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움직이는 디자인
《“공공 분야의 디자인은 사치인가?”최근 논란 끝에 폐기된 자동차 번호판에서부터 거리의 각종 구조물과 간판, 관공서의 로고와 서식(書式) 등에 이르기까지 관(官)이 결정 또는 규제 권한을 갖는 이른바 ‘공공디자인’의 황폐함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미적 감각은 물론 기능성마저 떨어져 ‘폐해’ 수준에 이르렀다는 목소리가 높다. 동아일보는 5회에 걸쳐 “세련된 도시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시민들의 욕구가 과연 실현 불가능한 것인지 짚어 보고 대안을 모색한다.》
수년 전부터 경찰은 건설교통부측에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글씨가 알아보기 힘들어 뺑소니 사고가 나도 번호판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건교부는 무지막지하게 글씨체를 키운 새 번호판을 내놓는 것으로 답했다. 주무부서인 자동차관리과는 ‘그림 좀 그린다’는 한 직원에게 “알아보기 쉽게 최대한 글씨를 키우라”고 주문했고, 그가 만든 ‘작품’은 1월 초부터 전국에서 발급되기 시작했다.
▽미적 감각은커녕 기능성도 없다=‘촌스럽다’는 여론의 포화에 밀려 폐기 처분 결정이 내려진 새 자동차 번호판은 기능면에서도 큰 결함을 안고 있었다. 글씨를 키운다고 꼭 잘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 새 번호판은 숫자와 글씨가 번호판 경계에 맞닿아 있어 멀리서 볼 때 간섭 현상으로 ‘2’와 ‘7’이 구분되지 않는 등 가독성(legibility)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건교부로부터 이 ‘새 번호판’을 대신할 ‘다시 새로운 번호판’의 디자인 개발을 의뢰받은 윤종영 한양대 교수(디자인기술공학연구센터장)는 기존의 ‘번호판 제작규정’이 자의적인 변형의 길을 열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대략적인 글씨체와 글씨의 두께에 대한 지침만 있을 뿐 가령 ‘ㄱ’을 쓸 때 가로 세로 획의 각도 등이 전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같은 번호판이지만 200여개 제작업체마다 글씨체가 제각각이었다.
7월 1일 발표 예정으로 번호판의 디자인 작업을 진행 중인 윤 교수는 “일본과 우리나라만 채택하고 있는 현재의 2열식 표기를 미국 유럽 중국과 같은 1열식 표기로 바꿀 것”이라고 밝혔다. 또 글씨체와 여백을 적절히 조정해 가독성도 높이고 바탕은 흰색이나 노랑, 글씨는 검정 파랑 빨강 등을 쓸 계획이다. 번호판의 가로 길이는 늘리고 세로 길이는 줄이며, 번호판 왼쪽 부분엔 해당 차량의 용도를 상징하는 무늬도 넣을 예정이다.
30년 전에 채택된 현 번호판의 규격은 세로가 너무 길어 요즘 날렵하게 디자인되고 있는 자동차 앞 범퍼에서 공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등 기능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게 윤 교수의 지적이다.
▽관(官)의 무감각이 졸작을 낳는다=이런 디자인 감각은 교통 분야만 해도 지하철, 시내버스, 경찰차, 청소차, 택시 등에도 필수적이다. 특히 공공차량은 ‘움직이는 디자인 전시장’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미감을 고려하면서도 해당 기관 또는 단체의 정체성을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이에 관한 한 우리는 지금까지 완전 무감각이었다.
지금 서울 거리를 달리고 있는 8000여대의 시내버스는 그야말로 ‘개성 없는 서울’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간선도로에는 주황과 분홍색의 일반시내버스 뒤로 베이지색과 녹색의 칙칙한 좌석버스, 그 옆으로 굵은 빨강과 파랑 줄 위에 노선번호가 쓰인 고급좌석버스가 달리고 있다. 좁은 뒷길은 사업자 마음대로 칠한 마을버스들 차지다.
경찰차, 청소차 등은 과거에 입혀진 권위주의적, 행정편의적 색상을 벗지 못하고 있다. 공무원 조직이 디자인을 아예 무시하거나 전문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를 고식적인 관료 감각으로 ‘필터링’하다 보니 도시가 칙칙한 색으로 뒤덮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차량 번호판의 경우에서 보듯 디자인에 대한 시민의 요구 수준이 높아지면서 관료사회도 이제는 공공디자인에 대해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7월 1일 선보이는 서울시의 새 시내버스 운영체계는 ‘디자인’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첫 사례로 꼽힐 만하다.
