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엽서나 미술 교과서 속의 명화, TV 프로에서 소개되는 멋진 연예인과 관광 명소들. 우리는 다양한 채널의 간접 경험을 통해 대상들에 대한 상상과 동경을 키워간다. 이미지에 의존하는 정보는 우리의 삶을 압도하며 그것의 실체나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대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 모습이 매체 속에서 어떻게 비춰지느냐가 관건이 된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이미지의 조작이나 부풀리기가 이뤄지기도 한다.

언론을 통해 비춰지는, 화면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을 우리는 그대로 믿어버리게 되지만 실체 확인을 위한 가장 정확한 방법은 내가 직접 그 대상을 만나 접해보는 것일 게다. 실제 보니 정말 화면보다 실물이 더 나을 수도 있고 남이 해준 이야기와는 다르게 내 주관적 판단으로는 실물이 더 못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실물보다 좀 더 낫다거나 못하다거나 하는 동종 내의 우열적 판단에서 벗어난 다른 범위의 판단이 있다는 점이다. 짙은 붉은색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주홍빛이었다면 그것은 붉은 계열의 범위 안에서 발생한 이미지와 실제 모습 사이의 오차일 테지만 짙은 붉은색이 실제로 보니 노란색이었다면 그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이미지'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미디어 환경 속의 대중은 온갖 가상체험을 가능케 하는 디지털 기술이나 인터넷 문화가 확산될수록 역설적으로 현장과의 직접 교감에 목말라하며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부지런히 현장을 찾아 나선다. 피부에 닿는 교감이 단절된 e-메일이나 휴대전화의 문자 날리기 등의 일상에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 충족감의 한계는 사람들을 결국 아날로그적인 해결방법의 장으로 이끌게 된다. 그들은 심장이 없는 대상과의 독방 놀이에서 뛰쳐나와 편안한 숨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함께 호흡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상 놀이에서 얻어지는 쾌감과는 전혀 다른 즐거움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며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전시공간에서 실제 작품들과의 스킨십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인쇄물이나 화면 자료를 통해 섭렵한 2차적인 정보에 대한 상상 속의 이미지를 지우고 대상과 직접 상호 교감하는 또 다른 이미지의 경험인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이미지와 비교하며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더욱 감동한다. 전시장에 설치되는 미술품들은 그것이 그 현장에 놓일 때 가장 정확한 모습으로 관객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영화가 스크린 속의 이미지를 통해, TV 프로그램이 모니터상의 이미지를 통해 그 의도가 대중에게 전달된다는 명확한 전제하에 제작되는 장르라면 미술품은 전시공간에서 관객과 직접 만난다는 전제하에 작가에 의해 제작되는 장르다. 따라서 올바른 미술 감상은 반드시 작가가 작품을 내놓은 공간을 찾을 때 비로소 제대로 이뤄지게 된다.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화집이나 잡지가 아니라 국내 전시를 통해 실제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늘어나고 있는 요즈음 리움에서 첫 국내전 개막을 앞두고 있는 미국의 스타 아티스트 매튜 바니야말로 특히 다층적 구조를 갖는 작품들의 다양한 형태와 질감, 그리고 초현실적일 만큼 생생한 색감 등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작품세계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정리하기가 매우 힘든 대표적 작가라 하겠다. 성과 신체 담론을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영역을 넘나드는 고도의 예술적 테크닉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표현매체를 통해 현란한 '이미지'로 구현함으로써 1990년대 이후 미국 최고의 작가로 부상한 그가 하게 될 이번 전시는 왜 '미술 작품'은 백문이 불여일견인가를 확인케 해주는 정말 좋은 사례가 될 것 같다.

- 중앙일보 2005.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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