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쉽게 만든 책이 생명이 짧다
언젠가부터 식구들의 외식이 잦아졌다. 김치를 사먹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취미 생활이 늘어나 주말이면 더 바빠진 게 문제였다. 엄마로서의 역할이 그리워진 나는 실로 오랜만에 김치를 담갔다. 모처럼 담그다 보니 양념들의 양을 조절하는 감각이 둔해졌다. 맛을 보니 생강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걱정이 되어 딸아이에게 먹어보라 했더니 “엄마의 김치 맛이네, 뭐.” 하고 한마디로 평한다. 아, 내가 담그는 김치 특유의 맛이 아직 죽진 않았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집집마다 모두 김치를 사먹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어느 집을 가도 김치 맛이 똑같다면 음식상은 또 얼마나 삭막할까.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가 되면서 어느 산업에서든지 차별화가 주요 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 출판도 마찬가지이다. 차별화 전략은 불황일수록 치열하게 떠오르는 화두이다. 그래서 위기는 기회이고 불황에 명품이 만들어진다는 말이 생긴지도 모른다.
기획회의 때마다, 출간했으면 하는 책들의 기획안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책은 출간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나은 정도에 그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반드시 출간했으면 하는 책이 있다. 후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다른 출판사에서 이미 비슷한 책을 출간했거나 출간할 가능성이 있는 책이 있고, 우리 출판사가 아니면 출간하기 어려운 책이 있다. 그런 책이야말로 바로 치열한 차별화 전략에서 나온 책이다. 당연히 전자의 책들은 출간 결정에서 배제된다. 출간이 결정된 책들은 뼈를 깎는 고통 없이는 만들기 어려운 책이 대부분이다. 쉽게 만들 수 있는 책은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또 수명도 짧다. 책의 수명은 책에 쏟는 고통의 무게와 비례한다. 하루에도 수십 종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건 안 냈으면 좋았을 책들을 보았을 때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그루의 나무를 죽여야 한다. 지구의 허파인 숲을 갉아 먹고 태어난 게 책이다. 그러니 어찌 한 권의 책의 출간 결정을 소홀히 할 수 있으랴.
출간을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렇게 해서 태어난 책을 살려나가는 마케팅 전략이다. 꼭 필요한 책, 정성들여 만든 책들이 팔리지 않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몹시 아프다. 책이 팔리지 않는 이유야 많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독자들이 책을 안 읽는다, 정책적 뒷받침이 소홀하다는 말만 되뇌이고 있을 수는 없다. 책마다 그 책의 특징에 맞는 마케팅 전략이 있다. 문화 상품인 책도 소비재와 마찬가지로 이제 찾아가는 마케팅 전략이 필요한 시기이다. 핵심 독자층을 찾아가는 지름길을 찾는 작업이 먼저 이뤄져야 하고, 그 길을 찾았으면 그 길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가는 마케팅이 필요하다. 출간 결정을 신중히 해야 하듯, 그리고 출간이 결정된 책을 만드는 과정이 고통스럽듯, 그 책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 독자를 찾아가는 작업 역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책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이십 년 넘게 김치를 담그는 동안 나만의 비법이 생겼다. 양념을 버무릴 때 멸치 젓갈과 새우 젓갈을 적당히 섞어 넣고, 밥을 끓여 죽처럼 으깬 것을 좀 많이 넣는다. 마지막에는 볶은 콩가루를 살짝 뿌린다.
하지만 책 만드는 일은 제작 외에는 기획도, 편집도, 마케팅도 아직 매뉴얼화된 비법이 없다. 책 한권 한권은 예술품이다. 예술품을 만드는 데 치열한 장인 정신 외에 무슨 비법이 있겠는가.
- 세계일보 8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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