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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시대의 흐름에 서서] 문화 교류의 깊이
최근 보도되는 한류 현상은 우리 모두에게 뿌듯한 느낌을 주는 일이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현상이고 궁극적으로는 국제정치에도 적지 않은 힘으로 작용하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문화의 교류가 그러한 차원에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과 관련하여 한국문화의 소개를 위한 전시나 공연들이 준비되고 있지만, 그러한 문화나 문학 행사 중 상당부분은 한류와 같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행사가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간단히 손익으로 계산될 수 없다. 문화의 국제적 소통의 한 소득은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한 심화된 인식이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더욱 쉽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이번 독일 공연 계획에 들어 있는 판소리 심청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문화 교류의 복잡성과 심각성을 가려보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이 붙는다고는 하지만, 한국어의 리듬과 한국의 서사 전통에 고유한 연상들을 가지고 있는 심청가가 독일인에게 쉽게 전달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심청가는 음악이기도 하기 때문에 적어도 음악으로 전달될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음악이 독특한 전통의 어휘와 문법에 기초하여 가능해지는 소리의 형상화라고 한다면, 그것도 오랜 준비와 매개 없이 쉽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심청가로 본 문화적 이질감 -
심청의 이야기 자체도 독일인이나 또는 서양인에게는 이질적인 것일지 모른다. 아버지를 위하여 딸이 목숨을 희생하는 이야기는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심청의 이야기는 서구의 감성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딸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애통한 일이라는 사실이 간과되는 것은 아니나, 딸의 희생은 효의 윤리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서구인의 감성에 이것은 너무 안이한 일로 비칠 가능성이 크다. 수긍할 수 없는 윤리에 기초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공감의 가능성을 줄이고 들어가는 일이다.
아버지와 딸, 그리고 딸의 희생이라는 세 요소를 기준으로 하여 보면, 심청가의 이야기는 트로이 전쟁의 한 에피소드에 비교될 수 있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희랍의 연합 함대를 지휘하여 트로이로 향한다. 그러나 순풍을 얻지 못한 항해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아가멤논은 신탁에 따라 그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그 어려움을 풀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뒤쫓아 일어나는 참혹한 일들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데에는, 희랍인들이 가지고 있는 바 혈육간에 그러한 일이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리고 더 심층적으로는 거기에 개체의 생명은 의무에 우선한다는 직관이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에서 소재가 된 아가멤논과 이피게네이아의 이야기는 괴테의 연극이나 리히아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서도 다루어지는 이야기이다. 어느 것에나 들어 있는 것은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이 가져오는 비극적 갈등이다. 이들 연극에서 딸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조국이나 아버지에 대한 의무에 의하여 쉽게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 한나라를 알리는 고전의 무게 -
물론 이러한 연극들이나 심청가에서 생명 존중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달리 보게 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이스킬로스에서와는 달리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괴테의 연극에서 이피게네이아는 아르테미스 여신에 의하여 구출되어 이방의 신전에서 여사제가 된다. 그런데 여사제의 일의 하나는 희랍의 포로들을 아르테미스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일이다. 이 제례의식에서 포로들의 개체적 생명은 전적으로 무시된다.
그렇기는 하나 오늘의 관점에서 심청의 이야기에 비하여 이피게네이아의 이야기는 그래도 보다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연극에서 개체적 생명의 희생은 쉽게 정당화되지 아니한다. 그러한 희생이 일어나는 인간 조건의 비극적 모순이 감추어지지 않는 것만도, 이들 연극을 보다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할 수 있다. 서구인에게 심청의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보편성을 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질적 세계에서 온 작품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판소리로 공연되는 심청의 이야기가 한 사회와 문화의 깊이로부터 나온, 또 오랜 시간 속에 승화된 예술 표현이라는 점은 전달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존경할 만한 구전 설화의 전통에서 나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전혀 다른 전통 속에 있던 한 나라의 예술적, 문화적 표현이 다른 나라의 감성에 쉽게 큰 공감을 일으킬 수는 없다. 문화 교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지금 당장에는, 한국이 존경할 만한 예술적 표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일 것이다. 안이한 이해 또는 쉬운 열광보다 중요한 것은 존경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상호존중이다.
- ‘한류의 힘’ 윤리적 문제 없나 -
오래 전 학술대회와 관련하여 독일을 방문했을 때, 나는 주최 측 인사들과 말을 나누면서 괴테나 다른 독일의 옛 작가들을 언급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한 독일인은 그러한 작가들의 책을 지금의 독일의 젊은 학생들은 전혀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장된 감이 있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독문학 연구가 독일에서 일반 독자와의 소통이 없는 학자들만의 학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개탄하는 글을 본 일이 있다. 아마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문학의 고전보다도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가벼운 읽을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독일문학의 고전들이 독일의 문화와 독일인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외국으로부터 독일을 이해하고자 할 때, 또 독일인이 자기이해를 심화하려 할 때, 그러한 기획에서 독문학의 고전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한 문화에서 고전의 무게는 반드시 대중적인 인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고전은, 뜻을 지닌 사람들에 의하여 가끔 참조됨으로써만도 그 사회의 마음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는, 사회의 내면에 숨어 있는 비밀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너무 읽히지 않게 되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고전이 문화의 내면에 존재하는 방식은 읽힌다는 사실보다는 복잡한 변증법 속에 있다.
나는 얼마 전 한 심포지엄에서 일본의 한류에 대한 발표를 들었다. 한류의 전파는 한국의 국제적인 ‘소프트 파워’가 커져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 힘은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힘이다. 그러나 이 ‘소프트 파워’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으려는 힘이라는 면을 가지고 있다. 이 발표에서 나를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것은 한류의 힘이 윤리적 차원에서 문제를 가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소프트 파워’는 추구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중요한 힘이다. 그러나 그 윤리성을 고민할 수 있는 판별력을 긴장 속에서나마 유지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진정한 ‘소프트 파워’는 인간 존재의 깊이에 이어지는 문화에서 나온다.
- 경향신문 3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