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한국의 명품족에게 그런 인식이 뿌리내리기에는 요원한 모양이다.얼마나 냉대를 받았으면 정부가 보란 듯 나서 미술품을 구입하는 행사를 연출했겠는가.지난달 하순 정부 부처 장관들이 코엑스에서 열린 2004 한국국제아트페어를 관람했다.이창동 전 문화관광부장관은 이우환의 ‘조응(600만원)’과 권터 그라스의 석판화(72만원)를 구입했다.다른 장관들도 부처 업무추진비내에서 총 7점의 미술품을 사들였다.
장관들이 솔선수범해 미술품을 사는 모습은 침체된 미술시장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물론 화랑협회가 부탁해 이뤄진 것이다.장관들이 앞장서 미술품을 사는 모습이 뉴스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미술품 구입을 사치나 허영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그래서인지 장관들은 ‘구입한 미술품을 청사내에 걸겠다’고 입방아를 찧는 분위기에 못을 박았다.오죽하면 이런 깜짝행사를 기획했을까?
출판계는 더하다.공들여 책을 펴내도 찾는 독자가 없다.불법 복제가 성행해 학술서적이 거의 출간되지 않는다 .한 출판사 사장의 탄식에 기가 막힐 뿐이다. “학술서를 쓰겠다는 교수를 찾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기다.힘들게 책을 내도 80~90%가 반품으로 돌아온다.”학술서적이 출간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내 지식체계가 뿌리채 뽑힌다는 것을 뜻한다.
10년,20년 후에 드러날 후유증을 생각하면 말문이 막힌다.이를 뒷받침하듯 한국의 문화산업 경쟁력이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진다는 평가결과가 나왔다.
문화관광부는 최근 하버드대 마이클 포터 교수의 다이아몬드 모델로 측정한 문화산업 국제경쟁력 지수를 밝혔다.40점 만점에 한국은 12.44점.가장 취약한 것은 박물관, 도서관 등 문화기반 인프라.
르네상스 시대 학문과 예술이 화려하게 꽃 피운 까닭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군주 영주 등 지배계급과 상인들은 앞다퉈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했다.도서관을 건립하고,책을 출간하고,미술품을 주문하는 것을 상류층의 당연한 도리로 생각했다.학문과 예술을 장려하지 않는 사람은 상류층 행세를 할 수 없었다.심지어 당대 최고의 용병대장인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돈을 받고 싸움을 하는 군인이라는 직업이 무색하게 학문과 예술에 심취했다.
최고 권위의 바티칸 도서관과 맞먹는 도서관을 건립했는가 하면 천재 예술가와 학자들을 자신의 성으로 불러들여 전폭적으로 지원했다.성채 내부도 미술품으로 장식했다.당시 최고 명품은 옷과 구두,핸드백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품이었다.
우리 나라에도 르네상스와 맞먹는 문화 부흥기가 있었다.조선후기 영,정조 시대다.민중의 미의식을 담은 민화,실제 자연을 묘사한 진경산수화,풍속화 등 한국미술의 보석이 된 그림들이 찬란하게 꽃피웠다.영,정조의 문화사랑이 가장 큰 이유였다.
마지못해 아트페어에 나와 작품을 사는 광경을 연출하기보다 진심으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해 구매하는 위정자들을 보고 싶다.
-스포츠서울 200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