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 긴급진단]
동아일보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미술시장 긴급진단] <上>빈사의 화랑가
2004.03.25
5∼14일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올해 첫 아트페어는 당초 예상 매출액(6억여원)에 못 미치는 4억여원으로 막을 내렸다. ‘미술시장 활성화’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던 이번 행사는 국내외 작가 95명의 작품 1000여점을 선보였지만 때 아닌 ‘3월 폭설’에 ‘탄핵 정국’까지 겹쳐 봄기운을 기대했던 주최측을 안타깝게 했다. 한 관계자는 “주말이 겹친 마지막 이틀엔 단골 컬렉터들이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상 밖이었다”고 말했다. 20여년간 미술품 운송업을 하고 있는 K씨는 “지난해 10월 이후 일감이 거의 없다”며 “이번엔 좀 나아질까 했는데 기미가 안 보인다”고 한숨지었다.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회복되지 못한 미술시장은 13년을 끌어 오던 미술품 양도세 부과법안이 지난해 말 폐기돼 “이젠 되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정치 사회적 대형 사건의 여파로 미술 팬들을 여전히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24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박수근의 그림이 최고가를 경신했으나 국내 미술계에는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A씨는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전시 큐레이터 경력을 살려 최악의 경우 1년에 1억원짜리 한 점만 팔아도 기본 운영경비는 빠지겠거니 하고 최근 덜컥 화랑을 열었지만 월세와 큐레이터 급여, 각종 관리비 등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다. 지난해 청담동의 갤러리 동동, 갤러리 JJ, 갤러리 현, 종로구 사간동의 갤러리 시엘 등이 잇따라 폐업했으며 사간동의 한 화랑은 한 해 동안 주인이 세 번 바뀌기도 했다. 청담동에서 20여년 자리 잡아 온 유나화랑도 이달 말 문 닫을 예정이다. 대형 화랑의 한 관계자는 “중산층이 붕괴되는 시점에서 중간 컬렉터층이 사라지고 있다”며 “여윳돈이 생기면 사교육비나 부동산 재테크에 나설망정 그림은 안 산다. 기업들도 정치 상황에 위축돼 그림 구입을 꺼린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가군은 손꼽을 정도다. 미술품 경매회사인 서울 옥션에서 지난해 거래된 ‘작가 베스트 5’는 유영국, 박수근, 이우환, 김환기, 천경자였다. 유일한 생존 작가인 천 화백도 신작이 나오지 않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현재 활동하는 40, 50대 중견작가들은 한 명도 끼지 못한 것이다. 미술 경제지를 표방하고 지난해 10월 창간한 ‘아트 프라이스’는 창간호에서 ‘국내 미술품 가격이 정점에 올랐던 1991, 92년 이후 작품가격이 오른 작가는 사실상 없다’고 전했다.
20여년간 컬렉션을 해 온 한 컬렉터는 “외환위기 이후 시장에 나온 미술품들이 거의 환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컬렉터들 사이에는 미술품이 재테크는커녕 오히려 짐만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면서 “떠난 컬렉터들은 돌아오지 않고 새로운 컬렉터는 생기지 않으니 시장의 불황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화관광부가 최근 발표한 ‘문화향수 실태조사’(2002년 7월 1일∼2003년 6월 30일)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예술행사 관람률은 62.4%로 2000년 54.8%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미술 전시는 2000년 11.6%에서 2003년 10.4%로 오히려 낮아져 미술 대중화의 길은 더욱 멀어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미술시장 긴급진단]<中>시장 구조 문제 없나
2004.03.26

미술품 컬렉터였던 중소기업 사장 A씨(50)는 5년 전부터 작품을 한 점도 구입하지 않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 현찰이 급해 소장품을 되팔려고 화랑에 부탁했지만,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이우환 천경자 등 이른바 ‘빅5’의 작품 외에는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소장 작품의 작가가 그린 비슷한 작품들이 더 싸게 유통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화랑 관계자는 “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구매자가 작가 전속 화랑을 통해 작품을 사지 않는것”이라며 “인기작가 작품들을 심지어 큰 표구사 같은 데서도 거래하고 소위 나까마(중간상인)들이 나서서 덤핑을 일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들 까지 컬렉터와 직거래로 사게 팔고 있으니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겠느냐”고 꼬집었다.
그러나 이 같은 직거래조차 몇몇 팔리는 작가에 한정돼 있다는 것이 문제. 대부분의 작가들은 외환위기 때보다 경기가 더 안 좋다는 요즘, 작업하기가 힘든 것은 물론 생계마저 걱정하는 극빈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 상황이 심화돼 작가-화랑-컬렉터간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시장상황은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격 기능의 실종은 장기적 안목보다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려 온 화랑-작가-컬렉터 모두에게 잘못이 있지만, 무엇보다 화상(畵商)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한 중견 화랑 대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호황기를 보낸 화랑들이 작품을 파는 데만 급급해 컬렉터 관리나 투명한 유통구조를 도입하지 못한 채 외환위기를 맞았다”고 반성했다.

