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기
#250
[문화산책]문화가 겁나는 시대
문화, 이건 정말 성가신 말이다. 인문학을 대학에서 가르치는 처지로도 문화를 말하는 것은 별로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학문적인 정의를 내리기가 우선 까다롭다. 그렇다 보니 함축적인 의미가 뒤죽박죽이고 또 연상되는 관념도 뒤숭숭하다. 함축적인 의미로는 가령 ‘문화주택’ 또는 ‘문화적 환경’ 등의 보기에서 그렇듯이 세련된 것, 멋진 것 등이 포함되지만 막상 문화라는 그 말 자체의 개념 내용은 세련된 것도 못 되고 멋진 것도 아니다. 워낙 아리송하니까 그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을 실없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러니 문화를 말할 때는 반드시 무엇인가 전제를 두거나 무엇이든 화제를 어느 한 테두리에 모아야 한다. 가령 인간이 만들어서 사회에서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운영하고 있는 모든 것이 문화라고 할 때, 어안이 벙벙해지겠지만 일부 문화인류학자는 정색을 하고 반긴다.
‘베토벤의 소나타는 문화다. 그렇듯이 남편에게서 당하고서 화가 난 아내가 부엌에서 냄비 바닥을 두들겨대는 소리도 문화다.’ 이건 여간 당돌하지 않다. 두어 시대 전만 해도 비문화적인 야만인의 발언쯤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보기는 미국의 당대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가 한 말씀이시다. 베토벤의 음악이 문화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문화는 예술과 쌍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문화는 인간 이념의 으뜸가는 표현물, 인간 정서의 승화된 아름다움 등을 의미했다. 인간이 필경 도달하고 또 공유해야 할 드높은 가치가 다름 아닌 문화였다. 이 같은 문화의 일가붙이 중에서는 예술이 맨 앞에 선 것이지만, 문학 철학 수사학 종교 등 이른바 인문적 교양이 이에 버금했다. 이들은 문화의 한동아리들이었다. 문화는 이래서 하늘 높은 것을 동경해 왔다. 인간이 이룩하고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의 최정상에 당당히 또 거룩하게 군림하고 있었다. 덩달아서 인간도 끝없이 미화될 수 있었다. 르네상스가 그려내고 빚어낸 인간 형상은 이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한데 앞에 인용한 문화인류학자의 발언에서 베토벤이 여간 봉변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면서 문화는 진흙바닥이나 부엌바닥으로 전락한 꼴이다. 악성(樂聖)이 일개 주부로 전락하고 피아노가 냄비 바닥으로 꼬나 박히고 음악이 소음으로 내리꽂히고 드디어는 ‘열정’이며 ‘비창’이 화풀이며 신경질의 발작으로 나가떨어지고 있다. 전대미문의 추락이다. 한데 미국의 그 인류학자가 발언했을 때만 해도 베토벤과 화난 주부는 문화로서 공존하고 또 문화로서 등가(等價)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문화에서 베토벤의 실체는커녕 그 그림자마저도 엷어져 가거나 아니면 구석으로 몰려가고 있다. 냄비 바닥 두들기는 주부의 위상이 문화에서 더 커졌다. 이것이 오늘날 문화가 처한 상황이다. 그렇다. 문화는 이제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향해서 손짓하지 않는다. 우리 둘레에서 또는 우리 앞에서 이제 문화는 상품과 소비와 어깨동무하고는 우리가 동참하기를 채근하고 있다. ‘문화는 사람들의 행동과 사고의 양식이다’라는 정의는 그래서 생겨났다. 하지만 문화의 일상화며 저자세는 좋았지만 그 역리(逆理)며 부작용에 이제 관심을 쏟아야 한다. 쾌락이 타락과 짝짓고 풍요가 안이와 야합한 채 사회며 인간이 날로 비속화하는 징조가 이미 너무나 농후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문화가 겁난다. 바야흐로 문화가 무섭다.
- 세계일보 2004.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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