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약동에서 '淸楚美'로 가는 여정
최열 미술평론가
윤희순은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비평가의 길을 걸어야 했던 비운의 청년이었다. 1902년에 태어나 철들 무렵엔 어느덧 조국이 식민지로 떨어졌으되 1919년 3.1 민족해방운동의 세례를 받은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 때 누구나 그랬듯 민족해방의 희망을 키웠고 가난 속에서도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소망했다.
서구유화를 배우는 근대청년 시절 때마침 불어닥친 맑스주의와 조선학운동에 힘입어 이른바 민족성을 표상했던 향토색 논의와 계급사회 혁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혁명이 필요한 식민지시절,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혁명전사이길 포기한 윤희순은 전통으로부터 민족의 실체를 밝혀 민족의 복권을 꿈꾸기 시작했다. 때마침 오세창이 ‘槿域書畵徵’을 출간한 때가 1928년이었으니까 스물여섯 뜨거운 청년 윤희순은 전통에 깊숙히 탐닉해 들어갔다.
하지만 이때에도 윤희순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학과 같은 범주에 다가서지 않았다. 먼저 그는 조선의 풍토를 기반으로 하는 향토색 논의의 범주에 천착하고 있었다. 바로 그게 당시 현장 미술인들을 사로잡은 미의식으로서 조선스러운 것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서른도 채 안된 윤희순은 비평가로서 이상범의 작품 ‘황량’이 지닌 ‘쓸쓸한 荒原’을 ‘향토색’이라고 주장했다. 그 향토색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의 산은 히말라야나 곤륜산 같은 산이 아니다. 씨의 그림을 볼 때에 더구나 산을 볼 때에 산의 민둥민둥한 0을 볼 때에는 오랫동안 외지에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준다.”(‘협전을 보고’, 매일신보(1930.10.21-28)) 조선 美의 특색을 민둥산(野山)으로, 분위기를 거친 들판(荒原)으로 규정한 이 시절 윤희순의 미학적 정의는 당시 시대를 풍미한 풍토 미감 일반이었던 듯 하다. 그리고 두해 뒤 정확히 윤희순이 서른 살 때인 1932년, 저 ‘향토색, 향토정조’에 대해 ‘관념적 미학의 타락형태’라고 준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타락형태의 전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배경을 보면 그들은 조선정조를 내이기 위하여 초가집, 門樓, 야산, 무너진 흙담 등의 題材를 모아놓았다. 인물을 묘사함에 물동이 얹은 부인에 아기 업은 소녀, 노란 저고리 파란치마, 백의, 주모 등을 가져온다. 정물에까지 향토색을 내이랴고 色箱子, 소반 등등을 벌려 놓는다.”(‘제11회 조선미전의 제현상’, 매일신보(1932.6.1-8)) 그리고 이런 작품이 ‘인생, 사회 내지 문화 다시 말해 조선에 어떠한 가치를 던져 주느냐’고 반문했다. 그 작품들에 깔린 정서가 ‘안일, 쇠약, 침체인 데다가 희망이 없는, 절망에 가까운 회색이며 퇴폐 또는 노예적 긍정이나 굴복’ 따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째, 소재주의 비판 둘째, 퇴폐주의 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윤희순의 이같은 견해는 조선적인 것, 조선의 미학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는 관문이었다. 이러한 비판의식을 보일 수 있던 거점은 다름 아닌 ‘힘의 미학’이었다. 일찍이 김복진이 외래미술과 토착미술의 항쟁, 대립 구도를 설정해 놓았던 바, 민족미술의 지향을 역동성에 두었던 터에 윤희순은 아름다움의 본질, 美의 핵심을 ‘인생에 조화의 율동과 생활을 고조, 발전시키는 힘(力)’이라고 서술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윤희순은 ‘힘의 약동, 생활의 발전이 없는 작품은 사이비 미술’이라고 가차없이 비판하고 나설 수 있었다. 1930년대 초반 이러한 인식은 조선 미학 이해의 수준을 새롭게 이끌 바탕이었다.
