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들의 전당, 건물도 명품
삼성미술관 ‘리움’, 세계적 건축가들이 설계 참여
국보급 전통 미술(문화재)과 근·현대 한국 미술, 세계적인 현대 미술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이 서울에 생겼다. 삼성미술관 ‘리움’(리움·관장 홍라희)이 10월13일 문을 열었다. 2천4백여 평 대지 위에 연건평 8천5백 평 규모. 리움은 삼성그룹 설립자 집안의 성(Lee)과 미술관을 뜻하는 영어 단어(Museum)의 어미(um)를 조합해 만든 명칭이다.
리움은 전통 미술을 전시하는 ‘뮤지엄1’과 국내외 현대 미술을 전시하는 ‘뮤지엄2’,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 안의 ‘블랙박스’ 등 세 군데 전시 공간을 갖추고 있다. 뮤지엄1과 뮤지엄2는 호암미술관과 호암갤러리 등에 흩어져 있던 명품을 끌어모은 상설 전시관 형태로 운영된다. 특히 뮤지엄1에는 청자진사연화문 표형주자(국보 133호)를 비롯해 국립박물관의 소장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삼성미술관 소유 고미술품 1백20여점이 상설 전시된다.
뮤지엄2에서 선보이는 근·현대 미술도 이곳의 자랑이다.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작품에서부터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김환기 백남준을 거쳐 서도호나 이 불 등 젊은 작가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개관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마크 로스코·도널드 저드·프랭크 스텔라 등 1945년 이후 추상 미술 사조를 이끌었던 작가들과 매튜 바니·데미언 허스트에 이르는 거장들의 걸작도 눈길을 끈다.
리움의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 안에 위치한 블랙박스에서는 각종 기획전이 열릴 예정이다. 용인의 호암미술관은 앞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기능을 강화한 기획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도 현재 모습 그대로 유지된다.
삼성, 한남동 일대에 대규모 문화타운 조성
이로써 삼성문화재단은 호암미술관·호암갤러리·로댕갤러리에 이어 리움을 개관함으로써 소장품 1만5천 점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미술관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다. 삼성은 앞으로 한남동 일대에 대규모 문화 타운을 건설할 계획이다. ‘리움은 주변에 있는 국립극장·국립중앙박물관과 더불어 서울의 새로운 문화지형도를 구축할 것이다’라는 미술관측의 설명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리움은 소장품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로도 눈길을 끈다. 마리오 보타(스위스) 장 누벨(프랑스) 렘 쿨하스(네덜란드) 등 세계 톱클래스 건축가 3명이 힘을 합쳐 완성한 미술관은 소장품 못지 않은 예술 작품이다. 삼성의 시야가 국내를 넘어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프랑스의 퐁피두센터, 영국의 테이트 모건 등 세계적인 미술관들에 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은 특유의 명품주의 취향을 발휘하며, 이들 거대 미술관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건축 실험을 성공시켰다.
리움은 대사관과 기업 총수들의 저택이 산재한 서울 한남동 남산 기슭의 고급 주택가에 포복하듯 낮게 엎드려 있다. 이 지역의 고도 제한 때문에 건물이 위보다 밑으로 파고든 형상이다. 이 때문에 세계적 건축가 3명이 함께 만든 명품 건축물 세 동은 생각보다 아담하고 단정해 보인다.
그 중 눈에 띄는 건물이 스위스 출신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지은 뮤지엄1이다. 성곽을 연상시키는 직육면체와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원뿔이 한 세트로, 대지 면적 7백 평에 건평은 2천9백 평이다. 가로 줄무늬가 선명한 핑크빛 테라코타 벽돌에서 마리오 보타 특유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역원추형 타워는 이 건물뿐 아니라 미술관 전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창문 하나 없어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속은 햇빛을 가득 담고 있다. 유리로 덮인 천장을 통해 들어온 빛은 원뿔 밑에 위치한 지하 로비까지 수직으로 떨어진다. 이 로비는 뮤지엄1과 뮤지엄2,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로 바로 연결되는 미술관의 중심이다.
지하 로비에서 원뿔의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뮤지엄1에 이른다. 그곳에 국보와 보물 들이 가는 조명을 받으며 3m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다른 작품의 간섭 없이 한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 미술관측 설명이다. 뮤지엄1의 책임을 맡고 있는 김재열 부관장은 “3~4개월 주기로 전시물을 바꾸어 1년 정도 지나면 전체 소장품이 순환되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뮤지엄1이 전시 작품을 부각하기 위해 건축 자체의 미학을 최대한 자제했다면, 장 누벨이 설계한 뮤지엄2는 건물 자체가 설치 미술품이다. 세계 최초로 검게 녹슨 스테인리스 강판을 사용해 지은 뮤지엄2에는 기둥이 없다. 대신 스테인리스 강판으로 만든 박스가 외벽 겸 전시 공간이다. 현재 80여 점의 현대 미술 작품이 전시 중인데, 이곳 또한 뮤지엄1과 마찬가지로 삼성미술관의 소장품들이 순환 전시될 예정이다.
뮤지엄2는 땅을 파고 건물을 집어넣은 형태여서, 건물 안에서 창 밖으로 땅을 깎아 만든 외벽이 훤히 보인다. 거기에 철망을 치고 땅을 파헤칠 때 나온 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건축물은 문명의 상처 위에 솟은 기념비와 같다. 장 누벨은 그 상처를 봉합하지 않고 건축물의 한 부분으로 보존했다”라고 뮤지엄2의 큐레이터를 맡고 있는 홍라영 수석 부관장이 말했다.
뮤지엄1과 뮤지엄2가 건축가의 성향만큼이나 상이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면, 렘 쿨하스가 설계한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는 대지의 아래쪽에서 조용하게 두 건물을 흡수해 융합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자 도시 설계자라는 렘 쿨하스에 의해 전혀 다른 세 건축물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한 셈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오는 10월19일부터 개관 기념으로 <뮤즈-움?:다원성의 교류>전을 열어 건축가 세 사람이 호흡을 맞춘 이야기를 펼쳐 보일 예정이다. 연말까지는 사전에 전화로 예약(02-2014-6901)해야 관람할 수 있다.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시사저널2004.10.21(78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