서울시 ‘마케팅기획팀’과 디자인 전문업체 브랜드웍스의 합작품인 이 시내버스 디자인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것. 이들은 일반 순환 고급좌석 보통좌석 마을버스 등 기존 5개 노선체계를 간선, 지선, 광역, 순환 등 4가지로 단순화하고 그 각각에 ‘파랑(B)’ ‘녹색(G)’ ‘빨강(R)’ ‘노랑(Y)’의 색상과 명칭을 부여했다. 정류장 시설도 새 디자인 원칙에 따라 모두 바뀌게 된다.
지난해 6월 최종안이 나온 뒤 일부 공무원들로부터 “너무 튄다”는 등의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서울시는 원안을 밀어붙였다. 브랜드웍스 이정아 이사는 “담당 공무원의 전향적인 마케팅 마인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평가했다.
한성대 예술대 지상현 교수는 “디자인의 발주자가 디자인의 모든 내용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자동차 번호판 논란’과 같은 촌스러운 사고도 방지하고 궁극적으로 도시환경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서울시 겨우 6000만원 주면서 “노선 디자인 바꿔라”
브랜드웍스가 서울시 버스 이미지통합 작업비용으로 받은 액수는 6000만원. 브랜드웍스는 지난해 3월 말부터 6월까지 사장 지휘 아래 기획팀 3명, 디자이너 5명 등 모두 9명이 달려들어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한 끝에 작업을 마쳤다. 6000만원은 조사비 및 재료비는 고사하고 이들 9명의 3개월치 임금에도 모자란다.
공공디자인에 지출되는 비용은 이렇게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다. ‘공공디자인을 맡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브랜드웍스 이정아 이사는 “서울의 얼굴을 만드는 일이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언제까지나 통할 수는 없다. 또 대부분의 공공디자인은 시내버스나 차량번호판처럼 ‘생색나는 큰 사업’도 아니어서 ‘돈보다 명예’를 택하라고 요구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공공기관들은 디자인 비용을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공공기관의 각종 팸플릿 안내문 안내판 등의 제작은 입찰을 통해 전문업체에 맡겨진다. 그러나 이때 지급하는 비용에는 ‘기획비’ ‘디자인비’ 등의 항목이 아예 없다. 디자인은 최종제품에 딸린 부속물일 뿐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은 그래서 독자적으로 일하지 못하고 인쇄업자나 간판 제작업자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디자인 비용을 잘게 나눠 다른 항목에 끼워 넣는 실정이다.
건설교통부가 자동차 번호판을 다시 디자인하기 위해 윤종영 교수팀에 지급한 비용은 5000만원으로 업계 관행에서는 ‘상당한 편’이다. 하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현재의 관공서 일처리 시스템에서 디자이너의 자존심은 설 땅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예산을 아낀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공공디자인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들이 인쇄업자와 간판업자의 부속물로 취급되는 상황 역시 비정상적인 것은 분명하다.
/동아일보 5월 4일자, 나성엽기자 (cpu@donga.com)
<2>기능과 미관의 조화
[공공디자인 도시를 바꾼다]<2>기능과 미관의 조화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고향 바르셀로나 거리는 ‘디자인 전시장’이다. 가우디의 ‘트레이드마크’인 나선형으로 된 벤치와 가로등, 고풍스러운 건물에 어울리는 간판 등이 걷고 싶은 거리, 보고 싶은 거리를 연출한다. 최근 들어 쓰레기통, 가로등처럼 사소해 보이는 거리 시설물의 디자인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거리시설물, 즉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는 공공게시판, 버스정류장, 공중화장실, 공중전화 부스, 우체통, 신문 가판대, 식수대부터 보도블록, 차량 진입로, 맨홀 뚜껑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러나 이들 거리시설물에 대해선 실용성만 강조할 뿐 주변 건물이나 거리와의 조화 등을 따져보는 시각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게 사실. 자기 집안에선 가구와 찻잔의 디자인 하나하나를 시시콜콜히 따지면서도 대문만 벗어나면 골목길의 쓰레기통에조차 시선을 주지 않았던 게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계원조형예술대의 김명환 교수(전시디자인)는 “거리시설물의 디자인에 조금만 투자해도 황량하고 삭막한 거리를 풍요롭고 우아한 환경으로 바꿀 수 있다”며 “거리시설물에 대한 디자인은 관(官)이 민(民)에게 줄 수 있는 중요한 행정 서비스”라고 말했다.
