枯淡, 淸雅, 소규모의 깨끗한 맛, 조선의 美여!
1930년대 尙古主義를 이끌어간 近園 김용준은 이후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미술사학사상 빛나는 업적을 남긴 藝人이었다. 그럼에도 남한 미술사학계가 윤희순이나 김용준 같은 이들의 성취를 무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기운이 남아있으니 남 잘난 줄 모르는 얇고 가벼운 심성 탓으로 돌려둘 뿐이다.
1920년대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거닐던 식민지 청년이 사상편력 끝에 머문 곳이 조선 또는 민족이었음은 식민지 청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상은 다르되 김복진이 그랬고, 윤희순과 고유섭이 그랬다. 서구 심미주의 미학을 흡수하는 한쪽에서 조선 고전주의 예술론에 빠져 들어간 이들 가운데 김용준은 일찍이 조선의 미술이 지닌 특질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精麗巧絶한 미술, 精麗纖細한 線條와 雅淡豊富한 색채.(’동미전을 개최하면서)
겨우 스물 여섯 살인 1930년에 내세운 견해였고 따라서 앞선 연구자들의 성취를 수용한 것일지 모르나 중요한 대목은 ‘조선미술, 민족성’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의식을 뚜렷하게 하는 가운데 ‘정신주의를 기조로 한 문명주의 문화의 방침’을 근심하고 나아가 ‘원시의 예술’에 복귀하는 복고주의를 경계하는 미학태도였다.
“우리들이 취할 조선의 예술은 서구의 그것을 모방하는 데 그침이 아니요, 또는 정치적으로 구분하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설명하는 그것도 아니요, 진실로 그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그 律調를 찾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하여는 우리들은 昔日의 예술은 물론이거니와, 현대가 가진 모든 서구의 예술을 연구하여야 할 필요를 절대적으로 느낀 것이다.”(‘동미전을 개최하면서’)
그의 이 같은 태도가 지속되어 그 뒤 몇 해 동안은 조선 미의 특질을 함축하는 낱말을 절제하는 가운데 역사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유물주의에서 정신주의의 피안으로, 진정한 동양을 찾고 진정한 조선을 찾으려는’ 길고 긴 여행을 떠난 것이다.
탐구의 여정에 나선 김용준은 미술의 朝鮮情調를 민요 아리랑에 빗대어 ‘고요한 田園味와 조선 고유의 長閑한 특색’이라 일렀다. 또 고구려 강서벽화를 거론하면서 ‘강철같은 선, 순수한 동양정신의 거룩한 색채, 동양의 정신을 암시한 색채’를 운위했다. 여기서 알맹이는 ‘長閑味’란 낱말인데 유장하고 여유 있다는 뜻만 새길 수 있을 뿐, 더 자세한 설명이 없어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다른 대상을 설명하는 가운데 ‘우리는 悲壯의 美를 요구하고, 壯만으로의 미는 요구치 않는다’는 대목이 있어 미루어 볼 수 있을 뿐이다. 덧붙이자면 같은 글에서 김용준은 모방주의를 천박하다고 비판하는 가운데 ‘我의 독립적 가치, 생명, 자유’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것은 “조선의 마음, 조선의 빛”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정체는 불투명했고 결론을 얻기엔 모든 게 부족했다. 書와 사군자야말로 “예술의 극치”이며 “우주의 정력의 결정인 동시에 전 인격의 구상적 현현”임을 발견해 나가는 단계였다. 이 때 김용준은 주목할만한 주장을 펼쳤다.
“한 나라의 예술의 성쇠는 그 나라의 역사적 조건, 다시 말하면 그 나라의 정치적 범위와 그 나라의 지리적 조건(기후, 온도, 자연, 생활현상, 풍속 등)에 비추어 그 국민의 정신적 활동이 어디만큼 가능한가 함을 볼 수 있다. 예술비평가 텐느(Hippolyte. A. Taine)는 이러한 논법으로 어떠한 시대의 예술을 비평하려 하였다.” (‘제11회 서화협회전 인상’)
그 뒤 몇해 동안 김용준은 칩거에 들어간 듯 일체 글을 발표하지 않다가 1935년이 끝날 무렵 어떤 작가의 작품에 대해 ‘조선의 공기가 가득 차고, 조선의 풀 향기가 떠돈다고 들’ 평가하고 있음을 소개했다. 이렇게 한 걸음씩 다가선 조선 미 탐구는 1936년 5월 비로소 한 매듭을 지었다.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란 글에서다. 당시 미술계를 휩쓸던 향토색이란 낱말을 대상으로 삼은 이 글에서 김용준은 이론 쪽에선 볼만한 것이 없지만 김종태, 김중현 같은 화가가 창작 쪽에서 볼만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먼저 향토색을 로컬 걸러(local color)라고 표현하고 김종태가 “조선인의 嗜好色인 원시적 색조를 민족적인 색채로 알고, 색채 상으로 조선적인 리듬을 찾아내고자 했다”고 소개했다. 다음, 김중현의 경우 “取才로 조선을 대변하려고 했다”고 소개했다.
