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를 거론할 때, 비껴갈 수 없는 인물이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다. 알려져있다시피 그는 일찍이 한국 최초의 예술학 관련 단행본인 ‘조선과 그 예술’(1922)을 펴냈다. 이 책은, 일제의 잔악한 3.1운동 탄압의 충격 속에 ‘요미우리신문’에 연재 기고했던 ‘조선인을 생각한다’로 시작해, 2년 남짓 동안 쓴 ‘조선과 그 예술’ 관련 글들 9편 모은 것이다.
그의 나이 30세 안팎의 일이다. 그 당시 야나기는 이미 191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문예지인 ‘시라카바(白樺)’ 창간에 참여해 많은 서구 동시대 예술에 관한 논고를 발표했으며, ‘윌리엄 블레이크’(1914), ‘종교와 그 진리’(1917), ‘종교적 기적’(1921) 등 예술과 종교 관련 단행본들을 연이어 발표해 필명을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일제의 조선 정책을 비판하는 글 ‘조선인을 생각한다’로 일본 시민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차에 발간된 책이라서, ‘조선과 그 예술’은 한껏 눈길을 끌었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이 “조선문제에 대한 공분”과 “그 예술에 대한 사모”에서 쓴 글로서, “조선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고 그 특점에 대한 하나의 고찰”이라고 밝히고 있다. 역사적 연구 즉, ‘시간상으로 나타난 예술에 관한 서술’이 아니라, ‘마음에 나타난 미술의 이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시 일본에 유입됐던 서구의 실증주의적이고 양식사적 방법으로 학문이라는 이름은 빌었으되 그 미적 본질 자체보다는 한국의 부재증명에 눈이 어두웠던, 이른 바 ‘일제 관학자들’과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그는 한국의 문화?예술의 독자성, 즉 미적 특질을 밝히는 데에 뜻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로, 야나기는 우리에게 미와 예술에 관한 근대적 사유를 촉발시키며, 민족 정체성 규명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후, 한국예술 관련 글쓰기는 작고할 때까지 40여 년간 이어졌으며, 그 생산물들 대부분은 총 25권의 ‘야나기 무네요시 전집’(츠쿠바서방 刊) 중 제6권으로 모아져 있다.
야나기의 ‘한국미’에 관한 관심의 전모를 살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생각들이 만남 이후 저술된 방대한 민예나 불교미학 관련 글들 구석구석에도 속속들이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 가운데 우리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됐던 건 ‘비애의 미’론이다. 처음 야나기를 한국미술로 깊이 빨아들인 조형 요소는 우아한 線이었다. 선의 아름다움은 강대하고 태연한 중국의 형태, 일본미술에서의 현란한 색채와 비교해, 한국미술에 고유한 특징으로 여겨졌다. 석굴암의 불상, 미륵금동반가사유상, 각 사찰의 범종들에 나타나는 비천문, 고구려 벽화, 하다못해 지붕이나 버선의 선 등 일상용품들에 이르기 까지 온갖 조형물들에 넘쳐흐르는 가늘고 길게 끄는 선들에서 그는 ‘영원한 미’를 체험했다. 이와 더불어 즐겨 입는 흰옷, 조선백자에서 보여지는 색채의 결핍이 자아내는 한국인들의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마음’, ‘민족에 의해 경험된 괴로움과 슬픔’, 그리고 ‘하늘을 향한 동경’을 읽어내고, 일컬어 ‘비애 미’라 했다.
당시 ‘비애의 미’는 분명히 그가 한국미술을 최상급의 예술로 삼는 단서였다. 불과 2~3년간의 일이니 그 생각을 그리 확고한 것으로도 근본적인 것으로도 보긴 어렵다. 흥미롭게도 그 중요성은 오히려 이후 우리 미학예술학사에 아주 긴 여운을 드리운 그 타당성시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유효성을 다시금 따지는 일은 너무 지루하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으로 가름하자. 그의 말대로 선적인 요소와 백색은 미적 대상으로서 한국미술이 지닌 두드러진 양식적 특징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양식 근거가 ‘비애의 미’로 해석 가능한 것인가. 도대체 야나기에서 이러한 발견은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가. 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그의 입장을 평가하는 데 얼마나 근본적으로 고려돼야 할 사항인가. 그리고 ‘비애의 미’의 미학적 의미는 진정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들이다.
한국예술에 대한 야나기의 흠모와 발견이 안겨주는 감동과 일본인인 그에게 씌우는 식민주의적 혐의라는 간극 사이에서, 언젠가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지적했듯이, 그동안 우리의 태도는 얼마나 뒤틀렸었던가. 그래서 이러한 의문들 앞에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가볍지만은 않다.
‘비애의 미’는 청년기에 그가 뭇 예술을 이해하는 창으로 삼았던 미적 범주 가운데 하나다. 한국미술과의 만남 훨씬 이전부터, 고호, 고갱, 세잔느, 로댕, 포글러, 엘그레코 등 서구의 근현대 미술가들,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동판화의 선묘 등 종교철학, 중세미술 관련 글들 속에서, 하늘과의 대화, 즉 종교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그가 최상급 예술들에 늘 붙이던 찬사가 다름 아니라 비극미이자 비애미였다. 비극미가 미적 범주론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하건대,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다.
