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67)의 면모를 단순히 화가라는 측면으로만 국한시켜 보기에는 다소 난감한 지점이 있다. 물론 그는 1930년대 초에 도쿄(東京)미술학교를 졸업한 근대 양화 도입기의 주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민족회화에 대한 자각과 함께 제작의 방향을 선회해 우리 그림을 그린 의식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해방 직후의 여건으로는 나라 전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과 자격을 갖춘 미술교육자이자 미술평론가이기도 했고, 이태준(李泰俊)의 『무서록(無序錄)』(1941)과 더불어 근대 수필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근원수필(近園隨筆)』(1948)을 지은 문사이기도 했으며, 동양 정신의 정수와 법식을 체화하고 있었던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기도 했다.

김용준, 〈학수(隺壽)〉, 1941, 종이에 먹, 수채, 23.8×35.5cm
그는 후배나 제자들에게 작업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추상적 컴포지션에 경도되어 있던 김환기(金煥基)가 항아리나 접시, 학, 모란 등의 전통 소재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사실은 그의 권유에서 비롯된 것이다(2010.4.15, 백영수 구술). 거기에다 『조선미술대요』(1949)나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1958) 등의 기념비적 저술로 미술사가의 역할까지 수행했던 그의 존재감이란 가히 동시대 문사철(文史哲)의 총화이자, 시대정신의 핵심을 품은 거목이었으며, 고유섭(高裕燮), 윤희순(尹喜淳) 등과 더불어 한국미론 연구에 있어서의 남상(濫觴)이었다.
그는 후에 월북했음에도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비판하면서 순수주의 미술의 입장을 견지했고, 참여계열인 카프(KAPF)의 대척점에서 향토색론이라는 미적 관점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기질적으로 유물론보다는 오히려 유심론에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그의 월북이 정치적, 이념적인 이유라기보다는 6·25 당시 인공치하(人共治下)에서 서울대 미술학부장을 맡게 된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김용준, 〈흑조〉, 1940년대, 종이에 먹, 수채, 31×17cm
향토색론은 이인성(李仁星) 등 당대 주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근대미술의 중요한 흐름과 계보를 형성하게 된다. 그는 조선의 미술에서 ‘고담(枯淡, 마르고 맑음)’, ‘청아(淸雅, 맑고 산뜻함)’, ‘한아(閑雅, 여유와 우아함)’, ‘장한(長閑, 유장함과 여유)’을 미적 가치의 핵심으로,‘구수함’, ‘시원스러움’, ‘어리석음’, ‘아담함’을 조선 민족의 특색으로 논급하기도 했다. 또한, 고구려의 ‘웅혼·장대’, 신라의 ‘숭고·전아’, 고려의 ‘아담·화려’, 조선의 ‘청렴·소박’을 거론한 후, 그 모든 특색을 관통하는 미적 특질로 ‘전아’와 ‘온화’를 들기도 했다.
동양적 정신주의의 근원을 경주, 개성의 출토품이 지닌 특색인 ‘정려교절(情麗巧絶)한 미술 공예품, 정려섬세(精麗纖細)한 선조와 아담풍부(雅淡豊富)한 색채’에서 발견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팔대산인(八大山人, 朱耷), 『안만첩(安晩帖)』속 〈팔팔조도(叭叭鳥圖)〉, 1694, 종이에 먹, 31.8×27.9cm
〈학수(隺壽)〉는 그의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시절인 신사년(1941) 여름, 누군가의 수연(壽宴)을 기념해 그린 그림들을 모아 만든 화첩 중에 포함되어 있던 작품으로, 백문방인(白文方印) 용준(瑢俊)과 주문방인(朱文方印) 매정(梅丁)으로 관지(款識)했다. 낙원표구사 대표 이효우 구장품으로 2010년 한 경매에 출품되었다. 학처럼 오래 살라는 뜻으로 그려준 듯하다. 문인화 풍의 묵화임에도 서양화를 공부한 화가의 데생력이 잘 드러나 있으며, 몇 선이 안 되는 간결한 필획으로 한 세상 살며 많은 풍파를 겪고, 이제는 조용히 쉬고 싶은 노경의 심회를 적확하게 은유하고 있다. 담백한 선조에서 풍기는 고아한 화의(畫意)가 ‘편안한 만년’이라는 뜻의 ‘安晩’과 상통할 뿐 아니라, 화풍에 초월의 정신 풍경과 일격(逸格)의 선미(禪味)가 배어나고 있다는 점에서도, 팔대산인의 『안만첩』 속 그림의 기분과 향취를 잠시 느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