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기
#272
[정동탑] ‘기증문화’ 꽃 피우려면
1970년대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성문영어’ 시리즈는 필독서였다. 당시 ‘성문기본영어’ ‘성문핵심영어’ ‘성문종합영어’ 등 성문 3부작은 ‘영어 교과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성문시리즈의 저자 송성문은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성문영어’ 저자로만 알려졌던 송성문씨가 지난해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문화재 101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가운데에는 국보 4건, 보물 22건 등 국가 지정문화재가 26건이나 들어있었다. 중앙박물관 소장 국보·보물이 모두 170여건인 점을 감안하면 송씨의 문화재 기증은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국보·유물 기증 못지않게 특기해야 할 사항은 기증자인 송성문씨의 태도이다. 박물관에 따르면 송씨는 ‘기증실 마련’과 같은 어떠한 대가나 조건을 달지 않았다. 문화재를 전달할 때에도 아들에게 대신하게 하고 본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송씨와 인터뷰하기를 기대했던 언론들은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그의 증명사진 하나를 게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한’ 송씨의 공덕 때문일까. 이후 문화재 기증이 부쩍 늘고 있다. 지난달 불문학자 서정철씨는 서양 고지도 150여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달 들어서만 백정양씨로부터 청동거울 등 790여점을 기증받은 데 이어 매듭장 기능보유자 김희진씨로부터 매듭작품 400여점을 기증받았다. 지난 4월에는 오일육씨가 선친인 오세창의 서화·전각 400여점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기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화재 수증이 눈에 띄는 곳은 국립중앙박물관. 이 박물관에는 올 들어서만 모두 8명으로부터 5,000여점에 달하는 문화재가 기증됐다. 이는 지난해 수증 유물 798점에 비해 7배 가량 늘어난 수치여서 박물관 관계자들을 고무시키고 있다. 이처럼 기증이 늘어난 것은 내년 10월 용산 새 박물관 개관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무관치만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기증문화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말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지난해 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유물 13만여점 중 기증유물은 1만6천7백여점으로 10%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박물관 개관 이후 문화재 기증자 수는 한해 4명꼴인 245명에 불과하다.
이는 선진국 국공립 박물관의 전시품 대부분이 기증유물로 채워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운 수치이다. 더구나 새 박물관의 전시장 규모를 감안하면 문화재 기증 활성화는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용산에 들어서는 새 국립중앙박물관은 전시실 면적만 8,000여평으로 현 경복궁 박물관의 4배에 달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용산 박물관의 전시실을 채우려면 최소 1만2천여점의 유물이 필요하다”며 “현재로서 전시실을 꾸밀 수는 있지만 결코 충분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 중앙박물관은 개관에 맞춰 연간 문화재 구입예산을 70억원으로 늘리는 한편 기증 확대를 위한 방안을 강구중이다. 박물관측이 내년부터 기증유물에 대해 일정액을 지급하는 ‘기증 보상금제’를 도입하려는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일각에서는 기증자에 대한 세제감면 혜택 등도 다시 검토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기증 확산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문화재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송성문씨는 힘들게 수집한 문화재를 기증하며 “언젠가는 국가에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문화재를 사유재산이 아닌 공공의 자산으로 인식하는 ‘문화재 공개념’ 정착이 절실한 때이다.
- 경향신문 2004.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