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동자를 통해 들려주는 작가의 메시지 속에는 사실 미술이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드러내는 탐미적인 표현 형식만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작가의 예술적인 이데올로기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 내게 있어 작품 활동은 자기 내부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자연과의 지속적인 반응과 소통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삶의 철학” 이라고. 그는 조용히 침묵하는 비인간적인 현실의 이미지들을 앵글의 세계로 끌고 들어와 인간들의 참 모습을 어린이 눈을 통해 보여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무수한 얼굴 이미지는 다양한 침묵적인 표정 속에서 커다란 눈동자이다. 비로소 그 단아하고 무표정한 침묵 속에 담겨있는 눈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공포스러운 전쟁의 상황들, 우리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지만 작가는 동심의 표정과 맑고 순수한 표정으로 그 현실들을 기록한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사실 전형적인 사진을 다루는 작가와 기록자의 역할을 병행하고 있다. 그것의 마지막 종착역이 바로 영혼을 자연 재료인 돌의 피부에 올려놓는 행위 인 것이다. 박대조가 오늘의 현실을 어린이의 눈동자를 통해 읽어내려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장자의 무위자연의 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작가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아마도 작가는 어린이들 눈에 이처럼 선명하게 보이는데, 왜 인간들아 그것을 보지 못하느냐 라는 역설적인 항변이기도 하다. 이 어린 아이들이 커서 이와 같은 현실들을 물려받는 것에 대한 묵시적인 질타도 담겨 있는지 모른다.
가장 순수하게 빛나야 할 아이들의 얼굴, 모든 세상을 담아내는 그들의 얼굴에 내려진 슬픔의 그림자를 박대조는 우리들에게 문신처럼 다시 각인 시켜 줄 뿐이다. 모든 삶을 반영하고 담아내는 눈동자의 본질과 그 슬픔의 실체를 어린이의 눈을 통해 가차없이 드러내는 냉정함. 퀸터 그라스가 소설가가 되기 전 석공과 석각 일을 하였다는 것과, 박대조가 돌을 다루면서 결국은 돌 위에 이처럼 냉혹한 현실을 날카롭게 사진을 올려놓는 일을 하는 하였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 만큼이나 감동적인 공통의 시선이 존재한다. 내가 그를 추천하고 주목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