○서울시민 디자인불만 가로판매대-휴지통-분리대順
서울시립대 도시과학연구원은 2002년 12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서울 전역의 거리환경을 직접 살펴본 뒤 시민 편의를 도와야 할 거리시설물이 오히려 △보행을 방해하거나 △현란한 모양과 색깔로 정보를 알아보기 힘들게 하고 △무질서하게 나열돼 미관을 해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구체적으로, 버스정류장은 미관도 문제지만 정보전달 기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휴지통은 일반용과 분리수거용이 혼재돼 있는 데다 청결하지 않아 거리 이미지를 해치는 대표적인 시설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 또 가로 판매대에는 불필요한 부착물과 광고물이 많아 보행 흐름을 방해하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이 조사에서 서울시민들은 디자인이 가장 불만스러운 거리시설물로 가로 판매대(20%), 휴지통(14%), 인도-차도 분리대(12%), 버스 승차대(12%) 등을 꼽았다. 이 밖에도 우리 거리에선 통나무 무늬의 콘크리트로 만든 벤치나 정자 등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일본의 경우 사인(Sign)학회가 이 ‘가짜’들을 추방하기 위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편 결과,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재료의 특징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그것을 살리는 것이 더 세련된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디자이너들이 가장 질색하는 게 바로 이런 ‘가짜 재료’다.
거리시설물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해 도시의 표정을 바꾸거나, 아예 이를 그 도시의 문화상품으로 부각시킨 도시들이 있다. 독일의 하노버가 대표적인 경우. 이렇다 할 만한 관광자원과 특산품이 부족했던 하노버는 1990년대 초반 ‘버스정류장 프로젝트’를 통해 버스정류장도 공공장소에 세워지는 예술품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유명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시내 9곳의 버스정류장 디자인을 의뢰해 시의 새로운 명소를 창출해 낸 것. 나아가 버스정류장 안내서와 포스터, 그리고 프로젝트의 디자인 초안부터 완성된 모습까지의 화보 등을 담은 책으로 펴내 판매하고 있다. 별것이 다 장삿거리가 되는 세상이다.
영국 런던은 전통적인 거리 특성에 어울리는 가로시설물을 디자인한 곳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설물들은 초콜릿 색으로 하고 공중전화 부스나 버스는 이와 대조되게 빨간색으로 통일해 ‘런던’ 하면 떠오르는 독창적인 거리의 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각 도시의 특성을 살리는 거리시설물을 만들어 낼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전국 어느 도시를 가나 거리시설물이 대동소이한 마당에 제주도의 현무암, 이천의 도자기처럼 지역 특색을 살린 소재를 활용해 차별화된 거리시설물을 만들 수 없느냐는 얘기다.
○거리 시설물도 디자인대상…문화상품으로 키워야
1월 초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거리의 가구 디자인전’은 의미 있는 거리시설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디자이너가 맡아야 할 몫은 과연 무엇이겠느냐는 고민을 담은 우리나라의 첫 전시회였다. 전시장에는 어린이 장난감 ‘레고’에서 착안한 벤치와 야외 테이블, 벽에 작은 창을 내고 변기를 서로 엇갈리게 설치해 ‘소통’을 강조한 공공화장실, 맨홀처럼 길바닥에 투입구를 만든 휴지통 등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번득였다.
