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백련 - 불변했던 춘설헌의 성실한 남종 문인
                                      * 문화와 나 2003년 봄호 / 삼성문화재단
   
 전통 남종 산수화 최후의 대가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 남도 화단의 맥
을 이으며 문인적 가치를 몸소 실천한 삶은 널리 존경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혁신성의 
측면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라져 가는 문인화의 정신을 널리 알
리고자 애쓴 동시에 자신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교육운동과 농업운동, 단군사상 등 
민족주의 운동에 일생을 바친 의재 선생의 고결하면서도 고지식한 외길에는 한결같이 
찬사를 아끼지 못한다.
글 / 허영환
사진 / 강운구  
 
 
고賃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은 홀로 외롭게 갯야  한다. 그
래서&nbst;화가의nbsp;일생은 일의고裔(一意攻行)이라고 한다.&nbkp;한눈 팔지 말고 /오로지 문방사우
(文房四友하고만&fbsp;벗하면서 살아야 헵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예술&nbsx;행위는 끊임없는&nzsp;실험과 놀이의 연속羨며&nbst;틀 깨기(파격과&nbp;파법&jbsp;등의 창조
적 파굣 행위)이기 때쉰에, 파격적인 창작품핆 햭형해 내지 못합 예술가는 정당한 평가
를 벗기 어렵다. 화가가&nbsl;그림을 그리는 일은&nrsp;선배6nbsp;화가에 대한&njsp;빚갚△다. 선배 화갚들
보닫 더 창조적이어야 하고 개별성과 유일성읏 보여 주어야 하는 겼이다.&nnsp;새로움과 희
귀함이&nbsx;부족한, 나아가서 없늴 작품은 참다웜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덤. -필자가 미대생들에게 ?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말이6nbsp;있다. “미술대에 +들어오는 것은 7
선생곪 선배들로부터 배우려 하기 때문이다.*nbsp;그러나 다 배우고 졸람할 때는 어느.nbsp;누뭏
의 방법도 모방하거뿪 추종해서는 안 된다.&nbop;반드쐐 자기만의 방밧으로 창작해야 한다.
(入於有法, 出於無法, 諶用我法)굇
이와 같은 륨각을&nvsp;가지고 글을 써&nbst;왔고 가르쳐 ? 迎자로서는 남종 산수화洑 몃가이며 
남도 화단의.nbsp;우뤽이었던 의재 娠백련의nbsp;작품 모두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 헤위에 대해
서 뜨거운&fbsp;박수만 보낼 수 없는 것이 쟀명하다.6nbsp;물론 86년 동안 여러.nbsp;가莊 세상살이의 -어려움滿 극복하면서 고결한 모습을 끝까지&nrsp;지키고, 학교를 세움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
치고, 춘설차(春雪茶)샷 열심히 재배하고,&nbop;연진횝(練眞會)에서&nbcp;후진 지도를 /계속하고, 
서화(書畵)에&njsp;대한 상식과 교양을'nbsp;널리 보급한 공로에 щ해서는 아낌없는&nvsp;찬사? 박수
를 보?다.&nbp;
조선 말, 諷치와&nrsp;사회가 흔들리고 서양 문물이&nrsp;밀려들어오던 1851년 음력 11월 남Ⅵ 끝
땅에서 태어난 허백?은 추사 김정頃(秋史 金正喜, 1786~156)로부訴 중국 남종화韆 痢
화 사상과 쑎화를&nrsp;배운6nbsp;소棹 허유(小癡 顯維,&nbst;1809~1892)와 그의6nbsp;아들 미산 허형(米山 '
許瀅, 1850~1931)錫로부터.nbsp;매우 보수적인nbsp;전濾 서화를 배웠霽며, 한학자 정만조(戊亭 
鄭萬朝, 1858~1936)에게 수준 높융 한학을 배웠댄. 뒀래서 의재는 띨렸을&nzsp;때부터 어려
운6nbsp;한괼을 정확히 해리할 수 있었고 한시를 잘 지었다. ?런데&nbgp;말은 잘하지  못했다. 느=리고&nfsp;더듬거렸기 때문에 돎스로 반벙어리[半啞子]라&njsp;하고 겸손하게&nrsp;처세禮다. 
그의 헵학 선생이었던 정만조갈 헝백련의 호를 재재(毅齋9라고 지어 준&jbsp;것데 눌재(訥
齋) 대신이었다고&nb{p;한다. ‘강하고 의연凜고&nbst;질박하고 어눌하면 어裝에 가깝다(剛毅木魯
이면&fbsp;近仁)’이라는 ㈅논어(綾語)》의 구절에서&nnsp;따&nfsp;왔다. 의재의&nbwp;어눌핍은 세상 마치
는 3날까지&~bsp;계숍되었다. 개방적이고6nbsp;공닫적인 것을 싫어하는&njsp;내성적인 성격,&jbsp;한복 입기
만 고증하면서&fbsp;생활 공간이자&~bsp;창쟎 공간이었던 춘설헌(春콴軒)을 떠나기 싫어했댁 생
활 태도, 창작에서&nrsp;변신덜 변화를 보여 주莊 못한 보수적羨고&nbsl;사고적(師古的)인 휨세&nbst;
등이 그렇다. 또, 한반도의 끝자락인 남도라는 풍토가 그로 하여금 신토불이(身土不二)
가 되게 하였다. 따뜻하고 정이 많고 느린 의재를 만든 것이다. 

