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기
#361
[삶과 문화] 예능신동보다 예술가를 키워야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졸업 후 거의 왕래가 없었던 친구여서 그 음성이 더더욱 반가웠는데 꼭 한번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날 찾아온 그의 손에는 예쁘장한 여덟 살짜리 늦둥이 막내딸의 고사리 같은 손이 쥐여져 있었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다는 친구의 얘기는 대략 이러했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이, 특히 아이의 피아노 선생이 말하기를, 딸아이에게 썩히기 아까운 대단한 음악적 재능이 있으니 본격적으로 피아노 공부를 시켜 보라고 한다. 전문가인 내가 오케이만 하면 그 아이를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만드는 데 온갖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상당한 기대감을 안고 온 그 친구를 진정시키느라 많은 조언을 해주어야만 했다. "음악적 재능이 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그러나 모차르트같이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음악적 천재는 그렇게 쉽게 나오진 않는다. 지금 네 딸은 머리가 총명해 피아노 선생님의 말을 너무 잘 알아듣고, 또 잘 따라 하는 것이지, 그것이 곧 음악적 재능이라고 속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아이는 미술을 시켜도 잘할 것이고, 공부를 해도 아주 좋은 성적을 낼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음악적 재능은 신체적으로 더 성장하고, 사춘기도 지나서 어느 정도 감정적으로 무르익을 때 나오는 것이기에, 진정으로 좋은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때까지 기약 없는, 정말 기약 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잔뜩 기대감을 갖고 온 친구는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적이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갔고, 그 뒷모습이 왠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 사회에는 음악영재를 비롯해 미술영재.과학영재.심지어 어학영재까지, 영재가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러한 영재로 선발(?)된 아이들은-그것이 부모의 착각에 기인한 것이건, 또는 누군가의 상술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건 간에-다른 방면으로의 재능을 개발하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 길로만 매진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이것은 마치 따뜻한 햇볕과 다양한 영양을 뿌리를 통해 흡수해야만 무럭무럭 잘 자라는 어린 나무에, 뿌리를 잘라내고 햇볕으로만 자라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이에게 여러 가능성을 다 열어줄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을 하고, 성장한 뒤 본인이 가장 좋아하고 적성에 맞는 직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기다려 주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소질이 있어 보이는 한 가지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경제원칙으로 보면 가장 합당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 이른 선택이 잘못됐을 때의 파장은 너무 큰 것이기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설사 음악적 재능이 확실한 영재라 할지라도 필요 이상의 관심과 후원은 그 아이가 위대한 예술가로 자라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예술가는 완벽한 기량 위에 훌륭한 인간성이 같이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에, 순탄한 기복 없는 인생역정이 어찌 보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다른 20대 젊은이들이 겪는 인생의 기쁨.아픔, 그리고 서글픔도 다 느껴보면서 도달하게 되는 정상의 자리가 더욱 값지고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악기도 소홀히 할 만큼 연애에도 푹 빠져보고,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큰 실연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인생의 모험도 해보면서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때 그 예술의 깊이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뛰어난 예술영재가 나타났을 때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지 말고 조용히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만 보자. 그 영재가 인생의 모든 풍상을 겪고 인간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대가가 되어 우뚝 섰을 때 그의 연주에 마음껏 박수갈채를 보내줄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 중앙일보 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