이 전시회에 디지털시계, 스테인리스스틸 의자 등으로 깔끔하게 연출한 버스정류장을 출품했던 서울시립대 산업디자인학과 김성곤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개념인 ‘스트리트 퍼니처’도 디자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민들과 함께 공감했다. 이젠 실제 거리에서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환경개선 주체 제각각… 통합 디자인시스템 갖춰야
거리시설물들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는 거리환경 전체를 통합적으로 보는 디자인 시스템이 절실하다. 서울시의 각종 가로환경 개선사업을 보자. 주체가 그때그때 시나 구로 나뉘다 보니 사업 자체가 산발적으로 이뤄지고 그나마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서울시의 ‘가로환경디자인 개선 기본계획안’을 작성한 서울시립대의 조경진 교수(조경학)는 “녹지 가로사업, 역사문화 탐방로사업, 걷고 싶은 거리 만들기 등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시행 주체가 서울시 안에서도 주택국, 도시계획국, 조경과, 문화관광과 등으로 다르고 구청별로도 제각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도로구획이나 쓰레기통, 가로등의 디자인이 구간마다 달라 통일성이 없는 것은 물론 지역별 특징도 찾기 힘든 것이 당연한 일. 조 교수는 “거리시설물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부서를 두어 각각의 시설물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구청간에도 일정한 흐름을 형성해야 비로소 도시의 표정이 살아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획 단계부터 디자이너가 ‘개입’해야 ‘제대로 된’ 거리시설물이 나올 수 있다는 점. 정보공학연구소의 김경균 소장은 “외국에서는 유명 디자이너들이 아예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거나 위탁회사가 거리시설물 설치 때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산업디자인계의 거장 필립 스탁이 만든 버스정류장이 파리의 명소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디자인과 무관한 업체들이 시설물을 발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집장수가 지은 집’처럼 볼품 없는 거리시설물이 양산되고 있다는 얘기다. 김 소장은 “디자이너, 도시계획가, 건축가, 그리고 이들의 전문성을 이해할 줄 아는 공무원이 원활하게 연계되고 협조할 때에만 시민들이 좋은 거리시설물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 동아일보 5월 5일자,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3>도시의 표정-간판과 색채
[공공디자인 도시를 바꾼다]<3>도시의 표정-간판과 색채
《서울의 대표적 상업지역인 중구 명동거리. 건물은 물론 보행자 통로까지 온통 요란한 간판으로 뒤덮여 있다. 한 카페는 전면 간판과 돌출간판을 단 것도 모자라 유리창에 큰 글씨로 상호를 강조해 표기했다. 한 안경점은 건물 전면에 파란색 대형 간판을 3개나 단 뒤 유리창 사이의 벽면마다 5개의 세로 간판을 더 붙였다. 주택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서울 서초구 한 아파트단지 안의 상가는 4층 건물 외벽이 온통 간판으로 뒤덮여 아예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서울시내 간판의 35%는 규격이나 부착 위치 등을 어긴 ‘불법’ 간판이다. 설사 적법한 간판이라 해도 필요 이상으로 크고 많고 현란하다는 데 전문가들과 시민의 시각이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의 간판은 위치나 규격 등 지킬 것은 지키면서도 개성을 표현하는, ‘통일성 속의 다양성(Variety in Unity)’을 갖고 있다. 유럽의 간판은 대체로 무채색에 작고 세련된 모양이며 일본의 간판은 전자상가로 유명한 도쿄 아키하바라처럼 혼란스러운 곳도 있지만 대개는 소박하고 작다. 일본풍이 물씬 풍기는 전통스타일도 많다. 그런가 하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대표되는 홍콩의 간판들은 화려하지만 번잡스럽지 않아 그 자체가 하나의 명물이다. 수천년간 내려온 중국 특유의 빨간색과 고급스러운 전통 문양이 어울려 홍콩의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간판은 대부분 직사각형에 고딕체로 상호를 표시한, 천편일률적인 것들이다.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더구나 우리 전통미를 살린 간판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렇게 된 1차적 원인은 영세한 간판 제작시장 탓이다. 서울시 윤혁경 도시정비반장은 “달랑 휴대전화 하나 들고 영업하는 영세업자가 넘쳐난다. 여기엔 디자인 개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덧붙여 ‘간판이 두드러져야 돈벌이가 된다’는 상인들의 경쟁심리까지 가세해 ‘싸구려 재료’로 ‘주변 경관과 상관없이 무조건 크게’ 만든 저질 간판이 넘쳐나는 게 21세기 한국의 도시 풍경이다.
●건국대앞 노유거리 간판 정비한 뒤 손님 50% 늘어
월 서울 종로에서 ‘아름다운 간판 전시회’가 열렸다. 하얀 바탕에 작은 글씨로 상호를 표시해 ‘여백의 미’를 강조한 신림동의 카페 ‘나무사이로’가 금상을 차지했다. 은상을 받은 청담동의 옷가게 ‘옥동’은 세로 나무판에 상호를 철 상감해 고풍스러운 느낌을 줬다. 간판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드디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의류상점이 많은 서울 광진구 건국대 앞 노유거리는 2년 전 ‘패션거리’의 이미지에 걸맞게 간판을 정비한 뒤 거리 전체가 활기를 찾은 케이스. 광진구청측은 이 지역 상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바꾸면 이렇게 좋아진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여 주고 불법간판에 대해선 과징금을 물리는 등 끈질긴 노력 끝에 ‘큰 간판’에 집착하던 상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노유거리의 한 상인은 “간판 정비 전에 비해 손님이 50% 이상 늘었고 꼭 쇼핑을 안 해도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져 거리가 하나의 명물이 됐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서울시는 이화여대 정문 앞, 종로 등지에서도 간판을 포함한 가로환경 정비사업을 하고 있거나 할 계획이다. 하나의 상점이 세련된 간판을 내거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리 전체를 바꿔야 유동 인구가 늘고 상권도 살아난다는 것이 서울시측의 설명이다.