김용준은 조선정조를 조선 풍속 따위 취재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론상 모순이라고 비판하면서 “민족 공통의 기호색은 없다”고 단정하고 나아가 “회화의 서사적 기술로서 민족 전체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도 곤란하다”고 단언했다. 또한 ‘동양주의 복귀라는 것도 인식착오의 불가능’이라고 비판한 다음, 야나기 무네요시의 견해인 ‘哀調’에 대해서도 ‘반의 긍정과 반의 부인’으로 맞섰다. 애조는 조선사람의 氣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 끝에 내놓은 조선 미의 핵심은 바로 ‘枯淡한 맛, 淸雅한 맛, 소규모의 깨끗한 맛, 閑雅한 맛’이다.
그 맛은 어떤 것인가. 김용준은 “삼면이 바다인 반도이기에 대륙적인 호방한 기개, 웅장한 화면이 없는 대신 반도적인 맛과 뜰 앞 一樹花를 조용히 심은 듯한 한적한 작품”이라면서 “한아한 맛은 정신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결코 의식적으로 표현할 것이 아니다”고 헤아렸다. 다시 말해 자연발생적인 것이란 주장이다.
김용준은 그 뒤 “시대를 따라 달리 표현되는 양식을 전제로 삼아 각 시대를 통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무엇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질적 특색으로 ‘소박한 맛, 典雅한 맛’을 들었지만 이것은 관념적이고 심리적인 경지의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難問題라고 규정했다.
해방 뒤 마흔에 접어든 김용준은 이미 미술사학의 한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47년에 발표한 ‘민족문화문제’란 글에서 김용준은 민족과 국가의 특수성을 거론하면서 ‘민족주의 사상이야말로 인류의 근본사상’이라고 지적하는 가운데 ‘광채나는 전통’이란 글에서 민족미술의 시대적 특색을 밝히는 한편, 중국?일본과 비교하는 가운데 일본인들이 조선미술의 특색을 규정해 왔던 바를 강력히 반박했다.
김용준은 1948년 자신이 탐구해 온 사학 연구의 모든 것을 담은 ‘조선미술대요’를 펴냈다. 여기서 김용준은 시대마다 그 미학을 모두 달리 요약했다. 패기의 고구려, 웅혼과 비약의 신라, 화려와 명랑의 백제, 우미와 애련의 고려, 소박과 평민의 조선이 그러하거니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핵심을 다음처럼 표현했다.
“구수하고, 시원스럽고, 어리석고, 아담한 구석이 있는 것이고서야 우리에게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어느 나라 미술보다도 조선민족의 미술에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함축하고서도 김용준은 시대에 따라 일관성 있게 일치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만 그 같은 함축은 ‘순 조선적인 감각’ 또는 ‘조선적인 소박, 고아한 향토미’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절대화시키진 않았다. 그 뒤 김용준은 민족적 미라든지, 조선적인 특색, 조선적인 색채를 꾸준히 거론했지만 정작 그 핵심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폭을 넓혔을 뿐이다. 이같은 모호함은 밑바탕의 고유한 미의식과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미의식을 중첩시키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인 듯 하다. 이러한 김용준의 조선 미 탐구는 20세기 조선 미학에서 중대한 지적 자산이다. 한 민족주의자가 文史哲 겸전의 생애를 살아가면서 깨우친 통찰의 감각은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최열 / 미술평론가
김용준(1904~1967)
화가이며 미술평론가, 그리고 미술사학자이자 수필가다. 시대사상을 중시했던 그는 尙古主義를 자기 것으로 여겨 서화골동취미를 한껏 뽐내며 조선미술사와 수묵채색으로 해방전후 전후 신세대 화단을 주도했다. 해방후 ‘조선미술사대요’ 등의 집필은 실증주의 사학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사회경제사학, 비교미술사학, 심리 및 사상사를 아우르는 종합적 방법론을 보여준 뛰어난 업적이었다. 20세기 미술사를 대중화한 것 역시 큰 기여중 하나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미술에서부터 광복전후 작가들까지 섬세한 안목으로 섭렵하고 있다.
