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기
#827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좁다란 재래시장 한가운데 전철의 왕복 철로가 나 있다. 철로 위로는 상인들의 좌판과 수레가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다. 상인들은 전철이 코앞에 왔을 때에야 그것들을 천천히 치웠다가 전철이 가고나면 다시 철로 위로 옮겨 놓는다. 쭈그러진 택시와 버스들이 전철의 긴 꼬리가 되어 뒤를 잇는다. 사람들은 태평하게 그 사이를 오간다. 이곳에서는 사람도, 차도,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걸어 다닌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는 곳, 그러나 문명의 속도에 급속히 떠밀려 가고 있는 곳, 이곳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Bibliotheca Alexandrina)이 있다. 이집트 여행 중 알렉산드리아에 맨 먼저 가보고 싶었던 건 바로 이 도서관 때문이었다. 이 도서관은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건립된 인류 최고(最古)의 도서관이다. 고대 동서양의 두루마리와 파피루스 문헌 등 70여만 권을 소장했었다.
학문의 중심지였고 헬레니즘 문명의 산실이었던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그 정신을 되살려 수십 년간의 연구와 기획.건설 작업을 거쳐 1700여 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나에게 늘 몽환적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본 도서관은 초현대식 건물로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집트답게 '지중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하고 있다는 도서관 건물 입구의 화강석 부조 벽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자와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벽 왼쪽에 새겨진 '월'이라는 한글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반가웠다.
'지구상 모든 민족의 책'을 갖추는 걸 목표로 한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내부 구경을 뒤로 미루고 내가 맨 먼저 한 일은 우리 출판사 책을 검색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 입력해 보았지만 우리 출판사 책은 뜨지 않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역사가 훨씬 오래된 다른 출판사 이름을 입력해 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권의 책도 뜨지 않았다. '아니, 이럴 리가.' 급기야 국가 검색란에 들어가 'Korea'를 찾기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 등 다른 나라들은 있었으나 한국은 나라 검색란에조차 들어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담아 검색어 'Korea'를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한 뒤 엔터키를 눌렀다. 떴다, 단 두 권의 책이! 한 권은 '세계를 간다-Korea', 다른 한 권은 '2002 FIFA 월드컵 축구'였다. '그래, 이것이 바로 한국의 학문과 출판의 현실이구나!' 이런 생각에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2002년 가을에 개관했다. 그 후 5년 가까이 'Korea'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관심을 전혀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가 구축돼 있고 유비쿼터스 출판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한국이 정작 출판의 콘텐트는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도서관(圖書館)이 중요한 이유는 '관(館)'을 채우고 있는 '도서(圖書)'가 있기 때문이듯이 콘텐트 없는 IT 인프라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한국의 출판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출판의 양이 아니라 책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하는 출판의 내용과 질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이건 학문 분야에서건 저자들의 역량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춰야 함은 물론 한국과 동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담론 주제를 창의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 출판사의 경쟁력 있는 역량을 먼저 갖춰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당당할 수 없는 나는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희망을 안고 돌아왔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컴퓨터의 검색창에 뜬 두 권의 책이 출판 기획의 방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ㅡ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