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에 서서] 예술은 말없는 세계인가


시인 성찬경 선생의 ‘중독’이라는 최근작은 “자나깨나 음악 속에서 숨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소리 중독’을 말하고 있다. 중독의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병일 것이다. 이 병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설명이 없다. 음악은 다른 비슷한 행위, 가령 말을 주고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통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에서 말이 너무 앞서면 음악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요즘 음악을 접하는 가장 손쉬운 통로는 라디오의 음악 방송이다. 그런데 이 방송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음악에 붙는 잡담 또는 해설을 방송 공해로 여긴다. 그럼에도 해설류의 잡담은 늘어가고 음악회에까지 해설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예술은 무언의 소통행위라는 면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음악이 그것을 가장 순수하게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말이 나온다. 문학은 말로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전달하는 내용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반드시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쓰는 말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다. 어떤 의미론자는 보통의 의미맥락이나 문법을 벗어나면서 이루어지는 말이 시라고 한다. 그림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화폭에 재현된 ‘항아리, 접시, 껍질을 반쯤 벗겨놓은 레몬, 호두, 빵’-이러한 것들이 전달하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은 그러한 물건이다. 그림에 그려졌든, 그러지 않든 무엇인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을 분명하게 밝히기는 쉽지 않다.

예술이 주는 위안의 큰 부분은 그것이 무언의 전달이며 침묵의 세계를 가리킨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말들이 차고 넘치는 정보와 소통의 시대인 현대에 와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예술의 종말’ ‘예술사의 종말’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말이 없는 예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은 이제 정보전달 매체의 일부가 되어 간다. 예술도 이제는 고고하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말을 걸고 충격을 주어야 한다. 설치미술이 등장한 것은 이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다. 관객을 끌어들여 거기에 작용을 가하는 데에는, 벽에 조용히 걸려 있거나 홀로 서있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설치미술의 현장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광주에서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지만 여기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설치이다. 전시의 주요 의도는 이용우 예술총감독이 말하고 있듯이 관객의 참여다. 작품들은 처음부터 비엔날레측에서 정해준 ‘참여자’와의 대화를 거쳐서 제작되게 고안되었다. 그러니까 소통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출품된 것이다.

- 관념벗은 광주비엔날레 -

출품된 작품들이 대부분 강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주로 정치적 성격의 것이다. 많은 메시지는 전쟁, 군사독재, 폭력, 산업주의, 환경파괴의 부정적 결과에 대한 것이다. 대중 전달의 경우에 그래야 하듯이, 이러한 것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의식하고 있는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전시회를 보면서 관객들은 이에 대하여 의식을 새로이 할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참석한 수상작 심사위원회에서도 의도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정치적 작품들이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메시지가 예술작품의 존재를 완전히 결정하지는 아니하였다. 오늘의 세계 정세로 보아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최초의 원자탄 제작에 사용된 기계장치들을 수집하여 전시한 짐 샌본의 설치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설치되어 있는 기기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기계장치와 가공할 폭탄의 파괴력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의 엄청남에 전율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장치들은 상상적 변용을 거치지 않은 자료에 그친 감이 없지 않다. 수상작이 되지 못한 것은 여기에 관계될 것이다.

상상력의 한 기능은 체험적 진실을 밝히는 수단이 되는 데에 있다. 정치적 사건을 다룬 설치에 광주사태를 주제로 한 것과 부안 원전폐기물 처리장 반대운동을 주제로 한 것이 있는데, 외국에서 온 심사원들에게 앞의 것은 주의를 끈 데 반하여 뒤의 것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것은 반드시 광주사태가 국제적으로 알려진 데 비해 부안의 문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광주사태의 설치는 소박한 대로 관계되어 있는 인간적 고통의 기억을 다시 살리려는 것인데, 부안을 다룬 작품은 문제의 체험적 차원보다 투쟁에 관계된 집단적 행동주의를 강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차이가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메시지가 중요하더라도 적어도 예술의 메시지는 동정적으로 재현되는 삶의 체험적 현실에 근거하는 메시지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예술이 무언의 소통으로 삶의 진실을 전달하는 시대는 가버린 것일까. 앞에서 그림의 소재로 나열한 ‘항아리, 접시…’ 등의 물건은 폴란드의 노벨상 수상 시인 체스워프 미워쉬가 17세기 네덜란드의 사실주의 그림을 찬양하면서 예로 든 것이다. 이 사실주의는 이러한 물건들을 통하여 ‘여기 이곳’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였다고 그는 말한다. 미워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그림에서 나온 것과 같은 목록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최초의 중요한 저작 ‘묶여 있는 마음’은 공산주의 체제하에서의 그의 경험을 말한 책이다. 공산주의의 예술론은 그 도덕적 당위성이나 논리적 타당성에 있어서 지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론이다. 그런데도 예술가가 거기에 승복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예술가의 본능은 강조되는 이데올로기의 진리가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 맞아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온다. 이러한 모순에 고민하던 미워쉬는 결국 공산주의 폴란드로부터의 망명을 택하였다. 이 망명에서 중요한 동기는 물론 이데올로기보다는 그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잔학행위였다.

- 관객들과 대화하는 미술 -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펼치는 유토피아와 그 역사지도가 시인으로서의 그의 삶의 느낌에 맞지 아니한 것도 동기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어긋남의 느낌으로 하여 그는 이데올로기적 정당성과 정치적 잔학성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연관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워쉬의 시에서 주된 관심이 되는 것은 사물과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덧없으면서 불변하는-적어도 그의 관점에서는 영원한 인간의 진실에 대한 긍정이다. 그에게 바른 사회와 도덕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도덕은 구체적인 사물과 고장,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나날의 삶 속에 움직이는 도덕이다.

예술의 진실은 소통의 시대에서도 적어도 그 한 발은 ‘항아리, 접시, 껍질을 반쯤 벗겨놓은 레몬, 호두, 빵’, 그리고 더 보태건대, ‘구름 낀 하늘 아래의 풍경’ ‘작은 집들, 배가 있는 바닷가, 노란색의 얼음판 위에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의 조그마한 모습들’-이러한 사실들에 딛고 있어야 한다.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고통의 사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 미워쉬는 이 ‘리얼리즘’이라는 시에서 이러한 삶의 구체적 사물들의 합창에 목소리를 합치는 일이 자신의 일생의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예술과 삶, 그리고 정치적 이념과 격동을 가장 깊이 체험한 시인이며 지식인의 한 사람인 그는 지난 8월 초 고국의 도시 크라쿠프에서 사망하였다.

- 경향신문 9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