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왔지만 청계천 상징 조형물인 올덴버그의 ‘스프링’은 아직 얼어 있는 것 같다. 공론화를 거치지 않은 선정 과정을 이유로 미술계가 반대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황병기 이경성씨 등 원로 예술인 모임이 얼마 전 작고한 백남준의 작품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하면, 그 제안도 간단치 않아 보인다. 백남준 역시 올덴버그처럼 청계천 복원을 직접 경험하고 교감한 게 아니고 공론화 과정 없기는 마찬가지다. 수십억원을 들여 도시를 아름답게 하자고 벌이는 일인데, 왜 이리 복잡하고 혼란스러울까. 올덴버그, 백남준 등 세계 일류작가의 작품을 거론하면서도 우리는 일류문화를 흔쾌히 즐길 수 없는 것일까?
우리 문화 환경은 열악하다는 소리를 곧잘 듣지만, 일류 예술가의 작품들이 우리 주변 공공장소에 의외로 많다. 광화문 교보빌딩은 뉴욕 월드 파이낸셜 센터를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시저 펠리의 작품이고, 광화문의 ‘해머링 맨’은 조너선 보롭스키의 대표작이다. 강남 포스코의 ‘아마벨’ 역시 가장 지적인 조각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프랭크 스텔라의 역작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보빌딩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건축가의 메시지가 아니라 큰 덩어리의 무생물을 경험할 뿐이다. 나머지도 몇 빼고는 사정이 비슷하다. 예술에 대한 무지나 국수주의적 배타 때문인가? 왜 딴 나라에선 귤 대접 받는 것이 이 땅에선 탱자가 돼버리는가(橘化爲枳)?
문화에서의 일류(一流)는 아류(亞流)의 함정 옆에 선다. 명품과 달리 문화는 사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섬세한 노력을 요구한다. 작가의 브랜드를 사들이는 것을 우선해 작가의 것을 우리 것, 우리 문화로 만드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나무로 작품을 가려버린 ‘아마벨’은 주인조차도 자기 것 아니라고 하는 경우 아닌가.
일류를 통해 얻어야 할 것은 작가의 명성이 아니라 그 작가를 통해 우리 문화를 키우고 즐기는 일이다. 그 작가의 비전과 솜씨를 빌려 우리 삶을 새롭게 상상하고 창의하는 일이다. 그것이 없다면 복제된 일류, 곧 아류가 된다. 아류는 일류와 똑같음을 외치는 데 목숨을 걸 뿐 이 땅의 삶을 창의하지 못한다.
참된 창의는 문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다. 우리는 이걸 너무 쉽게 지나친다. 이 땅에서는 탱자가 되는 일류의 비애가 여기서 기인한다.
이즈음 해서 문화에서의 일류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문화는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한다. 다양한 의미들이 맞부딪쳐 세상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다투고 넓히면서 삶을 새롭게 그리는 것이 문화 본연의 역할이다. 일류는 경제에서 열심히 만드는 것으로 족하다. 문화에서는 세상을 창의하는 다양한 삼류, 넘버스리들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며 살도록 허락되어야 한다.
예술에서의 넘버스리들은 명성이 아니라 세상 삶의 희로애락과 같이하는 작업들을 키운다. 그런 바탕이 결국 세계 문화에 기여하는 우리의 참된 일류를 키울 수 있다. 이제 가렸던 소나무를 치우고 ‘아마벨’을 살리자. 제 몫을 할 만한 작품이다. 그러한 되살림의 의식을 통해 올봄에는 일류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를 이야기해보자.
2006.3.30 조선일보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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