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비판이 일던 서구에서도 그러하지만 한국에서 특히 그러하다. ‘한류’라는 말로 표현되는 한국문화 해외진출의 의의를 간단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를 환영하는 것은 그것이 경제적 진출과 민족적 국가적 위신의 선양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같은 심리는 해외에서 이름을 떨치는 기업들에 대한 국민적 태도 밑에도 놓여 있다. 민족은 많은 일에 있어 정당성의 근거가 되지만, 한류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의 밑에는 경제 민족주의가 들어 있다.
한류와 같은 현상에서 느끼는 자부심에 이의를 달 수는 없다. 싫든 좋든 국제적 경쟁 속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상황에서, 수입 일변도로 밖으로부터 기술과 제도, 상품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알게 모르게, 열등한 위치를 강요당하였던 나라가 이제 문화수출국이 된다는 생각은 긍지를 되살리는 데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문화 일반을 전적으로 경제와 정치 그리고 국제적 경쟁력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일이다.
문화산업을 비판적으로 말한 사회이론가들의 비판의 핵심은 문화의 산업화가 그 자율성을 말살한다는 것이었다. 문화가 다른 목적에 의하여 정당화될 필요가 없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존재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문화의 자율성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기 때문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예술작품은 칸트식으로 말하여 “목적이 없는 목적성”을 나타낸다. 윤리적으로 이것은 인간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러나저러나 일체 경제나 정치, 민족이나 국가라는 틀 속에서만 존재의의를 얻게 되어 있는 삶이 행복한 삶일 수는 없다.
<자율성과 경제논리 사이
그러나 아무리 독자적인 영역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문화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삶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면, 그것을 존중할 이유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전통적으로 문화의 자율성은 삶의 물질적 구속을 벗어날 만한 특권적 위치로 인하여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비로소 그것은 사람의 활동의 어떤 부분, 어떤 국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람의 존재의 이유 없는 목적성을 확인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많은 다른 일이나 마찬가지로 그 존재방식의 모순이 바로 문화가 현실에 작용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화와 경제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문화 또는 인간의 정신적 가치는 반드시 경제에 종속됨으로써만 경제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와서 많이 이야기되는 미국과 유럽 사회의 대조는 이 관계의 복잡성을 예시해준다.
미국은 아마 오늘날 가장 순수하게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논리는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이에 대하여 문화는 정치와 경제 밖에 있는 중요한 삶의 구역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이 적극적으로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은 오락산업의 일부가 됨으로서이다. 상대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유럽에서 문화는 조금 더 그 나름의 무게를 가진 자율적인 존재로서의 위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나 경제적 의의가 없는 문화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정당한 지출로 인정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적어도 문화적인 고려 또는 그것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회 윤리적 고려가 정치와 경제에 반영된다는 점에서는 그러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경제나 정치 이외의 보다 복합적인 가치와 목표를 체제 속에 수용하는 유럽 여러 나라들의 경제성적이 미국을 앞지른다는 보고들이다. 뉴욕대학의 정치학자 토니 저드의 최근의 한 서평은 이러한 보고를 잘 요약하고 있다. (서평의 대상에는 최근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제프리 리프킨의 저서가 포함되어 있다.)
유럽 여러 나라가 복지혜택-실업수당, 연금, 유아보육비, 의료비 등의 소위 복지혜택에 있어서 미국에 앞서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노동시간이나 휴가에 있어서도 유럽인들은 더 많은 것을 누린다. 사회적 부의 분배는 훨씬 평등하다. 소득격차에 있어 제조업 부문의 최고경영자와 평균노동자의 수입격차는 미국이 475대 1이고 스웨덴이 13대 1이다. 놀랍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정책에도 대부분의 경제지표들에서 유럽이 미국에 앞선다는 사실이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개인 국민소득이 미국보다 높다는 것은 자주 보도되는 사실이다. 유럽의 시간당 국내 국민총생산은 미국 수준을 7%쯤 밑도는 나라도 있지만 아일랜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 미국을 앞지른다. 유럽의 경제풍토는 중소기업을 창업하고 유지하는 데에 더 우호적이고, 그런 만큼 중소기업은 고용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실업수준은 유럽이 높지만, 임금 수준과 실업보상의 관점에서 고용의 사회조건이 반드시 미국만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의료와 교육에 있어서 투자되는 총액으로 볼 때, 미국은 훨씬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지만, 결과는 유럽에 미치지 못한다(미국의 사립 명문대의 모델에서 배워야 한다는 논의는 교육의 총체적인 결과보다는 일부 효과에 대한 것이다). 유럽의 사회지출은 경제성장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실은 그 정반대다. 윈스턴 처칠까지도 “아이의 입에 우유를 들어가게 하는 것보다 나은 사회적 투자는 없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사회복지는 최선의 투자가 된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삶의 질 차이 어디에서 오나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시 한번 경제 만능주의에 굴복하는 것일 수 있다. 아이의 입에 우유를 들어가게 하는 것은 경제적 투자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토니 저드는 이 서평에서 미국인이 부와 크기와 풍요를 추구하는 것은 행복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유럽인들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경제나 정치는 행복의 구조적 조건은 되지만, 그것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행복은 보통의 삶에 있고, 조금 더 큰 행복은 문화가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긍정에서 온다. 이 긍정이 보통의 삶의 의미를 뒷받침한다. 문화는 삶의 바른 균형의 유지를 위한 힘이고, 경제를 포함하여 삶의 경영은 삶의 조건의 전체와 당면한 과업을 조정하는 행위이다. 문화와 경제는 대등하면서도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에 있다. 유럽이 말해주는 이야기의 하나는 이러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경향신문 2005.2.3 오피니언 '시대의 흐름에 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