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함에 숨겨진 調和…'몽환성'이 깔린 한국미
[편집자주]에카르트는 최초로 ‘조선미술’에 대한 통사를 저술한 미론가이다. 조선의 예술을 당시 형성된 근대적 예술 이론 속에서 체계적인 미학적 범주를 사용해가며 바라봤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미에 대한 첫번째 검토대상이 될 가치가 있다. 필자인 권영필 교수는 에카르트가 한국미술을 기본적으로 서구 그리스 미술에 대응하는 고전미술로 파악했으며 그것은 절제와 유연성 속에서 절묘한 균형미를 구현한 것으로 복잡한 치장보다는 소박한 자연을 추구한 것으로 한국미를 평한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 예술에 부족한 ‘완성도’에 대한 욕구, 특유의 몽환성과 모방적 경향을 에카르트가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음을 지적한다.
독일인 안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 1884~1971)가 약관의 나이에 한국에 온 것은 1909년이었다. 그는 당초 가톨릭의 베네딕트 교단의 봉직자로 부임해 19년간 체류했다. 말하자면 그의 인생의 중요한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것이다. 식민지라는 당시의 특수사정 속에서도 한국어를 즐겨 배우고, 한국문화에 심취해 전국을 여행하면서 문화유적과 미술품을 조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24년부터 몇년간 경성제대에서 언어학과 미술사를 강의하기도했다.
1928년에 귀국한 후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한국의 교육학’으로 박사학위(1931)를 취득했으며, 그 이후에 발표한 한국문화에 관한 많은 논저들 속에서 한국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표출해 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귀국한지 1년 후에 출간한 ‘조선미술사’(독문판, 영문판)이다. 한국미술에 관한 최초의 책이다.
이 에카르트의 책에 앞서서 1923년 즈음에 철학자 박종홍이 조선미술을 소개하는 일련의 글을 ‘개벽’誌에 몇 차레 발표한 적은 있었으나, 아직 일관된 역사관과 미학이 반영된 저서의 형식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 아쉬운 점이다. 하여간 에카르트의 저서는 ‘최초’라는 공훈적 입장도 있지만, 한국미술에 대해 세계미술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양식적 분석을 가하고, 특히 한국미의 특징을 밝힌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데에 아무도 이견을 제기치 않을 것이다.
그의 이와같은 학문적 성과는 그 당시 국제학계의 연구 동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20세기를 전후한 유럽의 미술사학계는 변혁의 시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양식이론이 대두되면서 미술사의 새로운 영역들이 두드러진다. 하인리히 뵐플린(1864-1945)에 의해 바로크가 의미를 갖게되는가 하면, 알로이스 리글(1858-1905)은 비유럽 미술문화적 성격인 항가리의 고대미술품을 주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세계미술사’로 향한 관점의 전환에 박차를 가한 것은 20세기 초부터 본격화된 유럽 열강들의 중앙아시아 탐사와 발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불교미술을 재인식할 뿐만아니라, 아울러 다양한 조형물 속에서 동서미술교섭의 흔적을 실감하게 된다. 요컨데 동아시아 미술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10년대와 20년대에 오면 서구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이 동아시아에 전파된다. 구체적으로 뵐플린이 그의 주저 ‘미술사의 기초개념’을 써낸 것이 1916년이고, 일본의 미학자인 우에노 나호테루(上野直昭, 1882-1973)가 그 이론을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베를린에서 였다. 그는 그 후 1927년 경성제국대학의 교수가 됐다.
한편 일본 자체 내에서도 일본미의 문제와 양식이론에 실질적으로 접근한 경우는 192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일본 미술사를 대상으로 해서 최초로 양식개념을 적용한 경우는 1912년 동경대학의 강사 어네스트 페놀로사(1853-1908)가 쓴 ‘중국과 일본의 미술의 제시대’(영문판)인데, 또한 이 책의 번역판은 이로부터 10년 후인 1921년에 사회학자인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 1860-1921)에 의해 출간되는 사정이었다.