●주변 건물-도로 색깔과 어울리는 세련된 배색 필요
판 정비는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까. 볼품없이 크기만 한 간판들을 보다 단정하고 세련된 모양새로 정비해야 할 필요는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획일적 기준을 적용하면 곤란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성균관대 김도년 교수(도시계획 전공)는 “무질서한 간판을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과 업종의 특성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한옥마을로 유명한 서울 종로구 가회동과 안국동 인근의 상가에 강남 테헤란로의 현대식 빌딩군에서와 같은 규격의 간판을 강요하면 또 다른 흉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 그뿐이 아니다. 간판의 색이 도시 전체의 색조를 좌우한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건물의 주조 색 및 보도 색과 조화를 이뤄 간판이 도시의 색깔을 연출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숙명여대 기업정보디자인센터 김영미 책임연구원은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빨강색 간판은 안 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며 “디자인 개념만 있으면 빨강 간판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상업지역은 다양한 색채로 개성을 나타낼 수 있게 하되 채도를 조금 낮추고 주거지역은 무채색으로 하는 식으로 미감을 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한성대 예술대 지상현 교수는 “간판을 포함한 우리나라 거리 색채에는 심리학적으로 긴장을 유발하는 배색이 많은 반면 일본의 경우 중간색을 많이 사용해 긴장도를 완화하고 있다”면서 “이제는 우리도 고유의 거리 색채를 다양하게 개발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 규제냐 자율이냐
개인 소유인 간판 등 옥외광고물에 대한 정비를 관의 규제 아래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민간 자율에 맡겨야 하는지 논란이 분분하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간판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실시하고 있다. 미국 뉴욕은 타임스 스퀘어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간판에 깜빡이는 조명을 설치할 수 없다. 맨하탄 5번가에서는 돌출형 간판을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간판 설치에 앞서 그 모양을 신고해야 한다.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체인인 맥도널드의 노란 ‘M’자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하얀 글자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에선 주민들이 주축이 된 각종 위원회가 자율적으로 규칙을 정해 자체 정비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또 홍콩은 시민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간판에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는다.
서울시 윤혁경 도시정비반장은 “간판 문화에 대한 시민의 의식수준이 낮고 제작시장도 협소한 우리 현실에서는 자율에만 맡길 경우 좋은 디자인의 간판이 나오기 힘들다”며 “간판 등 광고물은 어느 정도 규제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디까지 규제해야 할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한성대 지상현 교수는 “규제만 앞세우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규제를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며 “서울시의 ‘종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처럼 시범가로를 정해 우선 정비하는 방안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말했다.
한군데서 간판을 정비해 유입인구가 늘고 주변 상점의 매출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다른 지역들도 따라올 것이라는 얘기다. 간판업 종사자에 대해 일정시간 디자인 교육을 실시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덧붙인다.
간판 디자이너 김영배씨는 “간판은 하나의 문화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뜯어고치기는 불가능하다”며 “규제와 함께 간판에 대한 시민의식 개선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동아일보 5월 6일자, 채지영기자(yourcat@donga.com)
<4>속옷같은 미학-신분증과 서식
《지난 6개월여 동안 한 지방자치단체의 서식(書式) 디자인 교체작업을 진행해 온 국내 유수의 시각디자인 회사인 D사는 최근 이 일에서 손을 뗐다. 한두 번의 설명회면 족한 기업체와 달리 이 지자체에서는 실무자부터 과장 국장 단체장까지 무려 7번의 설명회를 열어야 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공무원들의 ‘증거주의’. “새 디자인이 더 좋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요구에 시달렸다. 서식 발급 비용을 30% 낮출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설명했지만 공무원들은 계속 결정을 미뤘고, 견디다 못한 D사는 스스로 포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관청이 발행하거나 사용하는 증명서와 신분증, 공문서, 그리고 각종 서식에도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 잘 디자인된 서식은 업무능률을 올려주는 것은 물론 관에 대한 주민의 친밀감을 높여 결과적으로 정부의 세수입을 늘려준다는 것이 민간기업이나 선진국의 경험이다. 그러나 D사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사례에서 보듯 우리의 현실은 아직 척박하다.