김용준 하면 ‘문체’를 빼놓고 넘어갈 수 없다. 1948년 30여편의 수필을 묶어 ‘근원수필’을 출간했는데, 예스럽고 담박하면서도 격조 높은 언어구사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도 이 수필집은 '문학과 非문학의 장르 구분을 넘어 광복 전후 남겨진 문장 가운데 가장 순도 높은 글로 꼽힌다.
그는 한국정쟁 이후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교수,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활동했다.
『近園 김용준 전집』1~5| 김용준 지음| 열화당 刊| 2001| 287쪽 내외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근원수필’이 출간된 바 있는데, 이후 발표됐던 글까지 묶어서 전집으로 출간됐다. 1권 ‘새근원수필’, 2권 ‘조선미술 대요’, 3권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 4권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5권 ‘민족미술론’으로 구성됐다.
‘근원수필’은 ‘매화’이야기에서부터 試와 畵에 대한 이야기, 시대상을 드러내는 시론 등 때로는 시를 읊조리듯, 때로는 날카로운 비평의 칼날에 마주치듯 서정과 서사를 넘나든다. ‘조선미술사대요’는 삼국 이전부터 고려?조선의 미술, 그리고 일제시대 미술까지 역사와 미학들을 섬세하게 더듬고 있다.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에선 안견, 강희안, 이상좌의 작품에서부터 김홍도까지 이르는 조선시대 미술을. 그리고 2부에선 조선화의 기법을 세부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4권 ‘고구려 고분벽화연구’는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 문화를 보되, 인접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고구려 문화가 어떻게 풍부해지고, 어떻게 보다 고구려다워지는지를 밝히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5권 ‘민족미술론’에선 근대미술, 즉 서양미술에 대한 고찰과 민족문화론, 전통미의 재조명. 나아가 화단 시평들을 늘어놓고 있다. 화단에 대한 평가와 색채논쟁도 주목해볼만하다.
□ 김용준을 사로잡은 한국예술
● 추사 김정희의 글씨
미는 무엇으로써 아느냐, 미를 보고 느끼려면 직관이 필요합니다. 직관은 일조일석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 또 보고, 친하고 하여 미술작품이 가진 정신이 내 정신과 서로 교류하기까지 될 때 비로소 그 무한히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그러면 나는 지금 쉽게 말하여 이렇게 미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최고한 경지에 있는 순결한 감정은 곧 미요 곧 善이요 곧 眞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최고한 인격의 顯現일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고려나 혹은 조선의 도자에서 혹은 추사의 書에서 이러한 감정의 정화를 느끼지 않습니까. 이 충동은 곧 미에서 오는 것일 것입니다. (전집1, 178~179쪽)
● (조선향토색 논쟁에서 민족고유의 색은 없다는 논리를 부치며)
그러면 조선심은 어디서 찾겠는가. 조선의 공기를 감촉케 할, 조선의 정서를 느끼게 할 가장 좋은 표현방식은 무엇이겠는가…枯淡한 맛, 그렇다. 조선인의 예술에는 무엇보다 먼저 고담한 맛이 숨어 있다. 동양의 가장 큰 대륙을 뒤로 끼고, 남은 삼면이 모두 바다뿐인 이 반도의 백성들은 그들의 예술이 대륙적이 아닐 것은 물론이다. 대륙적이 아닌 데는 호방한 기개는 찾을 수 없다. 웅장한 화면을 바랄 수는 없다. 호방한 기개와 웅장한 화면이 없는 대신에 가장 반도적인, 신비적이라 할 만큼 청아한 맛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 소규모의 깨끗한 맛이 진실로 속이지 못할 조선의 마음이 아닌가 한다. (전집5, 132~133쪽)
● 고구려의 사신도 *
고구려의 사신도는 이러한 신수들이 결코 환상적인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동물’로 나타났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사신도가 가진 동물적 형태와 동물적 특성들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벽화는, 이러한 모든 특징들이 아주 핍진한 묘사를 통해 생동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그들의 사실적 추구는 사물의 객관적 진실을 심도있게 파악하면서 다만 俗學的인 形似 추구에만 급급하지 않았으며, 보다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더 많이 작용했다는 것이 특징적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의 집약적 표현은 고구려회화로 하여금 웅건하고 패기로 충만케 하였으며, 흘러 넘치는 정열을 느끼게 한다. 고구려의 사신도에서 ‘氣韻生動’의 최고 경지를 유감 없이 구현하고 있다는 定評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전집4, 113쪽)