고전예술이란 양식으로 한국미 파악
더욱이 에카르트가 이러한 동서 미술사학계의 물결을 탈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미술사연구를 독일어 문화권이 주도했던 점과 무엇보다도 그가 그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자유로운 사회교제가 가능했던 신부라는 국제적 신분에 속해 있었던 덕분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양식이론의 거두인 리글의 대표저서뿐만아니라, 중앙아시아 발굴의 주도자였던 독일의 알베르트 그륜베델(1856-1935), 알베르트 폰 르콕(1860-1930) 등의 보고서를 직접 섭렵함으로써 자기 미술사학의 중추체계를 완성했던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한국미술을 고전미술로 해석한다. 건축, 불탑, 조각, 회화(특히 벽화), 도자기 등 한국미술의 대부분의 장르에 고전적인 특질이 내재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고전성은 무엇인가. 우선 좌우대칭적인 구조, 힘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감과 평온함을 말한다. 때문에 그에 의하면 이것은 단순성의 개념과도 상통한다. 마치 바로크와 대립되는 르네상스의 캐논과도 같다고 해야겠다.
이러한 단순성과 더불어 한국미술에는 ‘꾸밈없는’ 소박성이 함께한다. 거기에는 과도한 장식을 피하는 절제가 수반된다. 복잡하고 어수선한 것이나, 야한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는다. 에카르트의 이와 같은 개념설정과 해석은 오늘날 에른스트 곰브리치(1911-2001)의 이론에 의해 어느 정도 소통의 길이 열린다. 곰브리치는 야만적인 장식성과는 달리 “서양 미술에 있어서의 절제라는 미적 이상이 고전적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단순성을 고전원리로 해석하고, 그것의 시원을 고대 수사학에서부터 캐내었던 것이다.
한국미 추출을 위한 에카르트의 대상 선택은 남다른 면이 있다. 특별히 그가 건축에 대해 주시하고 있음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건축이 미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미술의 본질이 ‘삶을 바탕으로 한 것’에 존재한다는 그의 미학에 근거한다. 따라서 현세와 내세의 삶을 잇는 무덤 축조물과 그 내부의 미술은 자연스럽게 높은 의미층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그가 도자기, 특히 고려청자에 높은 평가를 메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에카르트는 한중일 삼국의 미적 양태를 비교함으로써 한국미를 두드러지게 한다. “조선의 경우, 중국 여성의 纏足, 일본의 盆栽와 같은 불구의 미를 이상으로 삼지 않고, 항상 아름다움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각을 지녀, 고전적으로 표현한다”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그의 평가가 과장된 것이라 느껴진다면, 그가 말한 다른 구절을 참고할 수 있다. “중국의 기술, 조선 양식의 아름다움, 유연성, 거기에 자연스럽게 갖춰진 조화의 감각, 일본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색채애호”로 세나라의 특징을 구별지웠다.
한국미에 대한 에카르트의 정의가 매양 상찬 일변도만은 아니다. 가끔씩 내비치는 비판적인 언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예로 안동 칠층석탑에 대해 “예술적 완전성에 대한 강한 욕구가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한 점이나, 전반적으로 한국미에 “몽환적” 특징이 있다는 언급은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나아가 “창조적 조형 능력은 모방 능력 이상으로는 발달하지 않았다”라든가, “과거의 형식에 만족하는” 보수성에 대한 비판 등은 매우 직설적이기까지 하다.
결론적으로 에카르트의 한국미론은 매우 개발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미학적 근거에서 한국미술을 평가했고, 더욱이 미적 범주론적 의미에서 그 길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방금 본 것처럼 한국미의 소극적인 측면을 서슴없이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대의 미론자들과 차별성을 보이는 점이기도 하다.
모방에 안주하는 보수성은 비판해
한편 오늘날의 미술사 비평의 관점에서 에카르트의 한국미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예컨대 그가 최고의 이상으로 내세운 그리스의 고전미는 한국미에 대해 진정한 ‘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에카르트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서 한국미의 자존력을 높였다는 견해는 여전하다. 그가 근본적으로 한국미를 폄하할 의도가 없는한 타자논의에로의 대입은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미술을 그리스 미술뿐만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인도 미술과 비교하는 것은 세계미술사의 시각에서 한국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적극적 관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리스 고전미 숭상의 미의 하이라키 설정에서 우리미의 또 다른 특징인 ‘소박미’가 고전미와 대등한 위치로 파악되어야 하는 미적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청될 뿐이다. 여기에서 한국식의 독자적인 미의 체계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것은 에카르트의 몫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이다.