● 佛 관련공무원 매년 디자인 전문대학원 보내 교육
현재 정부기관과 지자체가 사용하는 공문서 서식은 관련 법령이 정하는 정보만 기재하면 될 뿐 디자인의 세부사항에 관해선 별다른 규제가 없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2002년 이후 이 서식 디자인의 교체를 ‘시도’한 공공기관은 전국적으로 20여곳에 이른다. 그러나 산업자원부, 특허청, 조달청, 서울시청 등 5, 6개 대형 기관을 제외하면 서식 교체에 성공한 사례는 별로 없다. 서식의 성격상 눈에 확 띄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고 담당자들의 인식도 부족해 중도에 작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증 등 항상 소지해야 하는 공문서도 디자인이 중요하지만, 실정은 서식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과거의 주민등록증이 디자인에 문제가 있고 위변조도 쉽다는 등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가자 정부는 1999년 교체작업을 단행했다. 이 디자인 교체를 주관한 조폐공사측은 “홀로그램, 미세문자 등 최첨단 보안요소를 적용해 개인정보 유출 방지에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그러나 새 플라스틱 주민등록증 역시 서체, 공간 처리, 재질, 촉감 등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여러 서체가 섞여 있고 사진과 표제글자가 너무 커 산만한 느낌을 준다는 비판이다.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 안상수 교수는 이 요령부득의 주민등록증 교체작업과 관련해 “관리자인 국가의 편의를 우선시하고 사용자인 국민을 위한 미적, 기능적 고려는 뒤로 밀어둔 대표적인 경우”라고 지적했다.
▽선진국의 ‘고객 제일주의’ 공문서 문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공문서인 운전면허증의 경우 미국(왼쪽), 호주(오른쪽) 등에서는 각 지방정부가 자율적으로 디자인하기 때문에 서체, 사진 크기, 재질 등의 다양성을 꾀할 수 있다. 미국 운전면허증의 경우 주 지도들 그려넣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는 매년 일정 수의 공무원을 디자인 전문대학원에 파견해 공문서 디자인을 연구하도록 하는 관학(官學)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아름답고 편리한 공문서는 국민에 대한 서비스’라는 인식이 있기에 가능한 얘기다.
디자인 전문가들은 신분증이나 관공서 서식을 ‘속옷’ 디자인에 비유한다. 자동차 번호판, 길거리 휴지통처럼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얼핏 드러나는 모습에서 해당국가의 디자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 호서대 송성재 교수(편집디자인 전공)는 “잘 디자인된 공문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료 디자인교육을 하는 효과도 있다”며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관공서 서식은 디자인이 뛰어나서 소장품 대접까지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반해 국내의 공문서 디자인은 주민등록증의 예에서 보듯 아직 ‘공급자 편의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사무소에 비치된 주민등록 등·초본 신청 서식도 1962년 주민등록법이 제정된 뒤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 서식을 관리하는 행정자치부 담당자는 “이미 익숙해진 서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2001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공공디자인 전시회에서 증명서 분야를 기획한 인터그라픽의 김주성 실장은 주민등록, 호적·인감증명 등의 서류를 각기 다른 색상으로 제작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생각의 틀을 조금만 바꿔도 사용자는 보기 쉽고, 관리자는 분류하기 쉬운 공문서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자부 증서 바꾼뒤 비용-사고 줄어 ‘1석4조’ 효과
국가인권위원회는 2001년 출범을 앞두고 CI와 공문서 디자인 작업을 병행했다가 공문서 쪽은 포기했다. 예산 문제도 있었지만, 공문서는 담아야 할 정보의 양이 많아서 디자인 개발에 제약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자인 개념을 도입해 제대로 만든 공문서가 가져오는 효과는 ‘기대 이상’이다. 2002년 10여개 부서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 오던 행정증서의 디자인을 통일한 산자부의 경우를 보자. 디자인을 통일하자 전산관리가 가능해졌고, 이 덕분에 위·변조 사고도 크게 줄었다. 각 부서의 증서 제작 비용도 당연히 줄었다. 당시 디자인 실무를 맡았던 씨큐텍의 류헌진 사장은 “디자인 개선은 단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품격 향상은 기본이고 관리업무 효율성 제고, 보안사고 방지, 비용 절감 등 1석4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 디자이너 양성 시스템
단순 기술 인력보다 경영-기획능력 갖춘 프로 인재 길러내야
엽기 토끼로 알려진 ‘마시마로’는 국산 캐릭터로는 드물게 대중적 성공을 거둔 케이스다. 디자인이 그만큼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고 적시에 마케팅을 해낸 뛰어난 기획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실제 마시마로 성공의 대가도 디자이너보다는 기획자가 더 많이 가져가고 있다.
