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美를 논한다_9 여성성
'부정성'이 존재의 근거...형식을 거부하는 새로운 정체성
- 교수신문, 2004년 06월 21일, 심진경 (문학평론가)
1990년대 문학, 특히 여성문학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여성성’이다. 이는 모성성, 여성적 글쓰기 등과 같은 傍系 주제와 함께 여성주의 문학을 특징짓는 핵심 주제의 하나로 규정돼 왔다. 그 논의들은 대개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분리에 의거해 여성적인 원리는 주변적인 가치로 남성적인 원리는 중심적인 가치로 상정한 후 여성성을 결핍, 상실, 주변성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남성적인 원리를 물질적?세속적인 현실원리로 여성적인 원리를 ‘인내와 사랑의 원리’로 대립시킨 후 여성적인 원리를 남성적 원리를 극복하는 대응원리로 설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여성/남성’의 위계적인 성별 이분법을 고수하는 이러한 방식은 비록 여성성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남성적 주체를 보편화하는 근대적 사유틀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성을 여성적 경험, 특히 육체적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된 것으로 보는 논의도 많다. 예컨대 성교, 임신, 출산, 수유, 낙태 등과 같은 여성 육체의 경험은 여성적 언술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여성의 육체를 자기인식의 근원으로 자리매김하거나 여성의 성욕을 여성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우선시하는 최근의 소설적 경향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여성성에 대한 이해를 생물학적인 것으로 한정지을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은 자동적으로 그들 자신의 언술의 진실성을 담보해준다는 식의 본질주의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여성성을 남성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혹은 여성적 경험의 특성으로만 한정짓는 이러한 논의들은, 그 자체로 여성성을 남성적 가치 체계의 범주 내에서 작동되는 것으로 보는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여성성에 대한 오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 여성성에 대해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한 여성은 ‘자신의 여성성(물론 이는 관습적으로 규정된 것이다)을 망각해버린’ 여성이라는 이리가레이의 진술은, 비록 여성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니지만, 어떤 측면에서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은 남성적 가치체계라는 틀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상징적 규정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성성은 형식의 결여 그 자체를 의미한다. 형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 형식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특정 형식에 부여된 우월감에 대한 거부다. 따라서 여성 성장 소설이나 고백, 혹은 자전적 소설을 여성성이 특권화된 미학적 재현양식으로 규정하는 논의들은, 여성성에 대한 협소한 이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출간된 권지예의 ‘아름다운 지옥’이 1990년대 여성문학에서 오히려 퇴보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이러한 관습화된 여성성장 소설 장르를 도식적으로 반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성의 작가로 규정돼온 전경린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소설에서 자주 반복되는 가부장제적 질서 안과 바깥이라는 도식은 결국 ‘가부장제’라는 틀을 전제한 도식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즉 그녀들의 여성적 정체성이란 언제나 남성을 대타항으로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남성중심적 질서로부터의 일탈적 욕망은 결국 다른 남성과의 불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전경린 소설의 여성인물들이 표면적으로는 가부장제적 질서 바깥으로의 탈주를 감행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여성에게 부과된 가부장제적 운명을 뒤쫓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경린 소설은 남성중심의 오이디푸스적 서사를 반복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천운영 소설에서는 기존의 관습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논리에 의해 부과된 여성성의 자질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의 최근 단편들, 특히 ‘늑대가 왔다’와 ‘명랑’은 기존의 여성성의 통념을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여성적 정체성을 제시하고 있다. 늑대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소녀(‘늑대가 왔다’)나 할머니의 발에 대한 패티쉬를 통해 여성적 욕망을 발견하는 탐미주의자는 모두 기존의 오이디푸스 서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여성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성과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최근 신인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천운영식의 그로테스크한 탐미주의자들이 자주 발견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다시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여성성이란 특정한 형식적 규정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러한 질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여성성이란 여성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기호학적인 것과 같은 어떤 것인데 여기서 ‘기호학적인 것’이란 라캉의 실재(the real)에 가까운 개념으로, 상징계 내에서 언어화되지 않으면서도 상징적인 것을 떠받치는 것이다. 즉 부재를 증명하는 부재이자 전복된 텅 빈 중심이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기호학적인 것을 아방가르드 텍스트에서 발견하고 있다. 여성성이 문학 그 자체와 맞닿아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문학이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면, 여성성 또한 그러한 부정성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성은 더 이상 여성성이 아니다.
