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헌사의 쟁점] ‘지식 유통로’ 서점 언제 생겼나


중국 쓰촨성에 있는 고서점 ‘도서재’의 주인은 40여년 옛책만을 취급해온 외곬 인생이다. 고문헌에 대한 지식이 웬만한 전문가 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긍심도 대단해 외국인에게는 책을 잘 내놓지 않는다. 수 많은 외국 학자들이 번번이 퇴짜를 맞고 돌아갔다는데 필자는 외모 덕을 톡톡히 봤다. 둥그스름한 얼굴 생김새가 중국인과 흡사한데다 중국어 실력도 나쁘지 않아 몇 차례 내국인을 가장해 귀중본을 구입했다.
그러나 이런 고서점이 있는 반면 우리나라 지방의 중소서점은 경영난에 시달린다고 한다. 발길에 채이는 ‘책 쓰레기’를 볼 때마다,사라져가는 서점을 볼 때마다 ‘도서재’에서 귀중본 몇 개를 건진 뒤 애써 태연한 척 서점 문을 빠져나올 때의 통쾌함을 떠올린다. 등 뒤로는 한 줄기 식은 땀이 흐르고 가슴은 진흙에서 보석을 찾은 듯 뿌듯하던 느낌.
책이 너무 흔해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세상이고 서점이 사라진다는 말이 나오지만 한때 서점은 정보의 보고였다. 서점이 처음 생겨났을 때 사람들은 지식과 재미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소수 엘리트가 독점하던 지식이 높은 벽을 허물고 민간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책은 언제부터 상품으로 판매된 것일까,서점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서사(書肆)의 기원
우선 서사라는 말부터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 등 고문헌을 보면 서적 매매 기관의 설립을 논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주로 서사라는 말이 쓰이고 서점은 간혹 등장한다. 사(肆)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서사는 서적을 매매하는 점포. 서사 설립을 주장한 조선 중종 때 학자 어득강이 서사와 서점을 혼용한 걸로 보아 둘은 동의어로 보인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책은 교서관이 간행해 국왕이 신하에게 선사(宣賜)했다. 혹은 종이와 품삯을 내면 책을 찍어주거나 역관 등 소개인을 통해 완제품을 구입했는데 역시 상류 엘리트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공식적으로 서적을 간행하고 보급하는 곳은 교서관 한 곳이었다. 차츰 서적의 수요가 증가하고 지식에 대한 일반의 욕구가 커지면서 국가 독점은 한계에 다다르게 됐다. 드디어 국가는 책과 지식이 원활하게 보급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민간 서적 유통 시장인 서점 설립으로 이어진다.
최초의 서사가 등장한 시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먼저 1551년(명종 6년)설이 있다. 근거는 조선 초기 문인인 어숙권의 ‘고사촬요(攷事撮要)’에 실린 ‘서책시준(書冊市准)’이다. 서적 간행에 필요한 종이 수량과 인쇄,장정 등의 간행 비용이 기록됐는데,가격이 매겨졌다는 것은 판매가 시작됐다는 뜻이므로 이때를 서사의 기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선왕조실록도 1551년설을 뒷받침한다. 서사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종조(1506∼1544). 중종 14년인 1519년에 처음으로 논의가 시작된 뒤 중종 17년,24년,28년,33년,37년까지 서사 설립이 계속 논의됐다. 당시 주창자들은 불법으로 과거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온 책을 관이 몰수해 팔면 부정도 막고 서적도 공급할 수 있다는 등의 논리를 폈다. 이어 명종 6년인 1551년에는 왕이 서사의 설립을 윤허했다. 이후 서사 설립에 관한 논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이때 서점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훨씬 후대인 1829년(순조 29년)설을 주장하는 측도 있다. 이들은 ‘실록의 기록이 설립에 관한 논의일 뿐이지 서사를 설립했다는 기록은 아니다’며 1551년설을 부정한다. 서울 보은단동(지금의 서대문 근처 미동)에 있던 서사를 최초로 간주하는데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보면 순조 29∼30년(1829∼30년)에 보은단동에 서사가 운영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서사의 발전
조선 중종 때 논의를 거듭했던 서사는 관영(官營) 서사였다. 당시 민간 자본은 서사를 설립할만큼 축적되지 못했다. 중종조 학자인 어득강과 남곤 등은 서사 설립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 보고했는데 서판(書板)과 책지(冊紙) 등을 준비하고,운영에 필요한 절목(節目)을 제정한 뒤 국가가 인쇄한 서적을 서사에서 판매하도록 했다. 책값은 ‘감장원(監掌員)’을 임명해 산정토록 권했다.
민영 서사는 상당히 늦게 나타난다. 기록에 보이는 민영 서사는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된 보은단동의 것이 처음이다. 하지만 출판문화사적 관점에서 살펴봤을 때 1829년에 처음 민영 서사가 등장했다는 추정은 시기적으로 너무 늦다. 관련 기록을 좀 더 추적해봐야 하는데 방각본(坊刻本)은 결정적 단서가 될만하다.
방각본이란 개인이나 서사가 판매를 위해 별도로 제작한 책을 가리킨다. 지식층 중심으로 공급되던 서적이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민들의 여가와 정보를 위한 것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상품이 됐는데 이 때 등장한 것이 방각본이다. 따라서 방각본을 추적하면 민영 서사의 기원에 접근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방각본 중에서 초기의 것으로는 1576년 을해자복각본인 ‘고사촬요’,1585년 목판본 ‘고사촬요’ 등이 있다. 17세기의 것으로는 1660년 ‘신간구황촬요’,1664년 ‘명심보감초’ 등이 있다. 이렇게 이른 시기부터 방각본이 활성화됐는데 서사가 1829년 생겼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1551년설이 진실과 가까워보이지만 이 역시 사실(史實)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좀 더 풍부한 증빙 자료가 필요하다.
청나라 때 손종첨이라는 사람은 일생동안 책 밖에 모르는 책벌레였다. 책방에서 귀한 책을 구하면 기쁨에 사족을 못 쓰고 수중에 돈이 없으면 옷을 전당잡혀서라도 책을 입수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곱게 다시 장정해 읽고 또 읽었다. 클릭 한번으로 책을 구할 수 있는 인터넷 세상에서 손종첨의 수고는 갈수록 드문 일이 돼간다. 하지만 관영 서사이든,민영 서사이든,혹은 동네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이든 책과 만나는 곳이 어디이든 책벌레에게 무슨 대수겠는가. 앎의 보고를 만나는 즐거움만 있다면 말이다. / 국민일보 6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