상태를 우리로 하여금 유추해 낼 수 있도록 작가가 배려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화기의 한쪽 끝이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형상이 요란하게 따르릉거리는 벨소리를 이미지화시키는 데 있어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임형준에게 있어 비가시성의 소리는 조각을 통해 가시성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소리의 청각성에 부가되는 시각성, 혹은 청각성을 변조하는 시각성은 임형준 작품에서 ‘이미지로서의 소리’를 강화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리조각은 이미지로서의 소리조각임을 명확히 정초시킨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여기에 있다. 주제의식인 소리 탐구를 작가는 왜 하필 이미지로써만 강박하려 하는가에 대한 의아함이다. 청각에 의해서 감지되는 소리의 지속성이나 소멸성 등의 비가시적 세계를 공간 점유가 큰 물리적 매체 안에 이미지로써만 구현하려는 태도는 작업을 경직되고 답답하게 만들기에 족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대답은 앞서 살펴본 이미지로 대표되는 미술에의 신뢰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에 존재한다. 소리를 소리(혹은 청각적 요소)로 표현해내는 작위성에 대한 철저한 거부감과 불신이다. 적어도 미술이란 작위성을 거부하는 끝없는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작가의식 때문이다. 더욱이 임형준이 탐구하는 소리가 물리적 현상 속에 드러나는 청각성의 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비물리적 현상 속의 관념성의 차원까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존재 근거는 확장된다.
임형준에게 있어 ‘이미지로서의 소리’는 먼저 언어 분절이 가능한 음성 체계나 그것이 불가능한 음향 체계를 한데 아우르면서 출발한다. 즉, 귀를 간질이는 정겨운 새들의 지저귐과 같은 자연의 ‘소리’, 악기 연주를 통한 화성 체계의 ‘소리’, 사람들의 대화하는 ‘음성’과 같은 언어 분절의 가능태는 물론 창문이 여닫히는 소리, 자동차나 기계 부속이 생성시키는 식의 ‘음향’ 혹은 ‘소음’과 같은 언어 분절이 불가능한 체계를 모두 포함한다. 나아가 이 다양한 물리적 현상 속의 소리는 권력 체계의 폭압에 대항하는 항변, 서정적 감수성으로 표출되는 시적 주절거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같은 추상적이고 함축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비물리적 차원마저 공유하기를 소망한다. 그런 까닭으로 작가는 이러한 ‘공유된 소리의 차원’을 소음(noisy, bruit)으로 정의하기를 선호한다.
임형준의 소리는 결국 물리적 현상에 따른 소리에 기초하면서도 비물리적 현상 속의 관념 체계를 함께 지향하는 까닭으로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의 힘을 강화시키는 정당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로서의 소리’는 결국 ‘소리의 관념적 실체’ 혹은 ‘소리의 원형적 실재, 나아가 그것의 실재’를 끝없이 찾아 나서는 작가의 노정들이 하나둘 집적되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심상(心想) 혹은 심상(心像)의 소리 - 초현실주의적 만남
주로 나팔이나 바이올린 등의 악기의 이미지를 통해서 다양한 소리의 측면과 그 원형적 실재(작가가 말하는 소음)와 그 실재를 모색해 온 임형준 조각의 조형 어법은 지극히 초현실주의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로 나팔로 상징되는 ‘소리 이미지 조각’은 이질성의 이미지들과 거듭 만나기를 시도한다. 호박 혹은 자연, 인체, 입방체, 상징적 기호체, 전통 유물, 오브제... 나팔로 상징되는 소리가 이들과 시도하는 만남은 지극히 ‘낯선 만남’이다. 임형준은 자신의 작품에 드러난 이러한 이질적 이미지와의 만남을 ‘폭력적 결합’이라 칭한다. 그것은 마치 시인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이 읊조리는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기이한 만남’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시구와 닮아 있다. 초현실주의에서 오토마티즘과 함께 대표적으로 시도되는 이러한 데페이즈망(dépaysement, 낯설음)의 전략은 엉뚱한 장소로 사물을 전치해서 유발되는 충격적 즐거움을 의도적으로 지향한다.