● 고려 청자상감
고려기의 병들이 그 목이 가늘고 궁둥이가 오뚝하고 어깨로 흘러내려 오는 선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으며, 象形으로 만든 그릇들이 거의 실용으로 쓸 수가 없도록 건드리면 똑 떨어지도록 첨예한 부분을 주저하지 않고 만든 것들을 볼 때, 하나같이 유리장에나 넣고 볼 물건이지 이것이 당시의 사람들이 조석으로 만지고 쓰고 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고구려나 신라의 미술 같은 건강하고 줄기찬 미는 사라지고 섬세하고 연약한 비실용의 미다. 그러나 고려기의 미가 우리의 미적 감정을 날래게 흔들어 주는 것만은 사실이니 이것은 곧 비극의 미와 같다. 어떤 評家는 말하기를 비극의 미는 최고의 미라 했다. 중국미술은 대지에 집착하는 의지적인 미를 가졌고, 일본미술은 현세를 향락하는 정취의 미를 가졌는데, 고려의 미술은 현실을 遊離하려는 비애의 미를 가졌다 하였다. (전집2, 170~171쪽)
● 주상관매도, 김홍도, 조선 18세기 말~19세기 초
화보 移模에서 현실묘사에로…이러한 중대한 회화상의 혁명이 무엇을 유인함이었을까. 물을 것 없이 그것은 단원의 巨腕이 역대로 기계적으로 전습하여ㅏ 온 화보 모방주의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眼前에 전개되는 내 나라의 자연이, 걷잡을 수 없이 재현하고 싶은 커다란 정열로 인하여 應物象形을 하게 된 所以일 것이다…단원은 산수를 그리는데 결코 당의를 입은 인물이거나 중국식 건물이나 중국식 산천을 그리는 법이 없었다. 그 많은 산과 물과 나무며 인물들이 모조리 당대의 현실면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이었다. (전집3, 97~98쪽)
● 장승업그림
19세기말에 나타난 오원 장승업은 일자무식이며 남의 집 심부름꾼으로 전전하면서 독학으로 대성한 화가였으니, 그는 인물?산수?器玩?화훼?蘆雁 등 어느 것이나 사실의 묘를 극하여 기운이 생동하며 격취가 높고 묵법과 설채와 운필에 신경지를 개척했다…오원은 그 작품을 통하여 문학 본위의 소위 문인화사상 제화주의에 통격을 가했다. 오원은 객관세계를 예리하게 관찰하며 핍진한 사실기술로써 종래의 관념적이며 공식적인 묘사태도에 반기를 날렸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처해 있던 사회적 배경에서 온 것이라고 보겠다. 오원의 돌연적 출현도 인민적 격양의 시기가 낳은 필연적 출현일 것이다. (전집3, 201~202쪽)
● 비원
신라의 아압지는 얼마나 화려하였던지 모르나, 오직 한군데 옛모습 그대로 남은 비원을 보아 조선정원의 미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一草一石에 이르기까지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데가 없건만 모두 다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는 저 일인들의 솜씨로 된 정원을 많이 보았다. 자연미를 내느라고 야단스런 굴곡을 지으며, 때묻은 돌들을 함부로 나열하여 도리어 부자연하게 만들고, 깎고 다듬는다고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이발하듯 중의 머리를 만들어 놓는 그 천박한 정원들을 많이 보았다. 조선정원에는 그러한 부자연함이 한군데도 없다. 중국식 정원처럼 그렇게 야단스럽지도 않고 일본식 정원처럼 그렇게 밉지도 않고, 밝고 맑고 아취있는 것이 우리 좃너의 정원인 것이다. (전집3, 184~185쪽)
● 조선건축
“우리 건축의 민족적 특색은 한마디로 말하여 토실토실한 것을 요구한다. 단정하고 아담한 것을 요구한다. 토실토실하고 단정하고 아담하다는 특색은 형태상으로는 곡선 혹은 意趣로 나타나고, 양적으로는 묵직한 맛이 있고, 규모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멋없이 커 보이거나 왜소한 것이 아니라 크거나 작거나 짜임새가 있어 보이는 인상을 갖게 한다. 이리하여 우리 건축은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자연환경에 알맞게 아늑하고 따뜻한 맛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역대 건축에서뿐만 아니라 조선미술 유산의 전반에 걸쳐 느끼게 되는 특색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본질적 특색을 了解함이 없이는 민족적 형식은 적용될 수 없으며, 이러한 특색들을 구현하기에 노력한다면 건축재료의 변천 여하를 물론하고 조선건축의 아름다움은 계승될 것이다.”(전집5, 17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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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