그보다 한 해 앞선 1931년 윤희순은 ‘제10회 조미전평’(동아일보, 1931.5.31-6.9)이란 글에서 일본 제국의 미술정책 본질을 ‘지방적 특수정책’이라고 꿰뚫었다. 이어 다음 해 발표한 글에서 이른바 로칼 칼라(local color)의 구현이야말로 일본제국이 장려하는 최선의 식민지 미술의 특색이었음을 확인한 윤희순은 일본과 조선, 제국과 식민의 대립 구도를 설정하는 탁월한 통찰력을 과시했던 게다.
이런 가운데 청년 윤희순은 조선, 식민의 미학이 어떤 것이어야 했는지 질문했고, 퇴폐와 발전, 안일과 약동, 절망과 희망의 갈등 속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힘의 약동, 생활의 발전’을 조선적인 아름다움의 요체라고 답변했다. 윤희순에게 식민지 현실은 ‘적막하고 퇴락했으며, 황폐한 산과 쓸쓸한 들판’들이 널려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희순은 새로운 발견을 촉구했다. ‘인왕산과 같이 철벽같은 바위들이-고통과 핍박에 엄연히 집착하는 巖塊와 뚝겁고 굿세인 集積’을 보라고, ‘淸明한 大空이 있으며 붉은 언덕의 태양을 집어삼킬 듯한 赤土’가 있음을 말이다. 더불어 윤희순은 다음처럼 썼다.
“로칼 칼라- 는 결코 외국인 여행가에게 엑조틱(exotic)한 소박한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저속적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건물(物)과 첨경(景), 인물에 조선 독특한 형태 및 색채를 담으랴고 또는 愛향토적 감정을 발휘하랴고 의도하얏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자연과 인생의 아무러한 약동적 미와 생명과 에네르기- 를 발휘, 앙양하지 못한 것은 작가의 정서 내지 미감 즉 미학 형태와 오류 및 타락이 그 치명적 소인일 것이다.” (‘제11회 조선미전의 제 현상’, 매일신보(1932.6.1-8)).
이러한 주장은 조선의 아름다움, 조선의 미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자연풍토와 사회의식이라는 두가지의 유기체적 통합을 꾀함으로써 민족 단위의 미학 핵심에 다가서고자 했던 것이다. 인왕산과 적토의 굳셈이라는 자연의 특색(자연미)을 인생의 생명약동과 생활의 발전이란 사회의식(예술미)에 결합시킴으로써 그 독자한 정서와 미학을 구현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청년시절 윤희순은 ‘低落된 민중이 약동적 현상’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했었다. 그에 대한 해답은 긴 세월 여행끝인 1946년 마흔 다섯에야 얻을 수 있었다. ‘국제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으로서 민족해방과 민족의식 재건’을 꾀해 나갈 당면 과제로써 ‘현실을 대담하게 응시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및 희망과 신념을 주는 평민적 조형미’의 획득이었다.
다시 말해 윤희순은 민주주의 국가의 미의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 기준을 통찰, 제시했던 것이다. 물론 지난 시대에 대한 그 미의식의 탐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1946년에 발표한 ‘풍토양식’이란 글에서 윤희순은 고대조선의 특이한 양식으로 ‘독특한 반도성’으로 ‘아늑하고 아담한 綠野와 맵자한 山容’에서 절묘한 조화, 통일을, 나아가 청자의 푸른빛을 거론하면서 ‘조선의 이렇게 맑고 고운 푸른 하늘은 淸淨無垢 그것이며, 淸楚한 정서를 주민에게 주었다’면서 ‘명쾌한 광선 밑에서는 산악의 윤곽과 선이 선명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언제든지 아담한 중에도 도드라진 자연’을 대한다고 썼다.