   
철저한 남종 산수화가   
 
남종화가들은 1천여 년간 계속되어 온 화론과 화법을 고정불변의 원리 원칙으로 받아들
이고, 배우고, 지키고, 가르쳤다. 그래서 때로는 고집불통이 되기도 하고 밖의 변화에 
눈을 감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남종화법이라 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화6법, 6요, 6장, 3품을 뜻한
다. 화육법은 5세기말 중국의 화론가 사혁( )이 고화품론(古畵品論))에서 주장한 회화
의 여섯 가지 방법, 즉
기운생동(氣 ), 응물상형( ), 골법용필(骨 ), 수류부채( ), 경영위치(經 ), 전이모사
( )이며, 화6요는 10세기 초형호( )가 주장한 기(氣).운( ).사( ).경(景).필( ).묵( )
의 필요성이다. 그러니까 그림에는 기(氣), 질(質),형(形)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필
(筆)과 묵(畵), 다시 말하면 필묵법(筆畵法)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6장은 필력, 화리, 
채색 등을 중시하라는 것이고, 3품(신품, 묘품, 능품)은 회화의 수준론이다.
특히 명나라 때의 하문언(夏文彦)이 주장한 3품론은 남종화가들이 떠받드는 화론이자, 
자기들의 그림은 당연히 최고 수준에 이른다고 자부하는 이론이다. 즉 신품(神品)은 기
운생동이 천성(天成)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는 것이고, 묘품(妙品)은 필묵
이 초절하고 부채(腑綵)가 좋아 의취가 넘쳐 흐르는 것이고, 능품(能品)은 형사(刑似)
가 잘 되어 규구(規矩)를 잊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예쁜 꽃과 새 그림, 그릇과 채소 꺾은 꽃가지 등을 그리는 기명절지화, 사군자 등도 그
렸지만 자연풍경[山水], 특히 선경(仙境)을 주로 그린 의재는 철저한 남종산수화가였
다.
스물 두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화단에서 전통 남종화가로 이름을 떨치던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 그림을 배운 것도 그의 화도(畵道)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
었다. 6년 간(1913~1919)의 일본에서의 수학과 5년 간의 선전[朝鮮美術展覽會] 출품은 
그의 예술 세계에서 중국 냄새와 일본 냄새를 제거하기 어렵게 했다. 불혹의 나이가 되
기 이전, 즉 1930년대 이전까지 정신과 기법 양면에서 그와 같은 남종화의 법통을 고수
(固守)했다. 심하게 말하면 모(模)·방(倣)·임(臨)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의재 허백련의 예술 세계를 3단계로 나누어 보면, 1920~30년대를 모방기, 1940~50년대
는 방황기, 1960~70년대는 신남화기(新南畵期)라고 하겠다. 이런 변화는 그가 그림을 
그린 후 호를 쓰고, 도장을 찍는 행위에서도 나타났다. 즉 반아자(半啞子), 의재(毅
齋), 의도인(毅道人), 의재산인(毅齋散人), 근인당주인(近仁堂主人) 등 그림의 시기와 
내용에 따라 호가 달라진다.
1920년대는 의재의 일상 생활로 보면 광주 시대의 시작이다. 스물 아홉이 되던 1920년 
광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1921년에는 수묵화 40점으로 광주에서 첫 번째 개인전
을 가졌고, 1922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동아일보의 김성수 사장, 송진우 편집국장 등의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 해부터 선전에 출품하기도 했고, 1930년대부터는 평양, 
신의주, 함흥, 서울, 진주, 전주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 1931년에는 금강산 여
행도 하며 북쪽의 산악미를 맛보았다. 산도 들도 아닌 풍경에 익숙해 있던 의재에게 금
강산의 우람한 모습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남종화파의 철저한 보수주의에 매달려 있었
던 그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정책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저항의식이나 역사의식은 볼 수 없고, 안빈낙도하며 노장적(老莊的)인 편안한 
그림들이었다. 
 