권영필 / 한예종 미학
필자는 파리3대학에서 미술사를 수학하고, 독일 쾰른대학에서 “조선 묵죽화의 비교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박물관 학예사로 재직했으며, 고려대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미적 상상력과 미술사학’, ‘실크로드 미술’, ‘렌투스 양식의 미술’이 있으며, 역서로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칸딘스키)’와 ‘조선미술사(에카르트)’가 있다.
에카르트는 독일인 신부로 조선에 20여년간 체류하며 경성제국대학에서 언어와 미술사를 강의했다.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던 그는 독일로 돌아간 이듬해인 1929년 최초의 한국미술 通史인 ‘조선미술사’를 펴냈는데, 건축에서부터 조각과 불탑미술, 불교조각, 고구려시대 회화, 신라·고려·조선의 도자기 예술, 그리고 수공예품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미술이 총 망라돼 있다. 그의 연구방법은 철저하게 작품자체에 의존하는 실증주의적 방식이었다. 기존 미술사가 편년에 치중하는 고고학적 관점이라든가 문헌을 중심으로 한 역사주의적 입장이었던 것과는 달리, 에카르트는 미적 특성과 양식 국면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접근해 근대미술사의 기반을 다졌다고 평가되고 있다. ‘조선미술사’ 외에도 에카르트는 말년까지 ‘조선어 문법’, ‘한국의 음악, 가곡, 무용’ ,‘한국문학사’, ‘한국의 도자기’ 등 한국학 관련 논문과 서평을 1백3십여편 발표했다. 현재 국내에는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만이 번역돼 있으며, 연구논문으로는 ‘안드레 에카르트의 미술관’(권영필), ‘타자의 역사, 동일자의 미술사-『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에 나타난 조선미술 인식’(윤세진) 등이 있다.
■ 에카르트를 사로잡은 한국의 예술
아래는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본문에서 발췌한 사진과 그에 대한 에카르트의 논평이다(아래는 번역본 페이지).
●‘분황사 석탑’, 경주. “이 탑은 신라시대에 속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다…이 조선 탑은 구조적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고, 사방의 입구가 힘찬 부조로 장식돼있기 때문에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서안 부근의 탑은 한쪽에 문을 하나 더함으로써 변화가 생기고 있는데, 조각이나 부조가 전혀 없이 층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은 매우 過重하다는 느낌을 준다.” p107 ⓒ
●‘묘주 부부상’, 쌍영총 고분벽화, 고구려 6세기. “4세기에서 6세기 고구려의 묘실은 잘 보존된 색채가 풍부한 프레스코화로서 그 당시 세계의 전설이 묘사돼 있다. 이와 같이 보존상태가 좋고 훌륭하게 만들어진 묘실화는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p374 ⓒ
●‘청자상감국화문표형병’, 고려, 높이 27㎝ “조선의 청자, 특히 상감돼있는 것은 다시금 고귀한 선과 변화가 풍부한 형식, 명확하지만 억제된 장식에 대한 섬세한 감각, 색조의 품위있는 절제 및 훌륭한 기술 등의 관점에서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중국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p375 ⓒ
●‘석굴암 십대제자 석고모형’. “이들의 용모가 유태의 영향에서 온 듯한 뾰족한 코, 태도, 신발이란 점에서 외국인이라고 인식된다. 놀라움이 변해 의문으로 변해간다. 조선은 어떻게 하여 이 예술적 능력을 손에 넣게 된 것일까.” p213 ⓒ
●‘기마인물형 토기’5~6세기 높이 29.2㎝ 국립중앙박물관 “해부학적으로 비판의 여지가 많지만, 이러한 작품은 동시대인의 예술 활동을 향한 강한 충동을 보여준다. 신라시대의 도자기는 경직된 디자인도 많은데도, 자연의 미술적 처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p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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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2005.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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