여기에 작가들도 한몫했다는 지적이다. 경기가 침체하면 스스로 작품가격을 낮춰 유통을 원활하게 해야 하는데도 “가격을 내릴 바엔 안 팔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매매가와 호가 사이에 간극이 커지는 이중가격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현재 미술시장은 ‘다중가격’ ‘무가격 시장’이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오고 있다. 컬렉터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소품-신진작가 작품-대가 작품 등 피라미드형 구조를 보이고 있는 외국 컬렉터들의 구입행태에 비해 한국에서는 오로지 대가의 작품에만 매달린다는 것이다.
미술품 경매회사인 서울옥션 김순응 대표는 “한국 컬렉터들은 미술품도 가격의 등락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소장 미술품은 반드시 가격이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좋아해서 구입한 미술품이 나중에 가격이 올라 이득을 보면 그것을 덤으로 여기는 진정한 애호가들이 그립다”고 말했다.


[미술시장 긴급진단]<下>미술시장 살리려면
2004.03.27
국내 미술인들에게 ‘시장 활성화를 위해 시급한 것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법적 지원’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큰손이랄 수 있는 기업들이 미술품을 구매하도록 분위기를 돋우고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화랑은 모 재벌 계열사로부터 “외국 손님들을 위해 로비에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구입이나 임대 상담에 응했으나 성사에 실패했다. 이 화랑 관계자는 “작품 구입을 권하니 ‘미술품이 비업무용 자산으로 분류되어 있다’며 난색을 표했고, 임대를 권했더니 임대료와 보험료를 합치면 3년이 지날 경우 사는 것보다 비싸다는 결론이 나와 결국 포기하더라”고 전했다.
화랑들이 원하는 세제 혜택으로는 △서화(書畵)와 골동품을 업무용 자산으로 전환해 구매 비용을 손비로 인정해주고 △금융기업에 한해 미술품 투자를 허용하며 △개인이 미술품을 구입할 때 소득공제 혜택을 주고 △법인이나 개인이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할 때 기부에 따른 세제 혜택을 주는 것 등이다. 이 같은 화랑들의 주장에 대해 일부 미술인들은 외부적 여건 마련도 중요하지만 내부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희대 최병식 교수(미술평론가)는 “현재 우리나라 미술시장은 가격이 실종되고 사고팔기가 원활하지 못해 시장의 최소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라며 “컬렉터들의 가장 큰 원성은 100원에 작품을 샀으면 70원에라도 팔 수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작품을 팔았던 화랑은 나 몰라라 하기 일쑤고 경매에 내 놓자니 대가급 외에는 가격 형성이 안 된다”고 전했다. 최 교수는 “외국처럼 우리도 주요 작품에 한해 1년 단위로라도 가격동향을 공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효주 한국예술경영학회장은 “작가와 화랑들이 하루빨리 신뢰를 회복해 전속 작가제도를 꾸준히 밀고 나가 외국처럼 ‘작품은 화랑에서 구입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뿌리 내려야 한다”며 “또 미술을 즐기는 대중이 없다고 투덜대지만 말고 교육과 마케팅에 신경을 써 새로운 관객을 개발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 미술인은 “미술품 구입에 신용카드나 할부결제조차 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우리 화랑의 현실”이라며 “여기에 평단과 작가들은 자기들만의 성을 쌓아 놓고 대중이 무지하다고 투덜대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전체 미술시장의 20%나 되는 조형물 설치시장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우리나라 조형물 시장은 일부 작가와 화랑들이 연결된 각종 리베이트의 온상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 최근 문화관광부가 현재 1만m² 이상 신축 또는 증축 건물에 건축비용의 0.7%를 미술 장식품으로 해야 하는 현행 조항을 개정해 기금으로 납부할 경우 0.5%로 내리겠다는 개정안을 냈다. 하지만 대부분 기금 납부를 꺼려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