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이 타계했다. 언론들은 세계적인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들을 앞다투어 전하고 있다. 추모 행사가 한국, 독일, 미국 등지에서 동시에 열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와 관련, 국내에서보다는 오히려 국외에서 높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고 있다. 그의 예술 활동이 국내보다는 주로 외국 무대에서 이루어진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사회의 예술을 보는, 나아가 우리사회의 집단적 경직성과 더 깊은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맞아죽을 고백인지는 모르겠으나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기가 전국을 달구고, 온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을 붉게 물들였을 때 나는 한번도 응원에 참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친 집단적 분위기를 개운치 않게 생각했다.

이런 집단적 에너지가 역동성을 지니는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게 되면 오히려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을 억압하는 올무의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나아가 그것은 집단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그 집단적 분위기는 모두가 같은 동류집단의 일원이 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하게 되는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래교육의 화두는 창의성이다. 모두가 규범에 따른, 규범적인 틀 속에서는 새로운 생각을 지닐 수 없다는 의미이다. 백남준의 경우, 만일 그가 창의적이지 못했다면 비디오 아트(video art)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의 예술세계를 결코 개척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 백남준의 예술 활동을 보면 퍼포먼스 중 갑자기 넥타이를 자르는 장면, 피아노를 부수는 장면, 바이올린을 끌고 다니다가 물속에 던져버리는 장면 등,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세계적인 예술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속해있던 사회의 탄력적인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그가 한국에서 활동한 예술가였다면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백남준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교육적 함의는 매우 크다는 생각이다.

우리사회는 지나치게 엄숙주의와 집단적 분위기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성장하여 자유로운 사고를 하기는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적으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일찍이 한국을 떠났거나 국적만 한국인인 경우가 많은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결국 교육의 문제다.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개인의 차이와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우리 교육의 집단 지향적 분위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교육은 개인의 존중이며, 존중된 개인들이 모여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살아있는 집단을 형성토록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교육도 개인 존중이 교육의 대 전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제 새롭게 변화되는 우리 교육의 모습을 보고 싶다.

경향신문 2.7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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