다분히 유희적인 데페이즈망의 만남은 임형준의 작업 도처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조형 어법이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은, 나팔로 상징되는 ‘소리 이미지’가 결합하고 있는 타 매체의 형상들이다. 나팔이 만나고 있는 타 매체, 즉 호박, 사물, 유물, 인체 등의 형상은 그들 매체들의 중얼거림, 독설, 항변 혹은 바람이나 염원을 나팔에 실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이들이 나팔을 통해 생산하는 것 같은 ‘소리’는 따라서 물리적 실재의 소리이기보다는 마음의 소리처럼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다. 심상(心想)의 소리인 셈이다. 예를 들어 하반신의 인체 형상 위에 커다란 나팔이 상반신을 대치하고 있는 그의 작품 ⌜소리-Bruit 92⌟나, 가운데가 뚫린 인체 흉상 안에서 자라나는 나팔을 형상화한 또 다른 작품 ⌜소리-Bruit 2002⌟를 보면, 우리는 나팔이라는 ‘소리 이미지’가 그들 인체의 염원이나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다. 위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작품 안 인체들의 심상의 소리가 동시에 작가의 심상의 소리일 것이라는 기대와 추측이다. 마음으로서의 심상(心想)의 소리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초현실주의적 데페이즈망이 시도하는 ‘낯선 만남’은 심상(心像, 心象, image)의 세계를 구현한다. 이것은 ‘감각기관에 대한 자극 작용 없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영상’으로 과거에 지각했던 것을 재상기하는 '기억표상'이나 간접경험을 통해 상상 작용을 일으키는 '상상표상', 또 논리적 사고 체계로부터 기인하는 '사고표상' 같은 여러 다양한 작용을 두루 거치게 만든다. 주지하듯, 청각적 요소가 없어 실제로 들리지 않는, 이미지로만 만들어 내는 소리는 그 이미지의 모호한 특성으로 인해 무척 다양한 해석상의 진폭을 함유하게 된다. 우리들의 표상 작용 및 상상 작용에 의해 ‘열리는 소리’를 담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호박 위에 나팔이 씨앗처럼 발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소리-Bruit 93⌟에서 우리는 호박이 가지는 생명력을 상상하면서 호박의 심상(心想)이 전가된 작가의 심상을 읽어내는가 하면, 우리는 이내 또 다른 열려진 해석을 감행하는 심상(心像)의 체계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이러한 심상(心想)에서 심상(心像)으로의 전이 체계는 작품 외면에 신문지나 잡지 등이 콜라주된 최근 작품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견 외견은 첼로나 첼로 가방 내부에서 자라나는 나팔 식으로 두 요소의 ‘낯선 만남’과 ‘단순한 만남’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신문이나 잡지라는 기성 오브제의 차용으로 인해 내러티브의 증폭이 상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잡지가 콜라주된 실제의 여행 가방으로 만들어진 최근 작품은 표면상에서는 아무런 소리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없지만 여행 가방이 내포하는 상징성 안에서, 우리는 여행 가방이 이동하는 경로 속에서 무수히 만나게 될 소리와의 ‘낯선 만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여행 가방의 바퀴가 지친 여행자의 손에 끌리어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 기차역에서 만나는 기차의 힘찬 경적 소리, 반갑게 만나고 아쉽게 헤어지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여행 가방 주변으로 들렸을 것으로 상상되는 무수한 소리를 우리는 무한대로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여행 가방 자체가 소리를 담아두는 ‘소리 상자’처럼 우리에게 인식될 수도 있겠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가능한 무수한 내러티브는 작가가 드러낸 최소한 두 요소의 단순한 만남 속에서 우리들의 표상 작용과 상상 작용을 통해 무수히 확장되어진다. 작가가 심상(마음)에서 심상(이미지)으로의 전이 체계를 이제 순전한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 탓일까?
임형준 작업에서의 ‘낯선 만남’이란 두 개체 혹은 두 매체의 단순 결합이라는 점에서, 환각이나 상상의 나래를 지속적으로 연계시키는 자동연상의 초현실주의적 세계를 지속적으로 유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낯선 만남’의 전략도 그러하지만 그가 조각 어법으로 드러내는 ‘소리 찾기’가 이미지상으로만 ‘보이는 소리’일 뿐 실제로 물리적 음의 파장을 담고 있지 않은 ‘들리지 않는 소리’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 소리를 더욱 자유롭게 상상하고 표상한다. 그의 작업이 조각의 언어를 고수하면서 ‘소리의 가시화’를 도모한다고 할 때 자연스럽게 유발되는 경직된 기념비성이나 장식성이 늘 고심해야 될 그에게 남겨진 관건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그의 작업은 비교적 자유로운 초현실주의적 상상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의 바라는 바가 있다면, 작가 임형준이 그의 작업 속에서 드러내는 단순함과 상징성 속에서의 ‘낯선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그의 보이는 소리를 읽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그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일 게다. 이런 차원에서 그의 작업이 드러내는 명징하거나 단순한 구조는 조각으로 풀어내는 그의 ‘소리 찾기’를 정당화시켜 주고 의미 있게 해주는 장점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작업을 관성적으로 유형화시키고 기념비적 시리즈물로 귀속시키는 동인이 되는 한계이자 딜레마가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콜라주된 최근 작품들은 그의 이전 작업의 의미를 곱씹어 보고 새로이 정초하게끔 모색하는 일련의 의미 있는 새로운 시도로 평가될 수 있겠다. 한편으로 필자는 그것을 소리의 원형적 실재 찾기로부터 그것의 실재 찾기로의 전이 과정으로 간주해 보고자 한다. ●
출전/
김성호, 「보이는 소리, 그 원형적 실재 찾기」, 『미술평단』, 겨울호, 2025. (2005년 미술세계 발표 글 재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