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돈영(1939-2023)의 예술세계
오광수 | 미술평론가
한동안 프랑스 파리는 한국 미술가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한국의 미술가들 뿐이랴. 세계 각국에서 파리를 향해 몰려온 미술가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에콜 드 파리”는 파리를 동경하며 모여든 미술가들의 집단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50년대부터 적지 않은 한국의 미술가들이 파리로 진출하였는데 처음은 기성작가들이 중심이 되었다가 나중엔 젊은 미술학도들까지 이어졌다.
파리로 간다는 것은 국제 무대로 나간다는 것이고, 국제무대에서 미술가로서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에 기인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러시아에서 처음 파리로 나온 마르크 샤갈은 자신은 파리에나 오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노라고 했다. 마치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자신을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구에서 간 김환기 역시 이와 비슷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여기와서 느낀 것은 시정신(詩情神)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아져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와서 구체적으로 알아진 것 같소. 밝은 태양을 파리에 와서 알아 낸 셈”이라고 하였다. 샤갈이나 김환기가 말하고 있는 것은 파리에와서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였다는것이다.
70년대 후반 파리로 진출한 조돈영 역시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는 욕구를 지녔음은 물론이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있는지를. 자신의 예술이 어떻게 평가되어지는 지를 파악하려는 의도로서 말이다. 이는 자신을 객관화해보는 데서 가능한일에 다름아니다.
조돈영은 파리에 진출한 80년대부터 왕성한 활동을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82년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재불 한인 미술전》을 비롯하여 《앙데팡당전》, 《콩파레종전》, 《그랑 에 죤 도쥬르뒤전》 등에 참가하는가 하면 국내에선 그로니치 화랑, 동산방 화랑, 선화랑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가로서의 위상은 급속히 파리 무대를 중심으로 확고해져 갔다.
조돈영의 파리를 무대로 한 자기 확인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더욱 다진 것이 되었고 자기 예술에 대한 신뢰를 더욱 강화한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쉽게 유행에 휩쓸린 환경에서 자기 세계로의 집중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점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조돈영의 작품에서 만나는 모티프로서의 성냥개비는 그의 작가적 위상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 것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내적 삶의 확고부동한 자화상이며 기억의 불변한 존재인 작은 불꽃들은 인식의 면밀함을 항상 살피는 그의 정신”이라고 피에르 레스타니(프랑스 미술 평론가)는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의 조돈영의 예술과 인간을 인상깊게 피력한 것이었다. 인간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고 일체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유행의 중심지에서 오직 자신에 충실한, 그러기에 더욱 겸허하고 고독한 가운데서 자기 예술을 지켜낸 작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독일의 평론가 한스 데오도르 프레밍 역시 성냥개비의 모티프가 주는 예술의 내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주고 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자장(磁場)이 지배하는 것처럼 성냥개비들이 그의 화폭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종종 상징적인 의미로서 불꽃을 통해 동양적인 선험적인 개념에 따른 무한의 공간에서 인간의 요강과 정열을 드러내 놓고 있다.”
조돈영이 선택한 모티프로서의 성냥개비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임에도 상징하는 바, 의미하는 바의 세계가 깊고 넓다는 것은 많은 비평가들이 언급하고 있다. 성냥개비가 단순한 객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비유되는 점은 인상적이다. 생명이 없는 소소한 이상의 한 작은 물체가 이토록 많은 상징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작가는 성냥개비를 그리지만 단순한 성냥개비로 남지 않고 예상할 수 없는 생명체로 되살아나고 있다는 데서 경이로움을 더해준다. 그려진 대상은 어느덧 단순한 대상이 아닌 생이 약동하는 생명체가 되고 있다는,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작가의 창작의 영역을 떠나 스스로 존재할 것이라는 의지를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냥개비는 아직도 불이 붙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고, 불꽃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이기도 하고, 불꽃이 사라진 흔적으로서 남아나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도 불꽃이 일어나고 바로 사라지는, 그래서 희어진 재만 남아 난 상태가 가장 극적이다. 자신을 불태우면서 사라지는 존재의 처연함이야말로 얼마나 극적인가.
그러면서도 성냥개비가 만드는 여러 모양은 단순히 연민의 감정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정연한 군대의 행진 같기도 하고 흥에 겨워 자신의 전체를 휘젓는 격정적인 춤사위로 혈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펼쳐보이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속삭이듯 은밀하게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은 정답기만 하다. 인생은 덧없는 것이기도 하고 참으로 뜻깊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가 하면,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소리쳐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랑의 맹세가 풀 앞의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을 아느냐고 속삭이는 것도 같다.
세월이 가면서 인간도 그 나름으로 익어가듯이 성냥개비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무게를 더하고 풍요로운 환경을 만드는 것 같다. 90년대를 지나면서 그의 화면은 더없이 깊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때로는 격렬한 표현의 장을 열기도 하지만 전면화를 통해 내면으로의 침잠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보인다. 화면은 더욱 화사한 색채로 덮이는가 하면 그 속엔 어떤 생명의 기운들이 아우성치듯 솟아오르기도 한다. 푸른 공간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가을날 나뭇잎 같기도 하고 봄날 들녘에 피어 오르는 새싹 같기도 한 섬세한 생명의 기온들이 화면을 채운다.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의 화면을 누비던 성냥개비의 또 하나의 변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성냥개비가 보여주었던 그 많은 은유들과 상징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 음악에서와 같은 리듬의 향연이 아닌가 한다.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보다 선율 자체가 음악으로 남아나듯, 그의 화면은 이제 스스로 깊이와 넓이를 지닌 색채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해외로 진출했던 작가들이 말년에 고국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는 것을 보아 오는데, 조돈영은 그가 진출한 파리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마치었다. 그가 고국에 돌아와 여생을 좀 더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면, 그의 예술을 정리하는 시간이 주어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사람은 가고 그의 예술만에 남아 우리 곁으로 돌아봤다. 삶의 무상함과 회한을 지니면서도 그의 예술이 우리 속에 남아 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