디자인에 있어 기획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우리 디자인을 선진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려면 기획력을 갖춘 디자이너의 양성이 절실하지만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산업자원부의 ‘2000년 디자인 센서스’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은 대학 디자인 교육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가 ‘기획력 부족’(37%)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대학의 디자인학과들은 마케팅 관련 과목을 한두 개씩 개설하지만 이를 진지하게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디자인계의 전반적 분위기가 예술적 관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적 상상력은 공학적 배경이 필요한 것으로 예술적 상상력과는 일정 부분 다른데도 말이다. 서울예술대 시각디자인과 구환영 교수는 “디자인학과의 70%가 미술대 소속이다 보니 디자인과 경영을 접목시키는 전통이 부족하다”면서 “경영 관련 이수과목 수를 늘리고, 경영대나 공대에 디자인 과목을 개설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디자이너 활용 기준이 모호한 것도 디자인 발전을 저해한다. 기업은 디자이너의 기획력 부족을 아쉬워하면서도 정작 디자이너 채용 때는 ‘실기 능력’ 위주로 뽑고, 입사 이후에도 기획이나 마케팅 분야의 일을 시킬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디자이너가 경영 안목을 갖고 제품을 기획하는 능력은 단기간에 길러지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디자이너의 기획력 보강을 위해선 대학 때부터 산업현장에서 실무를 배울 수 있는 산학(産學)협력 프로그램을 늘리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 동아일보 5월 7일자,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5·끝>상징과 생산성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를 통틀어 이미지 통합(CI)작업을 하지 않고 캐릭터도 갖지 않은 지자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전국 250여개 지자체 CI의 절반 이상이 교체 대상일 정도로 대부분의 지자체 CI는 촌스럽거나 특색 없는 것들”(정석원 엑스포디자인연구소 사장)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지자체 CI가 왜 이 모양인가. 지난해 모 지자체의 향토축제 포스터 작업을 맡았던 디자이너 S씨는 “어떤 디자인이 미적으로 뛰어나며 행사 내용을 잘 표현하느냐는 점보다 단체장의 의중을 우선시하는 풍토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재 단계를 밟아갈 때마다 “이 색깔은 단체장이 싫어하니까 써서는 안 된다”거나 “단체장이 이 점을 강조하라고 했으니 크게 해 달라”는 등의 주문이 계속되더라는 것이다.》
지자체의 CI가 단체장의 ‘자기 과시용’ 쯤으로 치부되다 보니 ‘디자인’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엉터리 CI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것은 지자체 CI 바람이 1995년 단체장 직선제 실시 후부터 생겨났다는 사실로도 입증할 수 있다.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CI가 교체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때문에 디자인업계는 지방선거 직후마다 반짝 특수를 누리곤 한다. 여기에 캐릭터 개발을 통해 수익사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벤처의식’도 지자체 CI 바람을 부추겼다.
지자체 CI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업체 CI가 인지도 제고를 통해 궁극적으로 ‘매출 증대’를 지향하는 것처럼 지자체 등 공공기관의 CI도 ‘비즈니스 마인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목표가 확실해야 제대로 된 CI가 나올 수 있다는 것. 한성대 예술대 지상현 교수는 “CI는 조직과 경영 전반을 재정비해 통일된 이미지를 표출하는 작업”이라며 “경영 현황과 조직의 비전을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나면 디자인의 차별화는 절로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디자인이 중요해지는 추세를 감안하면 지자체 내에 디자인 부서를 두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도 있다.
