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없는 나라]선진국에선<중>英·佛 기록보관소

'기록은 국민의 것' 열람서비스 '고객감동'

‘과거기록을 거울삼아 현재와 미래를 본다’
취재팀은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아키비스트’(기록관리전문가)를 통해 오랜 전통과 현대 기법이 조화를 이루는 기록강국의 진면목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영국은 단순한 기록보존을 넘어 열람서비스와 공개 등 기록활용에 심혈을 쏟고 있었고 프랑스도 기록찾기와 전문인력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었다. 이번 취재에 동행했던 국가기록원 이영남 박사는 “이들 국가의 경우 전통의 토대에서 현대적 기법을 활용, 방대한 중세·근대·현대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보물창고’
취재팀이 이달 초 영국의 국립기록보존소(The National Archives·TNA)를 방문했을 때 1층 카페나 2층 도서실은 열람자들로 북적, 예사롭지 않은 기록열을 느낄 수 있었다. 로버트 스미스 언론담당책임자는 “연간 이용자가 약 30만명에 이르고 열람기록물도 100만권에 달한다”고 귀띔했다. TNA는 지난 10여년 동안 기록을 정보와 교육자원으로 활용,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해 왔다는 설명이다.
특히 열람서비스는 고객감동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피터 클라크 연수부장은 취재팀에게 문서고와 열람서비스 현장을 안내하면서 “신청기록물 중 90%가량은 30분 안에 열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는 TNA가 1999년 기록물 인수에서 최종 열람에 이르기까지 컨베이어 벨트로 기록물을 이동하는 문서주문·열람(DORIS)체제를 구축한 데 따른 것이다.
취재팀은 현장방문 내내 문서고와 열람실, 일반복도에 이르기까지 컨베이어 벨트로 기록보존상자가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부 열람자들이 “이곳이야말로 영국이 자랑할 수 있는 보물창고” “(열람서비스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라는 극찬을 남긴 것도 이 때문이다. 또 10평 남짓한 희귀본 열람실에서는 5명가량의 열람자들이 고문서를 넘기고 있었다. 클라크 부장은 “훼손 혹은 파손 우려가 큰 고문서의 경우 TNA 직원이 양손에 장갑을 끼고 책장을 대신 넘겨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보는 방법이 까다로워질지언정 ‘열람불가’ 기록은 없다는 얘기다.
◆고문서 나라,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 건물에 위치한 국립고문서학교(Ecole Nationale Des Chartes)는 아키비스트의 메카로 불린다. 이 학교는 1821년 루이 18세의 칙령으로 설립된 곳으로, 국가엘리트의 산실인 ‘그랑제콜’ 중 하나다. 매년 학생들이 대거 몰려 10대 1 이상의 높은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인기가 많다. 졸업생은 연간 25명가량 배출돼 고문서·도서관·박물관 등에 배치된다.
학생들은 입학하자마자 월 1200유로(170만원 상당)의 보조금을 받는다. 대신 교과과정 3년6개월을 포함, 모두 10년간 관련업무에 종사해야 하는 의무가 뒤따른다. 아니타 게로잘라베르 학교장은 “기록분야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기 때문에 국가가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프로그램도 라틴어·중세불어·고고학 등으로 짜여져 중세고문서 해독능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후 전문지식 습득과정도 만만치 않다. 해당분야에 배치될 때 반드시 전문교육 프로그램을 거쳐야 하고 현직 전문가들도 승진시험 이외에도 2년에 한번씩 실시되는 정기연수·시험관문을 통과해 지식을 부단히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원본 전자기록도 등장
영국과 프랑스는 고문서뿐 아니라 전자기록분야도 한발짝 앞서가고 있다. 영국은 이미 전자기록 원본까지 보존·관리하는 단계에 들어섰고 프랑스도 이미 1982년부터 전자기록 관리에 나섰다.
특히 영국 TNA는 지난 1년6개월 동안 100기가바이트(700쪽짜리 책 10만권 분량)가량의 전자기록 원본을 모았고 보관여력도 4테라바이트(4000기가바이트)에 이른다. 전자기록도 최초 작성된 문서프로그램 환경에서 작성돼야 원본으로 인정되고 법적인 효력도 갖게 된다.
TNA 대비드 글로버 전자관리시스템부서장은 “디지털공간에서도 최초에 작성된 문서가 가장 중요하다”며 “전자기록 역시 새로 변질되거나 훼손될 우려가 있는 만큼 전자기록의 원본관리에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英기록보존소 사라소장
직위공모제 정착… 기록문화 주도
영국 특유의 직위공모제는 기록문화를 주도하는 핵으로 불릴 만했다.
영국 국립기록보존소(TNA)가 국민열람서비스기관으로 변신할 수 있는 근저에는 합리적으로 짜여진 인사·조직시스템이 깔려 있었던 것. 이는 공무원의 낙하산으로 얼룩져 있는 국내기록기관의 파행적인 인사관행과 확연하게 대비된다.
특히 차관급인 사라 타이악(Sarah Tyacke·58·사진) 소장은 단순한 기록보존보다는 열람과 온라인서비스 등 기록물 활용에 치중, TNA의 변신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 그의 재직기간 중 컨베이어 벨트로 구축한 열람서비스체제가 도입됐고 정부로부터 성과를 인정받아 포상받기도 했다.
타이악 소장은 1991년 직위공모에서 뽑힌 후 다섯번째 연임, 13년째 재직 중이다. 소장의 임기는 3년씩 모두 다섯차례 연임할 수 있어 최대 15년까지 가능하다. 연봉은 9만파운드(1억8000만원) 수준이다. 원래 직위공모 때 타이악 소장은 전문지식뿐 아니라 대영박물관의 지도분야 부서장 때 발휘한 탁월한 행정능력에서 더 후한 점수를 받아 영입됐다.
이와 관련, 전략, 재정·자원관리부문의 윌마 존스 본부장은 “타이악 소장 이전에는 주로 아키비스트 중심의 전문가가 주류를 이뤘으나 이후에는 행정능력이 더 중요시되고 있는 추세”라며 “기록관리도 보존에서 열람과 공개를 강화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존스 본부장을 비롯한 정부기록 및 전자기록관리 등 4개 집행조직의 본부장도 모두 직위공모에서 전문성과 조직운용능력 등을 엄격히 따진 후 선발되고 있다. 경영진이 시장의 검증과정을 거쳐 탄탄하게 짜여지는 셈이다.
경영진의 독립적인 위상도 주목할 만하다. 사라 소장은 주요기록관리정책에 관해 대법원장에 바로 보고하며 지휘를 받을 뿐 여타 부처에 대해 독립적인 권한과 지위를 갖고 있다.


