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비디오아트’란 용어가 일반 대중에게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1984년 백남준의 위성중계 공연 예술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ning Mr. Owell)이 KBS1-TV를 통해서 방영되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더 현실적으로는 이 공연을 계기로 고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예술은 사기’임을 천명하면서 떠들썩하게 귀국했던 백남준이란 정체모를 아티스트를 둘러싼 수군거림 속에서였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티스트’일 뿐 아니라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는 사실을 당시 놀랍게 접했던 우리들은 오늘날 그의 사망이후에도 여전히 그를 창시자 대좌에 모시고 ‘비디오아트의 아버지’, ‘비디오의 선사(禪師)’, ‘음극선의 카르마(karma)’, ‘TV 수상기의 존 케이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칭송하길 마다하지 않는다.

 


“과연 그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이고 아버지인가?” 이 물음에 당연히 우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에는 조목조목 이유를 열거하며 명확한 대답을 내리기 곤란해 한다. 상세한 미술사적 정황을 이해하기 쉽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선구자의 반열에 오른 다른 이들과의 “누가 먼저냐?”라는 비교분석이 그리 쉽지 않은 탓이다. 많은 미술사가들에 의해서 백남준은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와 볼프 포스텔(Volf Vostell)과의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가림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머쥐어 선구자의 자리지킴을 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라 편차를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도 선구자 자리매김을 백남준에게 안겨주는 견해가 지배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비디오아트 역사 기술에서 대부분은 백남준을 유일한 창시자로 평가하려고 하기 보다는 선구자 반열에서 결정적 위치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비디오 역사에서 늘 거론되는 ‘조지 브레히트’의 경우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론가 프리드만 말쉬(Fridedeman Malsch)는 그 예로 브레히트의 1959년 작품< 텔레비전 피스(Television Piece)>를 꼽고 있다. 이 작품은 실상 TV 모니터를 활용하여 카드놀이를 하는 해프닝에 대한 계획일 뿐 실제로 텔레비전을 살 형편이 못되어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비디오아트의 시원으로 지목된 이유는 브레히트가 평소 스코어 카드에 해프닝 행위를 기획하고 그 스코어 자체를 작품화하는 개념적 성향의 플럭서스(Fluxus) 미술가였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이라면 당시 같은 플럭서스 멤버였던 백남준 역시 1959년 그의 ‘액션 뮤직’에 TV 모니터를 사용할 계획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 또한 당시 실현되지 않은 계획이란 점에서 비디오아트의 기원이 될 소지가 있다. 한편 알리손 시몬스(Allison Summons)는 50년대 중반 니콜라스 쇼퍼(Nicolas Schoffer)가 TV 방송용 영화를 제작한 일을 비디오아트의 시원으로 삼기도 한 걸 보면 비디오아트의 기원과 창시자의 개념을 가리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1963년을 비디오아트의 기원으로 주목하고 있다.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의 백남준의 개인전과 같은 해 두 달 뒤에 뉴욕의 스몰린 갤러리에서 열린 포스텔의 전시가 그것이다. 사실 포스텔은 백남준의 당시 전시를 관람한 뒤 로 명명한 자신의 전시에서 백남준의 것과 일정부분 유사한 전시내용을 선보였던 탓에 원전성에 대한 비판이 있어왔다. 그런 탓일까? 포스텔은 TV를 소재로 한 자신의 전시가 1963년이 처음이 아니라 1958년에도 있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비디오아트의 기원으로 정초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술사가 에디트 데커(Edith Decker)는포스텔이 제출한 자료가 연도 조작 등 신빙성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빌 비올라’ 같은 작가나 ‘에디트 데커’ 등 다수의 이론가가 비디오아트의 기원으로 파악하고 있는 시점은 앞서 언급한 1963년의 백남준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음악의 전람회: 전자텔레비전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으로부터이다. ‘브레히트’를 비디오아트의 기원으로 꼽았던 ‘프리드만 말쉬’ 마저 백남준의 이 전시를 ‘최초의 전자 영상예술’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백남준은 이 전시에서 3대의 장치된 피아노와 함께 13대의 장치된 TV를 통해 선보였는데 TV내부의 회로에 다이오드(Diode)를 거꾸로 끼워 정형이미지를 무작위로 변경하거나 강력한 자석으로 음극선의 정상적 방향을 방해하여 왜곡된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비디오아트의 기원으로 거론되는 포스텔이나 백남준의 작품들이 비디오카메라나 VTR이 사용되지 않았는데도 어째서 오늘날 비디오아트로 호칭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 같다. ‘TV아트’나 ‘일렉트로닉 아트’로 혼재되어 사용되던 명칭이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번지기 시작한 1970년을 전후로 ‘비디오아트’로 통칭되어 온 것이지만 비디오아트라는 용어 사용이 비디오 매체의 출현과 관계하기 보다는 오디오(audio)에 대비되는 개념과 관계한 것임을 숙지해야 할듯하다. 즉. ‘TV브라운관에 전자빔의 주사선을 통해 직접 눈에 보이는 화상을 재현하는 전기신호’로 이해하는 일이다. 따라서 1965년 소니사가 뉴욕에서 포터블 VTR과 포타팩 소형카메라를 시판하는 첫날 백남준이 포타팩을 구입해서 돌아오던 길에 마침 뉴욕을 방문 중인 교황 바오로 6세의 퍼레이드 장면을 촬영하고 저녁에 카페 아 고고 (Cafe a Go-Go)에서 상영한 시점을 비디오아트의 실제적 기원으로 삼는 것은 매우 편협한 진술일 수 있다. ‘말쉬’의 지적대로 포타팩은 단지 텔레비전 오브제와는 다른 비디오테이프의 탄생을 알린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965년의 포타팩의 개발과 1970년대의 비디오 신세사이저의 개발 역시 비디오아트를 다차원적으로 확장한 계기가 될 뿐 기원의 직접적인 시발점은 아닌 것이다.

 


비디오아트의 기원은 일방적인 송신의 TV매체에 대항하는, 플럭서스 정신의 계승과 더불어 TV로부터 유발되는 비디오 전자 테크놀로지의 매체적 실험으로부터 싹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의 파르나스 갤러리의 첫 비디오아트 개인전이 비디오테이프 매체의 개발 이후 형성된 ‘모노비디오아트’의 특성보다는 오늘날에 유행처럼 번지는 설치, 조각, 퍼포먼스를 공유하는 ‘멀티비디오아트’의 특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대열에서도 유독 키가 더 큰 어른임이 분명한 백남준이 ‘미디어아트의 아버지’로 정초될 미래도 멀지 않다 할 것이다. ●

 



출전 /


김성호,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아버지? - 비디오아트의 미술사적 기원", 『미술세계』, 2006. 3월호, pp.67-68.