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학교수의 가짜 박사학위에 대한 보도가 몇 건 있었다. 박사학위가 교수 채용에 중요한 요건이 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가짜 학위 사건이 요즘보다 더 자주 등장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를 나 나름으로 궁리해보곤 했다. 가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대학에 취직했을 때 그가 참으로 가짜라면 교육이나 연구에서, 가짜라는 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학위야 어찌 됐든 그가 진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경우 학위증의 진위는 별 의미가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 것이다.
- 가짜와 진짜학위의 차이 -
물론 이러한 생각은 대학의 교수를 단순히 전문 분야 지식의 전달자나 생산자라고 규정한 다음에 가능한 것이다. 교수를 도덕적 모범이라고 보게 되면, 가짜 학위 소지자는 도덕성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박사학위의 진위를 문제삼는 것은 대체로 그 사람의 학문의 진정성을 문제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조금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표(師表)로서의 교수라는 문제를 떠나서도 학문의 윤리와 삶의 윤리 사이에는 일정한 연속성이 있다. 도덕의 관점에서 기본적인 정직성이 없는 곳에 학문이 요구하는 사실과 논리의 엄밀성의 기준이 지켜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는 하나 학위와 학문의 관계만을 볼 때 둘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 세계에서의 진위는 자격증이 아니라 계속적인 수행으로 결정된다. 한번의 학업에 대한 증명이 이 수행의 수월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도덕성 또는 사람됨됨이 문제라면, 그것은 더욱 자격증으로 보증될 수는 없는 것이다.
대학 교수의 학위뿐만 아니라 졸업증을 포함한 다른 형식적인 인증의 경우도 그것과 실력 그리고 사람됨됨이 사이에 확실한 보증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해내는 능력으로 본다면 학교에서 일정한 과정을 학습한 사람보다는 현장에서 일을 배운 사람이 대체로 더 낫다-이러한 사실 조사의 결과에 근거해 미국의 개혁 사상가 폴 굿만은 1960년대에 미국 교육제도의 대혁신을 주장한 일이 있다. 초·중·고 교육을 마친 모든 젊은이들에게 현장 수련의 기회를 주고, 대학은 이론적인 지적 욕구를 갖는 직장 경험자를 위해 순수 학문의 전당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현실적인 제안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제도 하에서는 사람들의 능력이 증명서 그리고 그것의 근거가 되는 짧은 시간의 시험으로 측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능력은 상당 기간 동안 지켜본 결과와 성실성 그리고 사람됨됨이의 총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총체적인 능력은 확연하게 정의될 수 있는 공동체 내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 물론 그 신빙성은 공동체의 진정성을 전제한다. 관여된 공동체 자체가 일정한 도덕과 지식의 기준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평가가 믿을 만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물론 거기에도 한계는 있을 수 있다. 공동체는 대부분의 경우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에 억압적인 제어장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증·시험으로 능력결정 모순 -
그러나 간단히 생각하면, 공동체의 요건은 신뢰와 인간 능력의 우발성에 대한 낙천적 믿음으로 족하다고 할 수도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의 미국 여행담에는 출신이나 학교 등의 배경을 확인하지도 않은채 본인의 말만 듣고 기차에서 만난 사람을 자신의 사업장에 채용하는 사업가를 보고 놀라워하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신뢰의 모험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사회의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은 기회와 모험과 우연 그리고 능력과 성실한 수행, 이러한 것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한데 엮어져 일어나는 기적이다. 부르제가 본 미국 사회는 이러한 능력과 우연의 놀이를 낙관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인간의 능력이 참으로 몇 시간의 서면 시험의 성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오랜 과학적 실험으로 확립된 듯한 소위 지능 검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사회적 효과를 가진 ‘인간의 오측(誤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시험 성적의 경우 오측의 확률이 더욱 클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지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가장 믿을 만한 지표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다만 믿을 만한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시험 성적의 중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계량화된 성적은 경쟁의 장에서 싸움을 방지하는 데 중요한 수단으로 일정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절대적 의미를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평가의 문제를 거기에 수렴시키는 것은 인간 능력의 사회적 동력학을 잘못 이해하는 일이다. 인간 능력의 평가는 보다 총체적으로 그리고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더불어 인정해야 할 것은 사람의 일에는-물론 대학 입시의 경우에도-엄밀한 보장이 존재하기 어렵고 우연과 모험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금의 시점에서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야 하는 학생들이나 학부모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한가한 이야기밖에 되지 않겠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서 지나친 학교의 서열화나 그로 인한 교육과 사회의 비정화를 완화하기 위해 가끔은 상기해야 하는 이야기다.
- 大入평가방식 변화필요 -
다시 가짜 학위의 문제로 돌아가자. 요즘 대학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진짜 학위를 가졌더라도 계속 업적 심사를 받지 않으면 안되게 돼 있다. 이 사실은 바로 학위가 학문의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시행되고 있는 제도는 자격증 제도를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준다. 평가는 평가의 범주를 한정하고 기준을 정할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요즘 우리 대학들에서 평가의 결과는 대체로 수량적 측정의 형태로 집계된다. 그런데 미리 정해놓은 범주와 기준 그리고 계량화가 사람의 정신의 업적을 헤아리는 가장 좋은 척도는 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미리 정해 놓은 측정의 기준들은 참다운 창의적 업적을 바르게 알아보지 못하게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평가제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하나는 객관적 평가에 대한 허망한 믿음이다. 진정으로 객관적인 것은 깊고 넓은 주관적 평가다. 그것은 온전한 학문의 공동체 안에서만 형성된다. 대학입시와 같은 데에 이러한 이상을 현실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을 되돌아보고 현실을 그에 견주어 평가해 보는 것이 부질없는 일만은 아니다.
- 경향신문 200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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