佛현대기록관 폴린느부관장
“독일 나치에 점령당했을 때 빼앗기거나 만들어진 각종 기록을 50여년 간에 걸친 전방위 복원 노력으로 대부분 되찾았습니다.”
프랑스 현대기록관(Le Centre Des Archives Contemporaines) 폴린 무아레즈(Pauline Moirez·사진) 부관장이 나치 점령 당시 유출된 기록물 반환노력에 대해 묻는 질문에 답한 말이다.
무아레즈 부관장은 “정부가 기록추적작업에 나서 1945년 소련의 독일점령 때 베를린에서 러시아 모스크바로 옮겨진 것을 알았다””라며 “1990년 러시아와 수교한 뒤 4년에 걸친 외교적 노력 끝에 약 10km 분량의 기록물을 돌려받았다”고 말했다. 이 기록물은 각종 경찰치안문서들이 주류를 이루고 1930∼40년대 정치가·언론인·예술가 등의 활동정보도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 중에는 나치 협력자 명단도 입수돼 언론에 공개됐다”고 덧붙였다. 원래 프랑스는 나치 점령 당시 만들어진 비시정권의 지도자와 협력자를 부역자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처벌과 숙청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치 점령기의 기록복원과 청산작업이 반세기 이상 집요하게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개인기록 보호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무아레즈 부관장은 “개인의료기록의 경우 아들·손자 등 3대까지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판단, 150년 이후에나 공개한다”며 “또한 개인 사생활과 가족생활기록도 60∼100년으로 정해 생전에 부당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서고도 자랑거리 중 하나다. 기록관 건물은 지하 1∼5층을 문서고로 쓰고 지상 1, 2층을 도서실과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다.
무아레즈 부관장은 “미학적 가치를 중요시해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며 “특히 문서를 지하에 보존, 별도의 냉방장치가 필요하지 않아 경비절감에도 보탬이 된다”고 지적했다.

- 세계일보 7월 14일자

특별기획취재팀 / 채희창·박병진·주춘렬·김형구·이우승기자
(special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