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단장한 모나리자의 방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있다면 단연 모나리자일 것이다. 4년 전 개축 공사에 들어감으로써 잠정적으로 루브르박물관의 실에서 전시돼 있던 모나리자가 지난달 4월 6일 실을 되찾으면서 세간의 관심이 다시 한번 77x53cm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그림에 집중됐다.
실은 나폴레옹 III세가 건축가 Hector Lefuel에게 설계를 맡겨서 1855년에서 1857년 사이 애초에는 화려하게 설계됐던 왕실의 공식 접견실이었지만, 그 이후 여러 차례 역사의 변동을 거치면서 개조돼왔다. 프랑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치고 모나리자를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만큼 이 작품은 '순례'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번 공사를 담당한 에스파냐의 건축가 Lorenzo Piqueras가 신경을 쓴 부분은 모나리자와 함께 실에 전시되는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학파의 50여개 작품들이 최상의 상태에서 감상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하루 만해도 모나리자 앞에 머무는 2만에서 4만에 이르는 엄청난 관람객들로 인해 훼손의 위험이 심각한 그림을 보다 안정적인 상태에서 보존할 수 있도록 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의 정도에 따라 인공광을 조절하도록 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선명한 상태에서 그림 감상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나리자를 두꺼운 방탄유리로 보호하고 있지만 반사광이 없도록 처리된 특수 유리여서 그림자와 반사로 인한 문제가 해결됐다.
한편, 이번 이전을 계기로 최첨단 장비가 동원되어 모나리자의 건강 상태가 점검되기도 했다. 약 13m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얇은 포플러 나무판 위에 그려진 그림이라서 기본적으로 연약하고 환경변화에 민감하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위쪽 가장자리에서 내려오는 11cm 정도의 균열도 1939년 이후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무판이 약간 휜 상태여서 주변 환경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현재의 보존 상태가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고 프랑스의 박물관 보수보전 연구센터인 C2RMF가 밝혔다. 물론, 이전을 하면서 철저하게 습도와 온도 음향까지 모든 안전 조치를 강화했다.
이제까지 모나리자가 프랑스 국경을 공식적으로 벗어난 횟수는 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 먼저 1963년 앙드레 말로의 추진으로 케네디 대통령 내외가 직접 참관했던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전시에 이어서 1974년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을 거쳐 일본에서 전시됐던 것이 그 전부이다. 그 후 일본인들의 모나리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굉장히 각별해졌는데, 이 전시실 개축에 들어간 만만치 않은 공사비의 대부분을 후원한 곳이 바로 일본이다. 1980년대 이탈리아의 시스틴 성당 천정화 보수를 위해서도 돈을 댔던 회사 NTV가 이번 역시 모나리자를 위해 481만 유로를 기부했다.





모나리자의 신화

모나리자는 서양미술의 상징이고 미의 이상적인 재현으로서 그 신화를 만들어 왔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이 초상화는 그 미술사적, 예술적 가치와 함께 베일에 가려진 모델의 불가사의한 미소로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모나리자가 프랑스에 가져다주는 문화적, 경제적 부가가치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어마어마하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그림이고 당연히 이탈리아의 문화재였어야 할 작품이 어떻게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있는지 궁금할 만도 할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여장을 한 남자였다는 설도 있고 레오나르도 자신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있지만,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Francesco Del Giocondo가 그의 아내 Lisa Gherardini, 즉 Monna Lisa를 그리도록 화가에게 주문했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03년부터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미완인 상태로 1506년 밀라노를 거쳐 1517년 프랑수아 1세가 그를 프랑스로 초대할 때 같이 가지고 간다. 그러니까 정작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그림을 한번도 소유하지 못했던 셈이다. 프랑수아 1세는 대번 그 그림에 매료되어 당시 상당한 값을 치르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제자이자 상속자에게서 그것을 구입했다. 이렇게 해서 모나리자는 16세기 초부터 프랑스 왕실의 소장품이 되었고 몇 번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1804년부터 줄곧 루브르박물관을 지켜왔다.
앞서 신화로서의 모나리자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이 단어가 부족하다 싶을 만큼 이 작품에 대한 관심과 반응은 광적으로 변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 형태가 찬사이든 반감이든 누구도 모나리자로부터 무관심할 수 없다. 수도 없이 모방의 대상이 되어왔고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 준수해야 될 예술의 규범 그리고 따라잡아야 될 경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뒤샹, 피가비아, 레제에서 워홀을 거쳐 동시대의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비틀고 뒤집고 넘어뜨려야 될 대상이 되면서 20세기 전위미술이 형성되는데 그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1년 아폴리네르가 선동적으로 "모나리자를 불태워야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것은 모나리자가 거부해야 될 권위적인 미술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묘하게도 그런 '불손한' 발언이 있은 후 몇 달이 지나 Vincenzo Peruggia라는 이탈리아 화가가 모나리자를 도둑질하는 세기의 사건이 터진다. 아마 모나리자가 오늘날의 인기 연예인처럼 대중의 전폭적인 관심을 받게 되고 대중적인 이콘이 된 계기는 이 사건일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온갖 종류의 메스컴이 어이없이 사라진 그들의 히로인에 대해 떠들었고, 연예인처럼 우편엽서, 포스터, 인형, 커리커쳐, 샹송 등 온갖 종류의 형태로 모나리자가 대중화되고 상품화됐다. 결국 2년 후에 그 '용감한' 이탈리아 도둑이 모나리자를 골동품상에 팔려고 시도하다 피렌체에서 체포됨으로써 사건은 매듭을 지었다. 모나리자를 그녀가 태어난 모국에 되돌려 주고 싶었다는 그의 유별난 '애국심'은 공교롭게도 모나리자를 불태워야 한다고 발언했던 아폴리네르를 비롯해 입체파 화가들에게 혐의가 돌아가게 했고 그 때문에 이 시인이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하는 해프닝을 만들어 냈다. 모나리자에 대한 광적인 애정 못지않게 정신분열적인 혐오감도 그림의 신화를 형성하는 데 한몫 했다. 사실 이 그림이 항상 이렇게 유리상자 안에 모셔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처럼 모나리자가 유리 상자에 갇히게 된 계기는, 1957년 한 청년이 그림에다 돌을 던져 왼쪽 팔꿈치에 약간의 상처를 내면서부터이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모나리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듯이 돌을 던졌고, 그 결과 마치 중요한 인물을 보호하듯 모나리자는 방탄유리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모나리자를 둘러싸고 일어났지만,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모나리자가 하나의 그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물질과 영혼, 현실과 환상, 그리고 이성과 광기 사이를 오가게 하는 모나리자의 신비는 그녀의 숭배자뿐만 아니라 반감을 품은 사람들까지 루브르의 에로 그 순례의 행렬이 끊이지 않도록 만든다. 그렇게 프랑스는 살이 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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