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헌사의 쟁점―③ 직지의 고단한 여정] ‘직지’복원 이뤄야 진정한 귀향
우선 흔한 오류부터 정정해야겠다. ‘직지심경’은 틀린 말이다. 불서(佛書)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직지는 경(經)이 아니라 요절(要節)이다. 따라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라는 본명이 너무 길다면 ‘직지심체요절’ 혹은 ‘직지’라고 불러야 한다. 모름지기 제 이름을 찾아주는 게 관심의 시작이다.
직지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극귀중본으로 분류돼있다. 하지만 불과 30여년 전만해도 보통본을 보관한 일반 서가에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한 열성적인 재불 서지학자가 그 가치를 알아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씨는 그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전시회에 내놓을 한국 작품을 찾다 직지를 발견한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청주에서 파리까지=문헌상으로 직지의 존재는 오래 전부터 알려져있었다. 1901년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이 펴낸 ‘한국 서지’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어떤 금속활자본보다 빠른 것”이라고 직지를 소개했다. 실물 직지가 발견된 뒤 학자들 사이에서는 직지의 여로를 놓고 추적에 들어갔다. 직지는 언제,어떻게 수만리 바닷길을 건너 파리에 정착하게 된 것일까.
직지의 여정 중 초기 500여년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게 없다. 직지는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뒤 승려와 당대 권력자인 최씨 무신 정권의 실세에게 진상됐을 것으로 보인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조선조 500년을 지나면서 이중 대부분이 없어졌고 일부만 사찰과 일부 가문에 전해 내려왔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직지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주한 프랑스 초대공사인 콜랭 드 플랑시(1853∼1922)였다. 중국어를 전공한 플랑시는 중국에서 8년간 통역관으로 근무한 중국통이었다.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아 한국 부임 뒤에는 공사관 앞에 고서를 산다는 방을 써 붙일 정도로 책 수집에 열중했다. 마침 프랑스 정부는 1872년 국립동양어학교의 건의를 받아들여 각국에 파견 나간 외교관에게 서적 기증을 의무화했다. 플랑시는 국가의 지원과 독려 속에 고서를 무더기로 수집하고 이중 600권을 기증하기에 이른다.
직지는 이런 와중에 플랑시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플랑시가 언제,어디서 직지를 만났는지는 사실 확실치 않다.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플랑시는 고종 황제를 비롯한 고위직 대신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니 이들로부터 직지를 기증받았거나 혹은 노전에서 헐값에 구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플랑시가 직지를 입수했을 때 이미 직지는 상권이 없고 하권도 첫번째 쪽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직지의 가치를 직감한 것으로 보인다. 직지를 입수한 뒤 표지에 “1377년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고 펜으로 기록했다.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에 앞서 직지가 존재를 드러낸 것은 1900년 파리 세계만국박람회에 마련된 한국관의 전시목록을 통해서였다. 이어 직지는 파리 시립 드루오 경매청 기록에 등장한다. 당시 직지는 1911년 앙리 베베르에게 180프랑에 판매된다. 다시 베베르의 유족들은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직지를 다른 소장품들과 함께 기증한다. 고향 청주를 떠난 직지는 그렇게 고단한 여정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다.
◇다시 고향 청주로=직지는 왜 고려의 도읍지인 개성이 아니라 청주에서 인쇄됐을까. 직지가 인쇄되기 전 이미 개성에서는 ‘상정예문(詳定禮文)’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등이 인쇄됐다. 찬란했던 고려의 인쇄문화는 원나라의 지배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가 14세기 후반 서적포,서적원 등이 다시 설치되면서 활성화된다. 직지가 등장한 것은 바로 14세기 초·중반의 쇠퇴기. 중앙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던 이 때에 사찰 등 변방의 인쇄 문화는 되레 활발해졌고 따라서 직지는 개성이 아니라 청주에서 제작된 것이다.
직지의 저작권자인 우리에게는 원본 대신 복제품 2종만 있다. 박정희,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이 프랑스 방문길에 선물로 받아온 것이다. 복원품이라는 말 대신 복제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것이 사진판으로 제작됐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직지를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외규장각 문서와 달리 직지는 플랑시가 합법적으로 수집해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직지의 복원을 통해 귀향을 시도할 수 있다. 직지를 찍은 금속활자는 밀랍주조법으로 제작됐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는 사찰에서 범종 등을 주조하던 방법이다. 우선 밀랍으로 본을 뜬 뒤 이를 검은 흙으로 감싼다. 흙을 건조시킨 후 불에 구워 밀랍을 녹여낸다. 밀랍이 녹아 빠져나간 공간에 금속 용액을 주입해 활자를 만든다. 1986년 한 전문가는 옛 방식 그대로 직지 활자 주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그 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으로 지정됐고 최근까지 20여건의 복원작업을 수행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과 의혹이 있다. 우선 주형의 재료인 검은 흙 대신 치과주조용으로 처방된 석고계 매몰재를 사용했다. 치과용 석고가 고려시대 있었을리는 만무하다. 복원작업도 상당 부분이 하청에 의해 이뤄졌다. 이는 복원이 아니라 복제일 뿐이다.
직지의 복원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검은 흙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최근 청주시의 의뢰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활자본 복원사업 기초조사연구’를 하면서 흑연,숯가루 등을 넣은 점토를 이용해 활자를 주조하는 데 성공했다. 혹 이것이 고려의 인쇄 문화를 꽃피운 검은 흙은 아니었을까. 비밀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계속되는 연구와 실험을 통해 직지는 고향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 국민일보 5월 18일자, 조형진(강남대 인문학부 교수)
※ 첨부파일 : 직지의 표지 (사
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