●절반이상 정체성 떨어지고 촌스러워 교체해야
자체 CI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디자인이나 색상 등이 비슷한 사례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경남, 경북 김천시, 경남 거제시, 강원 동해시 등의 CI는 공통적으로 빨간 태양을 소재로 삼았다. CI에 산을 활용한 지자체는 서울시, 대구시, 충북, 강원 춘천시 등 10개가 넘는다. 이는 ‘지역 특성을 반영하자’는 막연한 생각으로 지역 내의 산과 강 등을 CI의 소재로 삼는 게 유행했기 때문. 정석원 사장은 “우리나라에 강이나 산을 끼지 않은 지방이 어디 있느냐. 그런 걸 ‘지역 특징’이라고 내세우니 CI가 비슷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색다르다’는 CI는 미적 요소가 결여돼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다. 전통 민화에 나오는 호랑이 이미지를 반영했다는 서울시 마스코트 ‘왕범이’는 1998년 초 선보였으나 지금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오리를 형상화한 서울 영등포구 마스코트, 경찰서 파출소마다 걸려 있는 ‘포돌이’ 역시 엉성한 상징물로 지적된다. 지상현 교수는 “포돌이는 선 처리나 얼굴과 몸통 비율 등 여러 면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캐릭터”라고 잘라 말했다. 지자체 상징물이 눈길을 끌지 못하는 데에는 ‘적은 예산’도 중요 원인이다. 전남지역 한 지자체의 디자인담당 공무원은 “예산을 요청하면 ‘디자인에 무슨 돈이 그렇게 드느냐’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뉴욕 도쿄 홍콩 세련된 이미지 대표적 성공사례
미국 뉴욕시는 1975년 ‘I♥NY’라는 상징물을 개발해 관광산업 등에 적극 활용했다. 그 뒤 ‘I Love New York’이라는 로고송까지 나오는 등 큰 인기를 끌면서 ‘I♥NY’는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을 뜻하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일본 도쿄는 모든 이의 요구와 질문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완벽한 도시’라는 개념의 ‘YES! TOKYO’ 상징물을 개발해 이미지 제고에 활용하고 있다.
홍콩의 CI는 영문 이니셜 HK와 용의 모습을 혼합해 동서 융합을 상징한다. 홍콩의 역동성과 속도감이 느껴지며 중국의 상징색(빨강)을 적절히 활용했다는 평이다. 독일의 쾰른 역시 도시의 대표적 건축물인 대성당의 이미지를 도시환경시설부터 관광상품에까지 반영하는, 일관된 CI를 구축해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세련된 지자체 상징물이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다. 제주도는 이미 국경을 넘어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를 굳힌 인도네시아의 발리처럼 ‘세계 속의 제주’를 브랜드화하기 위해 국내 지자체 최초로 영문 워드마크를 도입했다. 전남 장성군은 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이 장성군 출신의 실존인물이라는 자체 고증을 토대로 1998년 홍길동 캐릭터를 개발해 매년 수천만원의 로열티 수입을 올리고 있다.
김현 디자인파크 사장은 “지자체 CI를 개발할 때는 차별성을 찾는 것은 물론 관광 비즈니스 측면까지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 함량미달 CI 왜 많은가
‘높은 분’ 아는 업체 유리 심사위원 비전문가 많아 선정과정 투명공개 급해
지방자치단체가 이미지통합(CI) 캐릭터 엠블럼 포스터 등 디자인 상징물을 만들 때 특정 업체와 수의계약을 맺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혜 시비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 공고를 내고 제안서를 받은 뒤 대학 교수와 디자인 전문가, 시민단체 관계자, 지자체 간부 등이 두루 참가하는 심사를 거쳐 업체를 선정한다.
그러나 정말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학 교수 B씨는 한 지자체의 CI 심사에 참여했다가 ‘왕따’가 된 적이 있다.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작품을 평가했더니 한 심사위원이 “가만히 있으라”고 눈치를 줬던 것.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단체장과 가까운 업체가 내정돼 있었다”는 게 B씨의 씁쓸한 회고. 디자인 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영남권의 한 기초단체는 심사 결과와 다른 업체를 선정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고 전했다.
심사위원회의 구성도 문제다. CI 캐릭터 등은 디자인 영역인데도 비전문가들이 심사위원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 디자인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어 회화 조각 등 순수예술을 전공한 미대 교수를 ‘디자인 전문가’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디자인계의 고질적인 ‘파벌주의’도 불량 디자인의 큰 원인. 같은 대학 출신이나 알고 지내는 업체의 작품에 점수를 후하게 주는 것이 관행이다. 물론 출품회사 이름을 가리고 심사하지만 작품과 함께 제출되는 해당업체의 실적을 보면 어느 회사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어 특정 업체 봐주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1980년대 ‘형편없는 디자인’으로 지탄받은 보라색 서울시내 버스도 아는 사람끼리 감싸 주고 적당히 넘어가는 파벌주의가 낳은 부작용이라는 얘기다.
송성재 호서대 예술학부 교수는 “디자인업체를 선정할 때 특정 학맥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응모해 채택될 수 있도록 공모와 심사 과정을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면서 “이것이 디자인업계도 살고 공공디자인 자체도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 동아일보 5월 8일자,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