※ 심진경 (문학평론가)
필자는 서강대에서 '1930년대 후반 장편소설의 섹슈얼리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성작가 친일소설 연구', '한국 근대문학에 나타난 성담론 연구' 등의 논문이, '한국문학과 모성성'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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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예술이 그려내는 '여성성'의 지형
걸러지지 않은 미적 표현들
‘여성성’은 그동안 미적이기보다는 정치적 코드였다.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여성성이 강조돼왔다. 그러나 요즘엔 ‘여성의 본래성’이란 의미에서의 여성성이 트렌드가 되고 있다. 페미니즘계가 ‘투쟁’이라는 ‘막노동’을 해오다가 이제야 집을 꾸미고 채우는 세련된 작업을 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페미니즘계의 포지티브한 예술 활동에서 ‘여성성’의 실체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미술 쪽에서 마침 ‘여성성’을 표방한 전시가 두 개나 열리고 있다. 그 중 일곱 명의 여성작가가 모인 ‘부드러운 욕망’展(덕원갤러리)을 보자. 이들 작가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지 않는 생태적 자연관’과 ‘서로 간에 교환하며 흐르는 에너지’가 곧 여성성이며 ‘부드러움’이라 표현한다. 원문자는 조선백자로 ‘우아한 격조와 따스한 포옹력’을, 송수련은 분청사기로 ‘순환적 생명력’을, 최수화는 생물화된 사물과 식물화된 인간으로 ‘인간의 정겨운 속삭임’을 표현했다. 하지만 여성성은 ‘부드러운 욕망’으로만 표현되는 걸까. 강태희 한예종 교수(미술사)는 “이런 류의 작품에선 기존 관념에 반하는 의식이나 저항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라며 아쉬움을 표한다. 생물학적 여성성에 가깝다는 것. 물론 예술은 운동이 아니지만, 한 시대를 겪는 작가들에게 시대의식은 요구되고 있다. 강 교수는 또한 일부 젊은 작가들이 표방하는 ‘여성성’ 작품을 비판한다. 예컨대 상품화된 여성성을 비판하려고 여성의 속옷을 설치한 작품같은 것이다. 강 교수는 “미학적으로 걸러지지 않았다. 사회적 언급으로 쇼킹하지만, 예술적 언급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미학적인 섬세함이나 반어적 표현이 떨어진다”라고 지적한다.
연극 역시 아직 표현의 진부함을 넘어서지 못한 듯하다. ‘여성성’을 드러낸 대표작으로는 지난해 공연됐던 ‘푸르프’가 꼽히는데, 여기서 여성은 모던시대의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이라 정형화됐다는 느낌이 강했다. 김형기 순천향대 교수(연극평론가)는 “여성성에 있어 국내 연출가나 극작가들의 인식은 초보단계다”라고 말하면서, 특히 여성연출가, 작가들조차 비판적 의식이 부족함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연출가 한태숙을 꼽는데, 김 교수에 따르면 “한 씨가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주의’가 아닌 ‘보편성’을 내세우며 작품을 하는 건 한계일 수 있다”라는 것. 그렇기에 “한 씨의 작품 ‘레이디 멕베스’도 기존사회의 여성성 틀을 바꾸는 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라며 한계를 지적했다. 이 외에도 ‘버자이너 모놀로그’도 여성성을 표현한 좋은 작품으로 꼽히는데, 문제는 이것도 외국 것이라는 점이다.
사진은 가장 도발적인 ‘여성성’을 표현하고 있다. 원래 사진이란 매체는 포르노그라피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맺어왔다. 특히 요즘 기존 性구분을 탈피해 남성작가들이 ‘여성성’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혁발이라는 작가가 눈에 띈다. 지난 해 전시회도 열었고, 최근엔 자신이 도발적인 여장을 해 ‘섹시 미미’라는 사진집도 내놨다. 문제는 ‘여성성’을 과도하게 ‘섹시함’으로 등치시킨다는 데 있다. 최봉림 천안대 교수(사진평론가)는 “이혁발 등 젊은 작가들이 에로틱함으로 여성성을 연출하는데, 예술이라기보단 대중문화를 차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한다. 최 교수는 이들이 “상업성과 스캔들을 활용하려는 전략이 보인다”라며 여성성이 이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요즘 한국영화계는 유난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 개봉된 ‘하류인생’과 ‘아홉살 인생’, 지난해 ‘말죽거리 잔혹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1950년대부터 1970~80년대를 다룬 이런 영화들은 그 시대 남성들은 마초적이며 폭력적이었고, 이런 남성에 대비되는 한 편으로 ‘여성성’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남성적인 시대 속에서 그걸 뛰어넘는 여성성을 묘사한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이 눈에 띈다.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허문영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류인생’의 이야기는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죽어버린 어떤 시간대의 형상이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적 존재가 태웅의 아내 혜옥이다. 혜옥은 태웅과 탁한 질서에 대한 가장 예리한 논평가다. 권력의 개들로부터 임신한 배를 구타당해 피 흘리면서도 끝내 태웅을 품는 마지막 장면은 타락한 남성적 질서가, 실패한 인간적 서사가 모성 혹은 여성성으로부터 잉태될 것임을 암시한다.”
-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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