“量에 있어서 대륙의 大, 島國의 小에 비해 반도는 中庸이라 할 수 있다…그러면 반도의 특질은 무엇인가. 양만 내세우거나 색만에 치우치거나 하지 않는 것에 있다. 즉 선, 형, 질의 유기적 조화라 하겠다. 이와 같이 신라통일 이후의 미술은 반도적인 풍토의 자율성을 농후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풍토양식’, 조선미술사 연구, 서울신문사, 1946)
이러한 도달은 윤희순이 1932년에 ‘조선의 독특한 하늘 샛푸픈 깨끗한 하늘의 情景 하나 그려 논 작품을 발견’하고 싶어했던 끝에 획득한 결론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15년여에 걸친 길고 긴 탐험의 여정을 마감하는 것이었거니와 탐험의 도구는 다름 아닌 미술사학이었다. 윤희순은 1932년 계급성, 시대성, 민족성 세 가지를 미술론의 핵심으로 내세운 이래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제시한 ‘세계사의 일환으로서 연속고찰’의 방법론 및 ‘시간과 공간과의 연쇄관계의 일환으로 보는 사적(史的) 고찰의 방법’론에 따라 조선적인 것, 조선의 아름다움을 매듭지었다.
윤희순이 제시한 朝鮮美의 핵심은 ‘청초’라 할 것이다. 이것은 ‘깨끗하고 맑은 하늘과 아담한 풍토(자연)의 환경’에서 비롯하는 개념이다. 자연의 특색을 그대로 예술에 통일시킨 것이다. 그러나 윤희순은 모든 미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는 관점에 따라 청초미를 조선미의 보편개념으로 이끌어 올리지는 않았다. ‘시대양식’이란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와 시대에 따라 끝없이 다른 특색을 보인다는 것이 윤희순의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윤희순이 조선의 아름다움을 무엇이라고 보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 무엇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나는 바로 이 점에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가난한 식민지 지식인이 겨우 마흔 다섯 독보의 삶을 살면서 남긴 자연과 사회, 계급과 시대를 두루 아우르는 관점과 방법은, 화려한 명성을 누리며 심각한 연구대상으로 떠오른 다른 누구의 결실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최열 / 미술평론가 -저자는 미술평론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화전’, ‘한국근대미술비평사', '김복진의 예술세계’ 등이 있다.
●윤희순(1902~1947)
미술사학자이자, 화가며, 비평가였다. 1930년부터 비평문을 발표, ‘매일신보’에 서예?사군자의 시대적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예술의 시대성을 준엄하게 내세웠고, 이듬해엔 식민지시대 비평사의 최대 문제작인 ‘조선미술의 당면과제’를 발표했다. 그의 비평은 1920~30년대 김복진 중심의 프로 미술사상, 김용준 중심의 심미주의 미술사상과 더불어 삼대 민족미술 구상을 이뤘다.
전통회화의 봉건성을 비판하며 새로운 방법론을 제기한 윤희순의 미술사학은 흔히 ‘진보 민족주의적’인 이념과 방법이라 평가되고 있다. 그의 방법론은 이른바 史的 고찰로, 심미주의와 사회성 일면을 내세우는 방법론을 지양하고, ‘오직 시대와 경우에 따라서 형식이 앞선 미술과 내용이 노출된 미술’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朝鮮美術史 硏究』 윤희순 지음| 열화당 刊| 2001| 207쪽
1930년대 후반부터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한 한국미술 관련글들을 묶어낸 윤희순의 대표적 저서. 절판된 책을 열화당에서 복간해냈다. 1946년에 발간했던 초판본을 최대한 살리면서, 본문과 인용문, 도판 등 책 전체를 새롭게 꾸몄다. 시대양식을 포괄하는 풍토양식을 통해 우리 미술의 민족성을 고찰하는 1부에 이어, 2부 ‘삼국시대 畵人攷’에서는 솔거, 담징, 김충의를 조명했다. 3부에선 조선조 회화의 성격과 특징을 살펴 당대 화가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동양의 서화 여기사상’, ‘사군자의 예술적 한계’, ‘화조화’, ‘조형예술의 전통과 그 계승발전의 문제’ 등의 평론과 산문은 ‘小論’으로 묶여 그의 미학적, 비평적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윤희순을 사로잡은 한국예술
●도암 이재초상, 작자미상, 조선18세기.