선과 백색을 비애와 연결시킨 것은 3.1운동의 참상에 대한 정서적 대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피지배 민족의 심리적 표상으로만 이해한 것은 아니다. 한국예술을 만나 그동안 자신이 몰입해 왔던 서구 근대의 ‘예술’ 혹은 ‘미술’ 개념을 떠나 당당하게 또 다른 하나의 ‘예술’의 가능성을 개척하고 있다. 즉, 이후 독창적인 예술론으로 발전하는 ‘민예론’의 싹을 틔우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예술이다. 그리고 급기야 그의 노년에 ‘不二好醜의 미’ 등 불교미학의 이론적 정초 과정에서 그 ‘不二美’의 전형으로 삼게 된 것이 한국예술이다. 물론 이때 그의 주된 관심사는 그가 그토록 예찬했던 석굴암 석불 같은 종래의 마스터들에 의한 걸작들에서 떠나 막사발 류의 도자기나 가구 같은 무명의 민중 생활용품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지만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한국의 예술을 단지 ‘한국미’의 독자성을 입증하는 실마리로서가 아니라, 더 나아가 서구의 근대성을 넘어서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대안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서구 근대 ‘미술’개념이 안고 있는 제문제들, 즉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이원론에 기초한 표상주의, 엘리트주의의 한계를 넘어, 민중(‘중생’ 개념에 가까운), 무심, 자연, 단순, 불이론 등 동아시아의 종교철학적 토대 위에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이 민예론이고, 불교미학의 정초를 위한 시도다. 이 때 ‘한국미’의 문제는 다른 차원의 보편성으로 해소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렇듯이 서구 근대 ‘예술’을 발생사적 기원으로 삼으면서도 그의 한국예술 이해는 ‘민예미’, 혹은 ‘불이미’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의 형이상학에 근거 한 예술세계로 이행했다. 서세동점기 제국주의적 전체주의적 권력이 뿜어내는 광기 속에서, 그의 문제 설정은 역설적이다. 아니 절묘하게 전복적이라 할만하다.
‘비애의 미’론이든, 혹은 ‘민예미’론이든, 이땅의 젊은이들이 ‘예술’이야말로 인문적 가치중의 가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래서 ‘예술’을 향한 삶 충동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은 적지않게 그에 신세지고 있다. 철학자 박종홍, 미학미술사학자 고유섭, 그리고 이후의 숱한 학자들, 화가 나혜석, 허영숙, 시인 남궁벽, 소설가 염상섭, 가깝게는 최근의 현대미술인들에 이르기까지 그 직접적 영향 수수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예컨대 그의 민예미론은 ‘소박미’를 말하는 고유섭, 그 이래의 최순우 같은 미술사학자들, ‘자연주의’를 말하는 김원룡, ‘원융과 조화’를 말하는 강우방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수많은 화가, 건축가, 공예가들의 ‘한국미’관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드리운 사실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그를 식민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것만으로도 ‘한국미’의 존재 증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민족지학적 관점에서 다만 그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비애’나 ‘민예’로 고착시키려 했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오히려 전체주의가 드리우는 또 다른 그림자 같아 두렵다. 이론을 떠나 무려 스물 한차례에 걸쳤던 한국여행 그리고 늘 이에 뒤따랐던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운동, 각종 전시회나 강연회, 연구회 참여 등 현장 예술운동 같은 그의 실천을 염두에 두면 겸연쩍기까지 하다.
진정한 향기를 품는 ‘한국미’란, 어떤 의미에서든, 비교예술학적 방법론이나 이질적이라고 여겨지는 타자 영접 없이는 가능치 않은 일이다. 섣부른 일제잔재청산 작업으로 우리의 ‘한국미’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초라하고 옹색한 결과만 낳을 것이다. 그 어렵던 시절 “국가는 짧고 예술은 길다…승리하는 것은 그들(한국)의 아름다움이지 우리(일본)의 칼은 아니다”라 야나기의 ‘한국미’론의 미덕도 다시 들여다 볼 때가 됐다. ‘한국미’의 진정한 해석가능성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경계를 넘을 때 열리고, 그 때에야 양심적인 세계시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비로소 진정한 미나 예술로 가는 길도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야나기에 대한 탈근대적 비판도 그제야 열릴 것이다.
이인범 / 한예종 한국예술연구소 미학
필자는 홍익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예술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조선예술과 야나기무네요시', '유영국과 초기추상'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백색담론에 대하여', '구술사, 또 하나의 한국근현대예술사의 방법' 등이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일본에서 비평활동을 했던 야나기는 골동품상에서 조선시대 청화백자를 우연히 구입한 뒤 한국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 스물한 차례나 조선을 답사, 조선백자와 민화를 수집했으며, 조선 예술품을 극찬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과 그 예술’, ‘종교와 그 진리’, ‘신에 대하여’, ‘茶와 美’ 등이 있다. 또한 1924년 조선미술관을 설립했고,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미술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야나기의 미론은 고유섭을 비롯해 이후 최순우, 김원룡, 이동주 등에게 영향을 끼쳐 왔다. 그는 한국의 지형조건인 반도가 한국역사를 불리하게 만들어, 미술 역시 슬픈 애조를 띨 수밖에 없다며 한국미를 ‘비애의 미’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부정적인(?) 미론은 후대에 끊임없는 찬반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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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13
2005.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