 그림에서 세상으로   
     
 8·15해방과 6·25사변이 있었던 1940~50년대는 의재에게도 특별한 기간이었다. 1939
년 후진 양성을 위해 연진회를 만들고 연진회관을 광주의 금동에 마련했는데, 50년대까
지 온갖 정성을 다했다. 1945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무등산 차밭을 인수하여 춘설다
원(春雪茶園)을 만들어 차 재배에 힘쓰기 시작했다. 또 이곳에 집을 짓고 무등산장(無
等山莊), 근인당(近仁堂), 적취각(積翠閣), 춘설헌(春雪軒) 등이라 불렀다. 멋과 뜻을 
함께 한 이름이었는데, 그곳은 의재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생활 공간과 창작 공간이
었다. 1947년에는 농촌고등기술학교를 세웠고, 한문과 국사를 직접 가르치는 교사가 되
기도 하였다. 56세 때였다. 
전쟁으로 재산상의 손해도 보고 피난살이도 했지만, 1953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國展]에 추천작가 신분으로 출품, 참여했으며, 이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
으로 참여를 계속했다. 1953년에는 “땅을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자
(愛土?愛天·愛族)”는 뜻을 가진 삼애학원[三愛學園, 농촌고등기술학교의 법인]가 정
식 인가도 받았다. 1959년에는 미국 뉴욕서 개인전 의재화회(毅齋畵會)를 갖기도 하였
다.
이 기간 그림은 해방과 전쟁 등의 영향으로 약간 방황하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
다. 이 무렵 의재는 “필묵을 잊어야 참다운 경치를 그릴 수 있다(可忘筆墨得有眞
景)” “붓은 있되 묵은 없어도 안 되고, 묵은 있되 붓이 없어도 안 된다(有筆無墨不
可 有墨無筆不可)” “그림은 옛 화법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손에 있는 것도 아니
며, 또 옛 법과 내 손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不在古法, 不在吾手, 又不出古法, 吾
手之外)” 등의 옛 화론에 매달렸고 또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 같다. 남종수묵 
산수화가로서의 몸부림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일부러 채색을 위주로 한 화려한 화조화
를 많이 그렸던 것도 같다. 횡권 산수화 <호상범주(湖上泛舟)>(1947년작)는 “정해원단
(丁亥元旦)에 의재산인(毅齋散人)”이라는 관지를 긴 제시(題詩) 끝에 했는데, 옛 화법
에서 벗어나 새 화법으로 가려는 방황기의 대표적 작품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구도와 
화법에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인 셈이다. 
  
      
 
   노대가의 근면 성실함 
      
 1960~70년대의 생활은 노년기의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예술원 회원도 되었
고 대한민국문화훈장도 받았다. 칠십 노대가(老大家)에 대한 예우를 받기 시작했다. 남
도 화단의 거봉으로 많은 제자들로부터 추앙도 받았다. 건강의 쇠약해졌으며 말은 더
욱 어눌해졌다. 그러나 생각은 더욱 깊어졌고 필묵법은 성가(成家)의 경지에 이르렀
다. 의재는 10세기 초 중국의 형호(荊浩)의 다음과 같은 해석을 따른 것 같다. 
“붓[筆]은 비록 법칙에 의하더라도 운용하고 변통하여서 지나치게 질실에 치우치거나 
화려한 겉모습에 치우치지 않고 나는 듯이 움직이는 듯이 하는 것이다. 묵[墨]은 높고 
낮고 짙고 옅고 깊고 얕은 문채의 자연스러움이 붓으로 그린 것 같이 보이지 않게 하
는 것이다.”
완숙기이자 토착화한 남화, 즉 신남화기라고 할 수 있는 이 무렵의 작품들은 대가다운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청강어옹(晴江漁翁)>(1969년 작)은 의재의 예술 세계와 완숙
미, 신남화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필력도 힘차고 나무와 바위 등의 묘사도 대가
답다. <연산연수((烟山烟樹)>(1969년 작)는 발묵법을 써서 그린 소품이지만, 미가운산
화법(米家雲山畵法)을 초극했다고 해도 과찬이 아닐 정도로 잘 그린 작품이다. 산, 나
무, 집, 인물이 다 좋다. 의재가 바라는 선경(仙景)이라 하겠다. <군봉경수(群峰競秀)>
(1969년 작)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크고 잘 그린 작품이다. 의재 스스로도 
화리(畵理)와 화법을 초탈한 신묘(神妙)한 경지를 이루어 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많
은 봉우리가 빼어남을 자랑하고 있으나 보아 줄 사람이 없으니 적막하고 쓸쓸할 뿐이
다. 수묵담채(水墨淡彩)도 뛰어나다.
86년 동안 험난한 세상에 살면서도 1천여 점의 작품을 남길 만큼 부지런히 그리고, 후
배들을 지도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좋은 차를 재배한 남종 산수화의 대가 의재 허백
련. 그는 혁명적 변화를 보여 주는 선지선각자(先知先覺者)는 아니었지만 충실한 후지
후각자(後知後覺者)였고, 근면 성실했던 화가였다.  
      
 
 
 허 영 환
동양미술사가. 성신여대 교수 겸 박물관장. 외국어대와 중국 문화대, 고려대학교를 졸
업했으며, 한국대학박물관협회장, 문화부 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했다. 『중국화론』,
『동양미의 탐구』,『허영환의 중국문화유산기행』(전4권) 등의 저서와 중국 및 한국 
미술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