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탑]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며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반가사유상이 모셔져 있다. 오른 손가락을 턱에 댄 채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이 불상은 소박하면서도 단순화된 조형으로 고대 조각의 백미로 일컬어져왔다. 일찍이 불상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은 1897년 이를 국보 1호로 지정, 나라 안팎에 자랑해왔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가장 원만하며 가장 영원한 사유의 모습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바로 그 조각품이다.

그런데 이 목조 반가사유상은 우리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불상의 한반도 전래설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리 학자들 사이에서 주로 제기되었으나 요즘은 많은 일본 학자들도 같은 주장을 내놓고 있다.

학자들은 재료가 적송(赤松)인 데다 통나무를 파들어가는 조각기법이 일본에서 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점을 들어 반가사유상이 신라나 백제에서 건너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632년 신라 사신이 가져온 불상을 진사(秦寺·고류지)에 안치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도 방증자료의 하나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목조 반가사유상이 앞서 제작된 한국의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이다. 조각의 구도가 일치하는 것은 물론이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의 형태, 가슴과 허리의 처리, 무릎 밑의 옷자락과 의자 양옆으로 드리운 허리띠 장신구 등 어느 것 하나 닮지 않은 게 없다. 다른 점은 금동과 나무라는 재료 정도라고나 할까.

우리에게 더욱 자랑스러운 일은 국보 83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금동 반가사유상이 있다는 점이다. 국보 78호로 지정된 이 금동상은 83호와 쌍벽을 이루며 ‘불상의 나라’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다. 금동불상으로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이 둘뿐이다.

두 불상의 예술적 가치를 비교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난형난제요, 막상막하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불상의 구도와 입체적 단순미를 들어 83호를 높게 치기도 한다. 혹자는 제작 시기가 앞서고 보관의 장식에서 나타나는 섬세한 조각 등을 평가하며 78호의 손의 들어주기도 한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였던 시절 나무 아래에서 인생의 번뇌를 깨닫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반가사유상에는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이 배어난다. 번뇌하는 상이라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지만 슬픔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입가에서는 살며시 미소까지 흘러나온다. 그 감동은 ‘인자스럽다, 슬프다, 너그럽다, 슬기롭다 하는 어휘들이 하나의 화음을 빚어내는 듯하다’(미술사가 최순우)는 표현 그대로이다.

신라금관과 함께 우리의 대표적 문화재로 꼽히는 국보 제78호와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서 나란히 시민들과 만나고 있다. 한국 미술의 기념비적인 두 작품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16년 만이다. 80평의 넓은 전시장 중앙에 반가사유상 단 2점만을 배치해 집중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것도 특징이다.

전시장의 사방에 의자를 비치한 것은 반가사유상과 함께 ‘사유’해보라는 박물관측의 배려이다. 하루하루 쫓기는 각박한 세태에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짬을 내 자신을 돌아보는 게 필요하다. 이번 주말에는 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과 함께 사색에 잠겨보자. 그리고 석가모니처럼 생로병사까진 고민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누구인가’라고 조용히 물어보자.

- 경향신문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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