조선에는 서양와의 현물에 접촉할 기회도 적었음에 비해 도리어 양풍을 잘 섭수하였음은 무슨 까닭일까. 여기에도 조선반도의 고유한 풍토양식과 민족의 기질에 근원적 요인이 있는 것이다…인체묘사에 있어 동양과 서양의 다른 점은, 서양에서는 해부학적으로 따지고 다시 광선에 의한 명암, 즉 음영을 기조로 하여 표현함에 대하여, 동양에서는 인체를 자연의 섭리로서 따져서 서양의 형태묘사에 대한 생태표현의 방법을 취해 왔다. 즉 안면의 주요한 융기부를 五嶽虛染으로 보아가지고, 다시 여기에 陰陽虛實을 구명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68~69쪽)
●서직수초상, 이명기.김홍도, 1796년.
단원 김홍도는 초엽의 안견에 비해 중엽을 대표할만한 화원출신의 거장이다. 그는 도석화를 비롯해 풍속화?산수?화훼?영모 등 종횡무진의 畵才를 가졌거니와, 화원으로서의 임무는 어진을 내는 것이었다. 사진술이 없었던 당시에는 영정의 필요를 절실히 느꼈던 것으로, 실로 도화서의 화원이 절차탁마 하여 계승발전한 초상화 수법이야말로 조선조를 대표하는 회화예술의 하나인 것이다. (132~133쪽)
●쌍묘도, 변상벽, 조선18세기.
동양화의 동양화다운 특질은 인물화다 산수화보다 화조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근대 유럽회화가 헬레니즘의 인간본위에서 한걸음 나아가서 독립된 풍경화를 이루어 가지고 신생면을 개척하였음과 같이, 동양화의 새로운 발전의 여지가 화조화에도 없지 않다. 毛筆의 섬세한 신경이라든지 微妙妖?한 시취는 서양화의 감각과는 전혀 달라서 동양 독자의 영역이라 하겠다. (166쪽)
●우현리 고분벽화의 천인상, 고구려6~7세기.
예술의 풍토양식을 무시할 수 없음과 같이 시대양식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강서구 우현리 고분벽화에는 남성의 천인과 여성의 천인이 있다. 그 포즈는 상체가 거의 직립상태로서, 표편하는 포건은 병행적으로 나부끼고 있어서 마치 지상에서 줄달음치는 느낌을 준다. 묘사의 선은 헌칠하고 길게 연이되었다. 하늘높이 떴다느니보다는 앞으로 맥진하는, 마치 거리낌없음이 하늘같은 공상의 세계를 달음질치는 기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에 있어 고구려는 이러한 浩然의 기를 가지고 鴨江에 걸쳐 대륙과 반도에 웅거하였었고 팽창되는 국력을 내뻗치었던 것이다. (41쪽)
●와당(고구려, 백재, 신라)
고구려와 신라의 예술양식으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선의 양상이다. 대체로 고구려는 직선이 주로 되어 있고, 신라는 거의 곡선으로 돼있다. 선의 율동을 보더라도 고구려는 내뽑는 기세를 보여주고, 신라는 현란한 장식의 미를 갖추고 있다. 좀더 알기좋게 쓴다면, 고구려의 와당에서 보는 문양은 첫째, 직선이 주다. 둘째,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서 직선과 곡선이 균등하게 배합되고, 셋째, 차차로 곡선이 증가된다. 넷째, 같은 곡선이라도 신라것보다는 동적이고 기운차다. 속도가 있고 여울어진다. 다섯째, 곡선도 끝에 가서는 반드시 銳角을 이룬다. 여섯째, 선의 폭이 신라보다 굵고 둥글다. 여기에 비해 백제와당을 보면 직선이 적어지고 가늘어졌다. 이것이 신라시대에 와서는 전혀 곡선의 미를 발휘하게 된다. (40~41쪽)
●고려의 청자상감
조선의 공예를 빛나게 한 것은 고려청자인데, 청자 중에서도 청자상감은 가장 잘 조선의 미를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수법이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것이었고, 또 우수한 공예미를 나타냈다…그러면 고려의 비색, 즉 청자의 독특한 점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 빛깔이 다 조선의 가을하늘과 같이 청초하고도 맑고 빛나는 신비로운 빛깔이다. 하늘빛 중에서도 지평선 가까이 보이는 연둣빛 하늘-그것은 전기 고려왕조의 평화로운 정서를 상징한 것이다. (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