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美를 논한다_3: 해체의 미학
事物이거나 혹은 作品이거나, 확정할 수 없다
예술계 전반에 ‘해체주의’가 범람하고 있지만 무엇이 해체의 핵심인지는 묘연하다. 류병학의 글은 ‘우리시대 해체미학의 의미와 흐름’을 짚어내고 있는데 그는 ‘해체주의란 없다’라고 선언하며, 오히려 친밀하게 우리 삶에 들어와 있는 실용품들을 해체라고 말한다. 해체주의 작가 홍명섭을 다룬 비평에서 평자는 그의 작품세계가 ‘개념유희’와 ‘해체의 극단적 추구’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고 평한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불안한 해체주의를 비판하는 예술계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모아봤다.
해체주의적 미학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해체병'이다
교수신문은 대뽀(필자는 스스로를 무대뽀라 칭한다)에게 '예술기획: 우리시대의 美를 논한다 3_ 해체의 미학적 원리와 우리 시대의 해체미학'에 대한 글을 청탁했다. 교수신문이 대뽀에게 청탁한 글은 해체의 미학적 원리와 특징 그리고 현시기 지배적인 해체적 미학의 경향과 또한 해체의 딜레마는 무엇이며, 가장 필요한 해체의 작업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작품 한두 개를 사례로 든 글이다.
해체미학? 국내외를 모두 총괄해 미술계에 '해체미학'이 있기나 하나. 이를테면 미술계에 동의된 '해체미학'의 정의가 있는가 말이다. 적어도 대뽀가 알기로 우리시대 미술계에 해체미학은 엄따! 따라서 지배적인 해체적 미학의 경향을 서술할 수 없다. 그럼 무슨 까닭으로 대뽀는 교수신문의 청탁을 허락했는가. 와이? 아직 미술계에 동의된 해체미학은 없지만 앞으로 해체미학에 대한 논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대뽀가 생각하는 해체미학에 대해 간략하게 씨부려보기로 맘먹었기 때문이다.
事物과 작품의 치환 가능성
대뽀가 생각하는 해체미학의 원리는 '변화'이고, 그 특징은 '사물-작품'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그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언급될 수 있는데 하나는 변화하는 사물/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생활미 혹은 실용미로 불릴 수 있는 퍼블릭 퍼니처(public furniture)와 리빙 퍼니처(living furniture)다.
변화하는 사물/작품은 기존 '物-작품'이라는 예술의 예정론이 아닌 구축과 해체(de-construction)라는 이중의미를 지닌 '物-작품-物'이라는 예술의 발생론으로 나타난다. 해체가 태동한 1960년대 미술계에 등장한 프랑스의 BMPT나 쉬포르/쉬르파스, 이태리의 아르테포베라, 독일의 (보이스를 주축으로 한) 사회조각, 미국의 미니멀 아트와 컨셉트 아트, 일본의 모노파 등은 일종의 '사물논쟁'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물'이 어떻게 '작품'이 되는가에 주목했다. 따라서 그들은 '사물논쟁'의 원조격인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넘어서야만 했다. 외람되게도 그들은 '物-작품'이라는 예술의 예정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허나 그들이 사용했던 나무나 노끈 그리고 벽돌이나 나무토막 또한 철판 등은 일상의 物로 돌아갈 수 있는, 즉 '物-작품-物'이라는 예술 발생론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 예술의 발생론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작가들- 김수자·고연민·한명옥-의 작품들에서 출현했다. 김수자의 일명 보자기 작업이나 고연민의 청바지 해체작업, 그리고 한명옥의 실 작업 등은 일상 사물을 작품으로 전이시키고 다시 그 작품을 해체해 사물로 되돌려 보내기를 하던지 '또 다른' 작품으로 자리바꿈시킨다. 마치 원효가 진흙을 그리고 성철 스님이 금으로 사물의 自性에 관한 원효의 진흙과 성철 스님의 금처럼.
글타! 그녀들의 작업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인용'될 수 있다.(이전에 사용됐던 재료를 다시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용'이다) 일시적으로 설치됐던 그녀들의 작업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방식은 인용과 반복이다. 따라서 그녀들의 작업을 제한 혹은 폐쇄 혹은 억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들 작업에서 포착할 수 있는 문맥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들이 사용하는 사물은 '사물에서 작품으로'라는 작품의 예정설에 덜미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서 작품으로 그리고 다시 작품에서 사물로' 돌아갈 수 있다.
일상품이면서 동시에 미적 작품으로
지난 ‘미디어 시티 서울 2000 지하철 프로젝트’에서 대뽀는 '퍼블릭 퍼니처'라는신조어를 만들었다. 퍼블릭 퍼니처는 우체통이나 공중전화·공공화장실·버스정류장·화단·분수대 등 도시학에서 말하는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에 미술에서 말하는 공공미술을 접목시킨 용어다. 따라서 퍼블릭 퍼니처는 기존의 일상세계와 단절된 '미술작품'을 일상세계로 되돌려 보내는 일종의 '가구-작품'인 셈이다. '가구-작품'이란 표기는 시민이 직접 손으로 만지고 사용할 수 있는 가구로 실질적인 '기능'도 하지만 동시에 '작품'인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일상세계 속에서 호흡하는 퍼블릭 퍼니처는 하나의 실험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현실성의 관점을 지닌다.
지난 2002년 여름 안양에서 대뽀가 기획한 리빙 퍼니처는 기존의 홈 퍼니처(home furniture)에 공예에서 말하는 아트 퍼니처(art furniture)를 접목시킨 신조어다. 따라서 리빙 퍼니처는 일상생활에서 실종된 '기능'을 부활시키는 일종의 '가구-작품'이다. 그것은 살림살이이면서 동시에 작품인 생활 속에서 호흡한다. 그러므로 퍼블릭 퍼니처와 리빙 퍼니처는 한결같이 일상품으로 기능도 하면서 동시에 미적 작품이라는 이중적인 뜻을 지닌다. 그럼 그들 사이의 차이는? 퍼블릭 퍼니처는 공공영역에서 설치되는 공공작품인 반면, 리빙 퍼니처는 사적 공간에 비치되는 사적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흔히 우리는 미술작품을 고정된 '고유한' '순수한'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허나 미술작품은 삶처럼 변화한다. 마치 장구한 우리 미술이 생활 속에서 삶으로부터 개념화된 것처럼 말이다. 아닌가?
/ 교수신문 2004년 03월 19일 류병학(미술평론가)
필자는 20년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뿌리를 묻고 있는 미술평론가며 큐레이터다.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거목인 서세옥, 이우환, 박서보 등을 비판한 것이나 ‘무대뽀’라는 잡지를 창간해 한국 미술계를 뒤짚어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리빙 퍼니처’와 ‘그림보다 액자가 더 좋다’ 展 등을 기획했으며 저서로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 ‘이것이 한국화다’, ‘도자기 전쟁’, ‘이우환의 입증들들’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