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기
#365
[경향의 눈] 한 미술사학자를 그리며
“…우리의 희귀한 보석을 발굴하고 알리며 나아가는 것 또한 진보 중의 진보다. 지난 5일 타계한 미술사학자 오주석 선생의 기사는 설 특집에 밀려 부음란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다. 멀리 앙드레 말로까지 갈 것도 없다. …한 사람의 문화인, 한 사람의 미술사학자의 힘이 포항제철에 맞서고 민주화에 맞서는 문화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소설가 함정임씨가 얼마전 경향신문 옴부즈만 칼럼에 기고한 글이다.
-소홀히 다뤄진 ‘오주석 부음’-
이 글을 접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 미술사학자와 학창시절을 같이한 친구로서, 비록 자기일에 매달려 거의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서야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아울러 학문적 인생을 꽃피울 49세의 나이에 백혈병과 싸우다 먼저 간 ‘인간 오주석’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며 문화와 예술, 인간을 사랑했던 그의 혼(魂)을 알려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학창시절 그는 음대진학을 꿈꿨을 정도로 클래식에 조예가 깊었으며, 연극활동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시인이 되겠다며 두툼한 공책을 술기운으로 메우기도 했다. 하지만 학문하는 자세도 진지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동양사학자 고 민두기 교수도 누구보다 그를 신뢰하는 듯했다. 그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을 찾아가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쳐달라고 졸라대기도 했다.
고인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최루탄으로 얼룩지던 유신말기였다. 그의 꿈과 열정을 불태우기엔 너무도 주위 상황이 열악했다. 리버럴리스트 기질이 다분한 그였지만 날만 새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불확실한 현실에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그만은 대학원에 진학해 교수가 될 줄 알았건만, 결국 자신의 꿈을 찾아 ‘마이웨이’를 갔다. 그가 한국 고미술로 방향을 바꾼 것은 의외였다. 당시만 해도 정치, 이념, 경제의 잣대로 본 역사만 있을 뿐, 문화사, 풍속사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겠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젊은 날은 두서없이 허망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옛그림 공부라는 텃밭에 뿌려진 퇴비로서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고인은 단원 김홍도 등 18세기 화가들의 자료 발굴과 독창적 해석을 통해 조선후기 회화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사의 문외한으로서 그의 업적을 심층적으로 언급할 입장은 아니나, 그가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이었는지는 인터넷에 ‘오주석’ 석자만 입력해도 금세 알 수 있다.
그는 왕성한 연구와 저작, 강연 활동을 통해 박물관에 처박힌 한국미술을 대중들의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아카데미즘과 대중성의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 그의 쉽고도 품격있는 언어는 역사학도의 통찰력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함께 빚어낸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미술 연구·대중화 큰 공로-
“그림을 아는 사람은 설명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즐기는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거기 그려지는 대상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그는 예술을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며, ‘옛사람의 눈길’로 옛그림을 감상할 것을 강조했다.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기의 세계를 추구하는 우직함, 과장과 허식을 싫어하는 깔끔함, 남을 포용하고 여인낙락(與人樂樂)하는 여유로움…. ‘한국미의 특강’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등 그의 저작에는 이러한 그의 인간적 향기와 선비기질이 그대로 배어 난다. 학창시절 음악 예술 얘기만 나오면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그의 모습이 선하다.
오주석이라는 ‘희귀한 보석’을 공부하다 보니, 혼이 없는 문화와 예술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 떠올랐다.
- 경향신문 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